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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향을 잃지 않는 인생이 되려면 (창 3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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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일시적인 현실만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성격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무식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이처럼 전격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 열쇠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열화같은 성격으로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던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의 사도 요한이 되었습니다. 살인범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순교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고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라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너무나도 극적으로 변화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야곱'이 라는 인물입니다. 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로 변하는 모습은 마치 불신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신자로 변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자가 성숙한 인격자로 변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교훈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나 고치고 싶은 성격을 가지고 그것이 변화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술 먹는 사람이 술을 끊고자 해도 술 먹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담배 피는 사람이 담배를 끊고자 해도 담배피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고집불통의 사람이 자기가 고집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고집을 잘 꺽지 못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그 강한 주장 때문에 친구도 잃어버리고 가족도 잃어버리고 직장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주장을 잘 꺽지 못합니다. 이처럼 마음으로 원하는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모습과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모습과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100%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10% 정도는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자기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까를 한번쯤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이 변화되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변화되기 원하는 분들은 오늘 이 야곱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먼저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인 에서가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나가려고 하니까 먼저 못나가게 하려고 '못 나간다' 하면서 발뒤꿈치를 잡았는데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은 채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을 가진 야곱이라는 이름을 부모로부터 받게 된 것입니다. 이름을 간단히 풀이하면 '사기꾼, 도둑놈'이란 뜻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를 짓는 야곱의 모습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성을 대표하고 있는 자가 바로 야곱입니다. 또한 야곱은 '끝없는 소유욕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야곱은 무엇이든지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가로채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외삼촌 라반의 딸과 재산까지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끝없는 욕망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욕망이라는 열차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달성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돈이 높아질 때 진리는 모습을 감춘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계약인생을 사는 자'였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약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형인 에서와 계약했고 라반의 딸과 재산을 뺏기 위해 외삼촌인 라반과도 계약했습니다. 보통 핏줄로 맺어진 형제나 친척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약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 정상임에도 야곱은 자연스럽게 계약을 맺었습니다. 마치 요즘 사람들의 삶과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부인 리브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결혼했는데 야곱은 장가 한번 가기 위해 7년과 7년 도합 14년을 계약하여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참으로 철두철미하게 자기의 인생을 긁어먹는 무서운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이 누구입니까? '타락한 인간성의 정체'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야곱을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렁이를 한번 보십시오. 30센티도 똑바로 가지 못하는 것이 지렁이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자랑하나 제대로 가는 길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지렁이는 머리가 꼬리인지 꼬리가 머리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렁이의 한쪽을 잡아서 쭉 짜보세요. 속에 들은 것이 별로 없어 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속알머리가 없는 인간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바로 지렁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야곱이 변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첫째, 그는 홀로 남았을 때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22절에서 24절까지 한번 보십시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얍복강 건너편에서는 에서가 옛날의 원한을 갚으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쉽사리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처자들만 미리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홀로 남아 야곱이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는 쓸쓸하게 별이 총총한 밤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비참한 인생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사기꾼, 도둑놈'이라는 자기 이름 속에 숨겨졌던 참된 자아를 연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빈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일생 소유욕에 시달렸지만 항상 빈손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형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았지만 먼저 태어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팥죽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샀지만 형이라고 불리웠습니까? 바로 그 순간에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목표한 여자를 얻기 위해 7년 머슴을 살았지만 장가를 똑바로 갔습니까? 또 칠 년을 머슴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재산을 모았지만 편안했습니까? 라반이 뒤쫓아오니 허겁지겁 도망가는데 바빴습니다. 그리고 결국 얍복강 나루터에서 모두 보내고 혼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100점을 맞은 것 같지만 열매는 하나도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나루터에서 빈손으로 홀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빈손이 때로는 얼마나 유익합니까? 하늘을 쳐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빈손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인간성에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참으로 필요한 시간입니다. 고독을 알 때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애정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를 알게 되듯이 인간이 빈손이 될 때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인간성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홀로 있을 때 모든 위선을 버리고 솔직한 자기 모습을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이 무엇입니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체 하다가 형식으로 발전된 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할 때 위선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홀로 있는 시간은 위선의 때를 벗기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모든 가면 쓴 배우들이 퇴장하고 얍복강 나루터라는 무대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빈손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서야 야곱이 변화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빈손임을 발견하는 순간은 참으로 고통스런 순간이지만 모든 사람은 이 순간을 통과해야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야곱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생사를 건 기도를 할 때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24절에서 26절까지를 보십시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잊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여기에서 '야곱이 씨름했다'는 말은 '야곱이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야곱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야곱은 생사를 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씨름이란 원래 무승부가 없는 운동입니다. 야곱은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기도에 임했습니다. 그 각오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나님도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도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었으며 하나님께서 '나로 가게 하라'고 사정을 해도 야곱은 '저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생사를 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강원도 황지에 '예수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중국 선교사의 아들이던 아쳐 토리 목사님 이 세운 일종의 기도원입니다. 저는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특별한 기도제목이 생기면 가끔 그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예배실 중앙에 이러한 글씨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기도는 노동이다.' 기도가 사생 결단의 기도가 될 때 그 기도는 노동 이상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기도를 두 시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설교를 두 시간 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는 뜨거워야 합니다. 간절해야 합니다. 쏟아 붓는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불붙지 않는 기도, 습관적인 기도, 형식적인 기도, 증언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돌아설 때 붙들 수가 없는 기도입니다.

어떤 목사님과 장로님과 집사님이 여름에 심방을 하던 때였습니다. 심방하다가 너무 더워서 목사님이 '아이스케키를 먹고 가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근처 구멍가게에서 아이스케키를 사서 하나씩 들고 그 중의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기도해 주세요.' 그러자 노인 장로님이 기도하는데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훑는 것이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아담이 죄짓고... 그 죄를 이어 받아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노아의 홍수 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셔서... ' 이렇게 죽 요한 계시록까지 설명한 후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이 무한하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이 얼음과자 아이스케키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하고 30분 이상 기도를 드리고 눈을 뜨니 아이스케키가 다 녹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 왈 '막대기만 남았군요, 장로님' 하니까 옆에 있던 집사님이 투덜거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아이스케키 노아 홍수 때 다 떠내려갔어요.'

기도는 길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짧더라도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미사 여구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투박하더라도 정성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뜨
거운 열정과 정성이 있는 기도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격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야곱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될 때 야곱은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27절과 28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하나님이 야 곱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은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기꾼'이란 뜻을 가진 야곱이란 이름 대신에 '하나님을 이긴 자'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새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야곱이라는 낡은 이름 속에 숨어있던 자아를 발굴하고 낡은 그의 삶을 청산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야곱과 동일하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나라의 별'이란 뜻을 가진 한규라는 이름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자'란 뜻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입니다. 여러분들에도 이와 비슷한 좋은 이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961년

5.16 혁명 후 이틀 뒤에 서울에서 깡패와 거지 1,500명을 붙잡아 강원도 탄광으로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의 이름을 조사했는데 한 거지의 이름이 '김백억'이었습니다. 그때 취조하던 경관이 그 거지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야, 너는 금이 백억이나 되는데 왜 거지생활을 해.' 이 김백억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새로 받았습니다. 야곱이 새 이름을 받고 그 이름에 합당한 새 생활을 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새로 받았으면 우리의 삶도 새롭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야곱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하나님과 대면하여 그 은혜로 야곱이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께 야곱에게 나타났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은혜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주신 것 그것도 은혜입니다.

사기꾼인 야곱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울리지 않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변화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야곱과 비교되지는 않겠으나 10%나 20% 정도는 야곱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품까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라면 얍복강 나루터까지 끌고 가서 환도뼈를 부러뜨려서라도 하나님은 그 자녀를 변화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점잖게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 야곱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정신 차리라고 흔드십니다. 실패를 당하기도 하고 낙심되는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자녀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다거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깨달으라고 흔드십니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도 야곱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아프게 때리십니다. 확실하게 깨달으라고 큰 환난이 엄습해 옵니다. 치명적인 질병이나 치명적인 실패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도 야곱의 성품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은 자녀를 지옥에 보낼 수도 없고 세상에 있어 보았자 자녀도 망신이요 하나님 아버지도 망신이니까 고린도전서 11장 30절에 나타난 대로 하늘나라로 데려가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셨던 대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끝까지 변화시키고자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도가 미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사생자 즉 버린 자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생자는 그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자녀들을 변화시키고자 치리의 손길을 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50% 정도까지 주님의 성품을 닮았다면 하루 빨리 나머지 50%를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끝까지 우리를 채근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야곱은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변화된 야곱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그는 순진해지고 단순해 졌습니다. 나중에 보면 야곱은 요셉의 죽음에 관한 아들의 거짓말을 그냥 믿어 버립니다. 옛날 같았으면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을 터인데 그러한 성품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영성이 맑아졌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세상 것에는 어리석어지지만 영적인 사업에는 영리해지는 것입니다. 본래 선한 성품을 소유한 자보다 변하여 선한 성품을 소유한 자가 훨씬 영성이 맑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육신적으로는 힘없는 자가 되었는데 하나님 안에서는 권세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져 힘없는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나중에 애굽의 바로왕을 축복하는 권세 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변화 받기 전의 야곱은 축복 받는 것에 매달렸지만 변화된 이스라엘은 축복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뒤편으로 물러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애굽에서 17 년을 살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야곱 같았으면 총리 대신이 된 아들 요셉의 권세를 이용하여 수많은 이권에 개입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은혜에 민감해지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야심이 있다면 그 야심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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