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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진정한 성도입니까? (레 0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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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일`과 `팔일`의 의미
본문은 우선 레위기 8장이 제사장 위임식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합니다. 레위기 8장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의 위임식을 행하는 내용이고 9장은 위임식을 끝내고 첫 임무 수행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 임무 수행의 첫날을 `제 팔일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팔일`이라는 것은 일곱째 날에서 하루를 더한 날입니다. 일주일이 칠일이고 보면 팔일은 새로운 첫날이라는 점에서 어떤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팔일에 관한 모든 기록을 모아서 오늘날 주일을 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팔일 째 행해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소나 양의 첫 새끼를 팔일 째 하나님께 드렸던 출애굽기의 사건, 본문처럼 제사장의 직무가 시작된 날의 경우, 할례를 팔일 만에 행했던 내용 등을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둥병자와 유출병 환자가 정결케 되기 위한 예물을 병이 낳은 후 팔일 째 드렸던 레위기의 사건도 있고, 초막절 팔일 째 되던 날 거룩한 모임을 가지고 예물을 드렸던 레위기와 민수기 사건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실인이 더럽혀진 후에 다시 정결케 되기 위해 팔일 째 예물을 드렸던 민수기의 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오늘날의 주일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그러면 9장에서 말하는 `팔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뒤의 문맥을 통해 살펴봅시다. 팔일은 글자 그대로 칠일 다음에 오는 날입니다. 제사장이 팔일에 첫 업무 수행을 하기 위해 그들은 칠일 동안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칠일간이 있었기 때문에 팔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칠일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는 짧지만 얼마나 긴장되고 중요한 시간인지 8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하나니 위임식이 마치는 날까지 칠일 동안은 회막문을 나가지 말라 오늘날 행한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속하게 하시려고 명하신 것이니 너희는 칠주야를 회막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레 8:33-35).

여기에 위임식을 행하는 칠일 동안의 과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위임식을 마치는 동안 회막문을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별된 생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하나님의 계획의 기간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것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행할 것은 행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하라.` 바로 이것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칠일간의 통과 그리고 새로운 첫날

너희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구요? 뒤에 보니까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의 위임식은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사망을 면해 주겠다. 너희를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칠일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까지의 기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칠일은 생사의 문제가 달린 기간입니다. 그 시간이 짧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숨가쁜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팔일은 긴장되고 어려운 그날들을 거친 첫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새로운 첫날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대제사장에 대한 설명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곧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칠일 동안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모든 성도들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칠일에서 팔일로 넘어가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망의 그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칠일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칠일을 넘기지 않고 팔일을 넘긴다는 것은 논리상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죽음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과정을 거친 사람만이 생명의 의미를 압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절감한 자만이 의롭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과연 이 칠일을 넘기고 팔일을 맞이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문제를 아는 자만이 생명의 귀함을 알 듯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 속에서 감격과 기쁨을 찾고 `아! 내가 새롭게 태어난 인생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칠일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의 종교적인 모양과 색채만 갖고 있을 뿐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기쁨과 소망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죄에서 구원으로 옮겨진 사건이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칠일을 넘기고 팔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팔일을 맞이했다는 것은 성도가 칠일의 과정을 거치고,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거룩하고 흠없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제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
그에 해당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레위기에서 말하는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제 팔일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 이스라엘 장로들이 나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또 백성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너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과정에 요구되는 사람은 아론뿐만 아니라 그 아들, 이스라엘 장로들도 포함되며 백성들도 포함됩니다. 18절을 보시면 '또 백성을 위하는'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이 그 위임식에 참여했습니다. 8장 3-4절을 다시 보십시오.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으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들이 그 회막문 안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행사에 동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니까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론에게도 말씀하시고 백성들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아론에게는 '이렇게 제사를 드려라'고 하십니다. 2절에서 '아론에게 이르되 흠없는 송아지를 속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흠없는 수양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여 여호와 앞에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아론에게 제사를 요구하시는데 그 예물은 흠없는 송아지와 흠없는 수양입니다. 그리고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드립니까? '여호와 앞에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3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아론의 제사와 좀 다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소를 소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또 송아지와 어린양의 일 년되고 흠없는 것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고'(3절).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수양을 취하고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4절)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예물은 수염소, 일 년되고 흠없는 송아지입니다. 또 어린양 수소와 수양과 기름 섞은 소제물입니다.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 화목제, 소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론에게는 여호와 앞에 드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져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아론의 제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함께 보는 것은 같았습니다. 23절을 보세요.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매.'

제사의 진정한 의미는 `순종`
제사와 예물은 다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같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물과 제사의 종류, 기능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준은 `순종`입니다.(4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세요. '모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명하신 것`이란 말을 강조합니다. 7절에도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명대로 하라`는 말이 강조됩니다. 10절에도 '그 속죄제의 희생과 기름과 콩팥과 간꺼풀을 단 위에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고'라고 되어 있고, 21절에도 '가슴들과 우편 뒷다리를 그가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드니 모세의 명한 것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명했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사보다도 이 `명한 것`이 오히려 제사의 진정한 의미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제사 그 자체보다도 순종입니다. 제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매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물과 제사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라는 순종의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도란 제사와 제물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제사가 지배하는 신앙에서 탈피하자
오늘날의 관심은 순종보다 제사와 제물에 있습니다. 교인이라면 어떤 제사를 드렸느냐, 어떤 봉사를 했느냐, 어떤 헌신을 했느냐, 어떤 활동을 했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내가 무엇을 했다고 주장했을 때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꾸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했습니다(마 7:23). 본문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종을 보여주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모세의 명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온 회중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선지라'(5절)고 했는데, 여기서 `모든`과 `온`이라는 말을 주시하십시오.

다시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7절)라고 했는데 반응을 보니 실제로 단에 나아갔습니다(8절). 여기서 우리는 행동의 완료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7절)라고 했는데 8절에 아론이 순종하는 말이 나옵니다. 7절이 명령이라면 8절은 그 명령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또 7절에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15절에 보니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라고 했습니다. 역시 명령에 순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7절에 보면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해서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는 명령에 대해 21절에서 순종하는 것이 나옵니다.

7절과 8절, 15절과 21절의 모든 내용이 결국은 명령과 순종에 대한 것입니다. 이 `순종`이야말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삼상 15:22). 그러나 우리는 제사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큰 교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큰 교회는 자꾸 더 커갑니다. 왜 커지는지 아십니까? 편하거든요, 예배가 50분이면 끝납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지요. 살짝 갔다가 살짝 오면 됩니다. 남들이 모르게 예배 드리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안 드리면 왠지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고 신앙인으로서 찜찜하니까 예배는 드리는데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싫어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예배를 드린다는 그 사실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순종보다는 제사가 우리의 신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늘나라가 보장된다고 생각하니 문제입니다. 종교의 모양만으로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성도`는 `칠일간의 과정`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순종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순종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본문 8절에서 15절까지는 아론을 위하여 드리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라고 했습니다. 바로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모든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린 겁니다.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였습니다. 속죄제는 자기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제사이고 번제는 헌신을 의미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흠없음과 거룩함을 살피는 제사를 먼저 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제사를 드립니다. 15절을 보면 자기 자신을 살피는 제사를 먼저 드린 다음에 백성을 위한 예물을 드립니다. 백성에 대한 제사를 먼저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핀 후 백성을 위한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성경에 보면 어떤 단계가 진척될 때마다 `그때`라는 말이 나와있지 않은데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그것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 15절을 보면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NASB에는 `Then'이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살핀 후에 그때에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려지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지도자들한테 해당되는 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는 자신을 먼저 살피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한 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제사를 드린 후에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22절). 우리 개역 성경에는 여기서도 'Then'이란 말이 없지만 NASB나 NIV성경에는 `Then`이란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때에` 혹은 `그 다음에`손을 들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드린 제사와 백성을 위해서 드린 제사 이후에, 비로소 손을 들어 백성들을 축복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24절에 보면 '불이 여호와 앞에 나아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 NASB에서 보면 'Then`이란 말이 역시 있습니다. 'Then fire came out from before the Load' `그때에`. 다시 말하면 손을 들고 축복하고 난 후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 것입니다. 그때에 불이 나왔다는 것은 23절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것에 대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 순종은 제사와 제물보다도 먼저 자기를 살피고 백성을 살피는 직무 수행을 통해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명령과 순종의 조화가 이루어진데 대한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때는 백성들의 순종이 완료된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인간 관계에서 항상 먼저 자신을 살피라는 말입니다.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라는 것이지요. 나를 본 다음에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이렇게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또`가 아닌 `단번에`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순종의 제사를 어떻게 드릴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7장 27절을 보면 레위기처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사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제사가 단번에 끝나지 않고 드리고 또 드립니다. 레위기 9장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또`라는 단어입니다. '또 화목제를 위하여'(4절),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7절), '아론이 또 번제 희생을 잡으매'(12절), 그들이 또 번제의 희생'(13절), '또 내장과 정갱이는 씻어서'(14절),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15절), '또 번제의 희생을 드리되'(16절), '또 소제를 드리되'(17절), '또 백성을 위하는'(18절), '그들이 또'(19절). 레위기 9장에는 `또`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 당시에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꾸만 제사를 드려서 속죄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7장27절을 보십시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누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르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단번에`란 표현이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절).

그리스도께서 `또` 하신 것이 아니라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10절에도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그 모든 속죄 사건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단번의 제사로 인해 레위기 때처럼 반복적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고 감격이 있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성도입니까?
이야기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진정한 성도란 칠일간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로 생사의 문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속죄를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항상 새롭게 된 사람으로서의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거칠고 힘들지만 세속적 가치관을 갖고 살지 말고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갖고 살면 고난 속에서도 생명으로 옮겨진 하늘의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팔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칠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전히 종교적인 모양과 형체는 갖고 있을지라도 구원의 기쁨과 감동이 없습니다. 종교인일 뿐이지 진정한 성도는 아닙니다. 이런 뜻에서 진정한 성도는 칠일을 반드시 거쳐서 팔일을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칠일을 경험한 사람이고 우리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그분에게 절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 하면 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포기하라면 포기해야 하고 그것을 당당히 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계획으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설사 세상적으로 의로운 태도고 선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이는 의로운 태도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을 잘 따르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순종보다는 제사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모든 일이 아름답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살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죽음을 면한 사람들입니다. 높아질 것도, 내세울 것도, 할 말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최하(最下)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성도로 만들어 주셨으므로 우리가 가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보일 게 뭐 있고, 자랑할 게 뭐 있으며, 내세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보면 누구인지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을 어떻게 경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일을 생각할 때 나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를 보고 남을 본다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분명 그 속에서 누리는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임세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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