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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하나님 (창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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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나이 아흔 아홉 살 되던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마라.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야 한다. 나는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을 맺는다. 네 후손을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그는 엎드렸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라 부르리라.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너와 너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주변 모든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땅에 아브람만 사는 것 아닙니다. 그가 남 보다 키가 커서였을까요? 인물이 잘 나서였을까요? 가문이 대단합니까? 아브람은 어느 하나도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는 시골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우상 장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가 완벽한 사람만 뽑지 않으십니다. 아브람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를 보십시오. 그는 정말 성질이 거칠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외고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벌 떨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큰 일꾼으로 쓰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그런 배신자가 예수님의 제자 자격이 있습니까? 그는 기도해야 할 때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통 당하실 때 멀리 떨어져 몸조심 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사도의 자격 있습니까? 물론 깨끗하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흠이 없는 사람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도 부르셨습니다. 마태와 같은 세리도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흔 아홉 살입니다. 웬만하면 아무 일도 못 할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가정 불화도 잦았습니다. 아내의 질투로 마음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부끄럽게 첩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닙니다. 아내의 강요에 의해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은 것입니다. 그래도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것 때문에 하갈이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전에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자손이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아브라함을 깜짝 놀라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계약을 하신 것입니다. 대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을 퍼부어 주신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오늘은 충격적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기에 신이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산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극찬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 처음 보았다는 그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철석 같이 약속 하고도 배신하는 사람 많이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실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이었습니다. 그는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진실했습니다. 신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말대로만 한다면 자식도 준다. 더 큰 부자(재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림)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면 “하나님 저를 위로하시려면 그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저는 자식은 포기한 지 오랩니다. 이 나이에 무슨 아들입니까? 무자식이 상팔자입니다.” 할 법 하지요. 그러나 그는 고지식하게 믿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이 마음에 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더 뜁니다. 우리도 오늘 이런 아브라함을 배웁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말없이 뚜벅 뚜벅 가는 믿음의 순례자입니다. 말없는 실천가입니다.

Ⅰ.바로 살아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해야 있어라. 바다야 있어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세계는 저절로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란 없는 것에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밀가루로 국수를 만드는 것이 창조가 아닙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각 물질은 창조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창조도 다 보시기에 좋게 지으셨습니다. 완전하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세계가 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은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 지으셨습니다. 또 인간들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합니다. 만물 중에 으뜸 작품이 곧 인간입니다. 고로 인간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을 떠납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고 빕니다. 굿을 합니다. 정말 얄궂은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나이가 99입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래야 됩니다.
한나는 아들 없는 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한 때는 술주정을 부리는, 좋지 못한 여자로 오해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 제사장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직접 약속 받았습니다. 보증수표지요. 이보다 더 확실한 것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권세를 가지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도 거룩한 꿈을 가집시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비전과 꿈에 대해 무어라 말씀했는지를&8228; &8228; &8228;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주십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을 든든히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비웃거나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장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름대로 많이 가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실수를 합니다. 아내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삼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런 의심 없이 아내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도 역시 지친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오지 않습니다. 음성이나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때 사람은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아브라함도 한 때는 휘청, 기우뚱했습니다. 아브라함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저런 분이 왜 그러실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입장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그래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몇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간 시련도 있을 수 있습니다. 38년된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자 곧 나았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도 많습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힐터는 “그대들은 용기를 잃지 말라. 그리하면 내일의 행복은 그대들의 것이 될 것이다.” 했습니다. 기다림도 용기입니다. 행복은 얼마나 잘 기다리느냐에 달렸습니다. 바로 사과 따듯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불안이 옵니다. 정말 하나님이 해 주실까? 때로는 사는 것이 허무할 때도 있습니다. 요즈음 우울증 환자가 대단히 많답니다. 사람이 싫어집니다. 밖에 나가기도 싫습니다. 말도 하기 싫습니다. 안절부절 못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런 고비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내의 배는 불러오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깜박 잊으신 것은 아니신지? 별의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서 넘어질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느 때까지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일흔 다섯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지금 아흔 아홉 살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포기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 내년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하지요. 서두르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멋쟁이십니다. 이렇게 굵직굵직한 축복을 약속하신 것 보세요. 아들 주시고 물질 주시고, 골고루 주신다는 것입니다.

Ⅱ. 약속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어느 날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아들을 주마. 너는 큰 민족을 이루겠다. 동서남북을 다 둘러보아라. 이것 전부 너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람에게 너는 이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하십니다. 그때가 아흔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는 이십 오년 전에 아들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이런 말씀을 되풀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를 아브라함도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년, 늦어도 다음 해 정도로 알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수십 년을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세상에 신실치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약속을 식은 죽 먹듯이 잊어버리는 사람 많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사람을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는 늘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한 신문에 우스운 이야기가 실린 것을 읽었습니다. 한 노인이 죽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신에게 끌려갔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왜 나에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미리 해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네 무슨 서운한 말을 하는가? 나는 자주 자네에게 소식을 전했네. 네 눈이 점차 어두워 돋보기를 끼지 않았나? 그게 첫 번째 소식이었네. 네 귀가 차츰 잘 들리지 않았지? 그것이 두 번째 소식이요. 네 이가 하나, 둘 빠지지 않았나? 그게 세 번째 소식이었네. 게다가 네 사지가 하루하루 노쇠해졌으니 얼마나 네게 소식을 전해야 알아듣겠는가?’라고 했답니다. 그때 어린 소년 몹시 억울하다는 듯이 죽음의 신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저는 눈도 밝습니다. 귀도 잘 들립니다. 이도 튼튼합니다. 어째서 제게는 죽음의 소식도 없이 저를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때 또 ‘자네에게도 소식을 전했으나 자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야. 내가 말해주마. 네 옆집 아저씨가 서른 다섯 살인데 얼마 전에 죽었지? 네 집 건너편에 스물 네 살 난 젊은이가 죽었고. 더군다나 며칠 전에는 갓난 애기가 죽는 것 봤잖아. 그것이 바로 자네에게 전한 소식이네.’하였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살에 하나가 모자라는 아흔 아홉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에게 늦둥이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하나님께 섭섭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장점이었습니다. 위만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늘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이라 해도 누가 딴 말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의 나이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선이 굵고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4월 8일, 6일 만에 장례식을 했습니다. 로마에 무려 400만의 군중이 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대단하지요.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화, 전자수첩, 이메일, 문자메시지, 수첩에 많은 약속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약속 중에는 부담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약속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분 좋은 약속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99살 되신 아브라함 할아버지께 나타났습니다. 너에게 아들을 주마 앞으로 그 후손이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되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는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닙니다. 이미 이런 말씀을 이전에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몇 번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중대한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름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아들 주신다 하실 때 그는 아멘이었습니다. 그 약속 정말 믿기 어려운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제 나이 몇 인데 제 아내가 여자로서는 애기를 가질 수 없는 몸입니다. 안 됩니다.” 라고 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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