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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사 (레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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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법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기 전에 전체적인 관점에서 먼저 접근해 가도록 하겠다. 제사법을 공부하는 방법 문제인데 제사법 전체를 비교하여 먼저 공통된 점에서 제사의 의미가 어떠한가 해석을 하고 그 후에 각각의 제사를 비교하여 그 차이점들에서 각각의 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강론하도록 하겠다. 왜 이렇게 해야 되냐면 다른데는 그냥 역사적인 이야기를 쭉 하다가도 레위기를 들어오면 소위 그냥 영해를 한다. 왜냐하면 레위기에 속죄제물 화목제물 그런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했고 이런 개념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레위기만 나오면 그냥 예수님한테 연결 시킬려고 바쁘다. 그래서 그렇게 해석 하면 안되고 일단은 그 문장을 문법적으로 보고 또 모세 시대 당시에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인가를 해석하고 그 후에 예수 안에서 완성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해석해야 되지 그 당시 의미를 빼버리고 막 예수께로 영해를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레위기가 제일 영해하기 쉽다. 그것을 막는 방법은 무엇이냐? 조목 조목 읽어 가면서 연결할려고 하지 말고 전체적인 구조에서 이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틀안에서 본문들을 비교하면 (개별 제사들) 그런 이상한 해석으로 나갈 위험이 없다. 항상 모든 문제의 해결을 그렇게 해야한다. 이것은 성경 해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사고력에 있어서도 큰 것을 먼저 보고 중심되는 것을 먼저보고 그 빛에 비추어서 지엽적인 문제들을 보고 그래야 되는 것이다.

가령 누가 자기 어머니 욕을 하면 그 어머니가 누군가 하는 큰 가운데서 그 말을 들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 욕을 하면 별미처럼 뱃속 깊이 들어와 버린다. 왜냐하면 어머니라는 개념 없이 어떤 사람 이야기만 들으니까 쏙 들어와 버리는 것이다.
항상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해석을 해야한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도 그런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이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그 다음에 작은 문제들을 보아야 하는데 일단 밥 먹고 사는 것을 현금이고 천당을 뒤에 갈일이고 작은 것부터 보아가지고 큰것을 잃는다. 그렇게 보면 안된다 그 말이다. 매사를 항상 그렇게 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작은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전체를 보는 관점에서 지혜를 가지고 움직일 수가 있다. 작은데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전체를 알지 못하면 바른 지식이 못된다. 그러니까 항상 그런 안목을 가져야 한다.

제사의 의미는 이제 전체를 읽으면서 이것이 무엇인지 공통된 것을 먼저 뽑을 려는 것인데 그러면 제사는 어떤 의미인가? 제사법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풀게하고 그 앞에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이런 구원론적인 의미가 아니고 소위 구원론적이지요. 이전에는 항상 이렇게 풀었다. 하나님은 항상 진노하시고 어떻게 그 진노를 부드럽게 하고 하나님으로 웃게 하고 우리가 나갈 것인가. 그런 식으로 거의 구원론이 개진되고 레위기의 제사법도 그런 식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달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들어오도록 부르시는 방법이지 하나님을 달래고 들어가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회막에 임하시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한 장막에 거하신 여호와께서 회막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신다는 그런 의미로 회막이다. 대표자들을 만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의 식탁으로 부르시어 그들의 봉사를 받으시며 함께 먹는 것이다. 이것이 제사법의 본질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식탁에 향기로운 예물을 드리며 그 식탁에서 먹는 백성으로 구원된것이다. 이것은 딱 선을 정해놓고 이 기준에 맞는 사람 들어와 한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중에 함께 만나시는 회막을 짓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까지도 못들어가는 그런 영광인데도 하나님이 모세야 너희들이 나에게 예물을 드리려거든 이렇게 드려라 그런 것이다 그 말이다.

그러면 제사는 어떻게 구분 되냐면 다섯 종류가 있다. 그런데 번제 소제 화목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해서 드리는 여호와의 식물이고 속죄제 속건제는 죄를 속하기 우해서 드리는 것이 강조점이다. 이것도 향기롭게 냄새는 되는데 향내를 위해서 드린 것은 아니다. 이제 본문들을 읽어보면 이 말들의 의미를 알것이다.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도 죄를 속함으로 여호와께 식물을 드리며 여호와의 상에서 먹는 제사다. 진노만 푸는 것이 아니라 속죄제도 제사장이 먹는다. 속죄제의 기름도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된다. 그러나 향내를 위해서 드린 것은 아니다. 가령 다른 소제 같으면 소제에다가 향을 놓아서 드리지만 속죄를 위해서 드린 소제는 거기다 향을 놓지 않는다. 그런 차이점이지 하나님의 단에 태워 드린다는 의미로는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된다. 그러나 그 목적이 소제나 번제나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식물이고 속죄제나 속건제는 그 향기를 위한 것이 강조가 아니라 죄를 속한 것이 강조인데 그것도 드려지면 하나님 단에 화목제물의 기름을 사르는 것처럼 사르면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되고 그리고 그것을 드리는 제사장이 먹는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는 친교다. 이는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하는 자라도 여호와의 상에 식물을 드리며 그 앞에서 먹는 친교가 끊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속죄제 속건제 하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품 거기다가 강조를 두는데 이것은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부지중에 범죄했는가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 앞에 나와라. 부지중에 죄를 지은 자 까지라도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고 그 앞에서 먹는 교제로부터 끊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속죄제와 속건제의 강조점이다. 만일에 그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가령 안식일날 일을 한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거나 또는 사인을 한다거나 간음을 한다거나 그러면 그들은 죽지 그들을 속하는 제사가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법으로 해석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는가 이것으로 보니까 해석이 잘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살인자도 예수 믿으면 들어오거든요. 살인죄를 감옥에 있다가 예수 믿고 들어온 자들도 많지요. 그런데 구약에 보니까 언약 백성이 되었다가도 살인하면 그는 죽여서 하나님의 언약 공통체로부터 제거 시켜버려야 되었다. 가령 장가 많이 간 사람과 바람 피운 사람도 예수 믿고 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구약을 보면 간음하면 그는 죽여야 된다. 용서하는 방법이 없고 죽여야 된다. 그러면 우리하고 차이가 대단하다. 우리는 그런 죄인도 오라고 부르는데 왜 그 사람들은 죽는고 오히려 그 사람들보더 훨씬 더 높은 수준에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언약 백성이라는 근본 관계를 빼버리고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젤려고 하니까 불공평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니까 그들중에 계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들 또 생명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해방하는 죄들은 그 생명으로부터 끊어진다. 그러면 우리들은 왜 이런 형편없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가? 구원론적으로 해석을 하는것이 아니라 그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 삼으시고 그런 질서안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이 그런 방식의 언약 체결이 아니라 이제는 천하만민을 하나님 앞으로 부르는 언약 체결이다. 그전에는 휘장밖에 제사장을 두는 언약 체결이었는데 이제는 휘장을 제거하는 언약 체결이다. 그러니까 간격이 없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직접 부른 것이다. 그들은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회개한것이지 우는 것 보고 나를 따라 오너라 부른적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선택한 것처럼 죄인들을 직접 초대한 것이다. 그 초대에 응함으로 그 구원이 그 집에 임한 것이다. 예수의 구원이 예수를 영접해서 함께 유하고 먹고 마셨으니까 그러니까 구약에서 살인죄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부터 죽여라 했는데 그런 죄인들이 믿고 용서를 받는가 하는 문제가 그런 차이점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상 언약이라는 토대를 두고 풀어야 되지 절대적인 도덕적 개념으로 풀어서는 풀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부지중에 죄를 지은잘들을 그런 죄인이라도 내 앞에 나오데에 장애 될것이 있느냐 이렇게 이렇게 하고 들어오라 해서 그들이 부지중에 지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데 절대로 장애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속죄제 속건제다.
일단을 그 문맥에서 풀어야 된다. 이것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는 그 다음에 풀 일이지 그 문맥을 빼버리고 막 적용해버리면 안된다.

그러면 제사법에 대해서 구분하면 향내나는 제사와 향내 안나는 제사 속죄를 위해서 드린 제사가 있다. 향내하는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고 속제를 위해서 드린 제사를 속죄제와 속건제다. 그런데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들이 부지중이 범죄 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데 장애되지 않도록 허락하신 제물이지 하나님이 진노를 유하시키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제사법에 대한 전체적인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제사는 제사의 예물 곧 그 제단에서 제사법을 통해서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제사의 예물 곧 여호와께 향기로운 식물을 드리는 방법과 하나님과 드리는 제사장의 제물의 몫을 규정한 두 단계로 기록이 되어있다. 제사법법은 1-7장까지 1-5장까지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법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예물로 드리는가 그것이 하나님앞에 향내가 되리라 그것이 항상 끝나는 말들이다. 그것이 첫 단계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먹는 순서다. 그 먹는 것은 하나님도 잡수신다. 기름은 내것이라. 아무도 먹지 말아라. 그리고 가슴과 뒷 다리는 제사장이 먹어라. 이런 이야기다. 음식 나누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다. 그래서 1-5장까지는 하나님 앞에 향내로 드리는 법이고 그리고 6-7장은 그 제물을 하나님 몫 제사장의 몫 화목제물을 임자의 몫도 있다. 그 제물의 몫을 나누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 두 단계로 되어있다. 그 다음에 이 순서가 어떻게 되어있냐면 여호와께 향기로운 식물을 드리는 5대 제사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런 순서로 되어있다. 그런데 제사의 예물을 먹는 몫 그 누구 몫인가를 나누는 데서는 어떻게 되어있냐면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그런 순서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면 제물의 몫을 나누는 것도 이 앞에대로 하자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그렇게 해야 앞에 순서하고 맞겠지요. 그런데 제물을 나누는 것은 그렇게 되어있지를 않고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제일 뒤에다가 화목제를 배열해 났다.

그러면 이런 것은 읽어보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을 해바야 되겠지요.그러면 처음에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을 드리는 것은 향내하는 순서로 되어있다. 제일 향내나는 것부터 순서대로 되어있다. 그래서 전체를 태워 드리는 것이 완전한 향내겠지요. 그 다음 소제는 한 움큼 태워드리는데 향내난다. 지극히 거룩하게 되고 그 다음 화목제는 전체를 다 태워드리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에 향기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목제물을 나누는데 더 강조가 있다. 그러니까 그 다음 화목제고 그 다음에 속죄제나 속건제도 여전히 향내가 되지만 향내를 위해서 드리는 것은 아니라 뒤에 배열 되어있는데 여러분이 읽어보면 속건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가 강조가 아니라 배상한데가 강조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태워드려야 향내가 될것인데 5장까지는 태운다는 말이 안나온다. 오히려 제물 나누는 몫에 들어가서 속건제를 태워 드린다고 나와있지 제사 드리는 법에는 속건제는 태워드리도록 된것이 아니라 배상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러니까 제일 뒤에다 배열을 해놨다. 그리고 나누는 몫은 번제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돌아온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드리는 제사장이 가죽은 가진다. 그런데 전부를 태워 드리니까 하나님 몫만 있지 다른 사람의 몫은 없다. 그런데 소제는 한 움큰 태워드리면 나머지는 제사장의 음식으로 지극히 거룩한 음식이 된다. 그 다음 화목제는 제일 많이 나눠준다. 제일 뒤에다가 배열을 했다. 그 다음 속죄제는 그것을 드리는 제사장이 먹는다. 속건제도 그렇다. 속건제는 배상이 강조니까 먹는데는 강조가 되어있지를 않는다. 제일 많이 강조가 되어있는 것은 화목제다. 화목제는 이틀까지 먹는다. 임자도 먹고 그러니까 나누는 것이 제일 많은 것이 화목제다. 그런 순서로 배열이 되어있다. 이런 문장의 구조를 모르고 그냥 제사법만 법적으로 알아서 번제는 이렇게 드리고 몫은 얼마 소제 이렇게 드리고 몫은 얼마 이런 사전을 찾아 보는 식으로 하면 굉장히 쉽고 명쾌한 것 같아도 성경은 그런 제사법을 그런 법규로 둘려는 것이 아니라 제사법을 하나님과 관계로 주고 있다. 그것이 근본 개념이다. 그러니까 그 제사법을 배열하는 순서도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본문들을 자꾸 비교하면서 읽어봐야 되지 제사지내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알려고 해서는 그것을 기록하는 그 흐름과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러니까 첫째 5대제사는 하나님 앞에 향내다. 그리고 이것이 나누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 몫은 하나님 몫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임자 몫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예물을 하나님의 상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자 하는 것이 이 제사법의 핵심이다.

제사드리는 순서는 어떻게 되느냐? 지금 공통점들만 보는 것이다. 이 공통점에 차이가 주어지면 그 차이점들이 그 제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공통점들을 보는 것이다. 먼저 제사드리는 순서는 임자가 하는 일은 잡는 일이다. 잡아서 물로 씻는 일까지가 임자가 하는 일이다. 제사장은 단에다 피를 뿌리고 불태워 드리는 일이다. 그런데 제일 처음에 하는 일은 제물에 안수하는 일이다. 안수한다는 말은 1:4절에서 설명하기를 그를 속죄가 되리라 이렇게 설명을 해놨다. 그리고 다른데는 한군데도 설명을 안한다. 그러면 번제는 속죄란 문제는 실은 나올 때도 아니거든요. 향기로운 냄새가 되리라가 강조인데 여기서 그를 속죄가 되라라 그 말이 있고 나머지 문제에서는 안수하는 문제는 전혀 언급이 안된다. 제일 처음에 언급이 되어있다. 그러면 어떤 의미로 속죄가 되는가? 안수는 제물과 임자를 일치시키는 행동이다. 그런데 모든 제물을 항상 죽여서 드려지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속죄가 되는 것은 그 임자를 대신해서 드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안수함은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전에는 이 안수를 죄의 전가로 해석을 했다. 내 죄는 안수해서 양에게로 옮겨가고 또 양의 공로는 안수를 통해서 내게로 옮겨오고 왜냐하면 법정적인 개념으로 구원을 설명 했거든요. 내 죄는 예수께 옮겨가서 예수의 죽으심에서 처리되고 예수의 부활의 공로는 내게 전가 되어서 내것으로 계산되고 이런 신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안수하는 것도 그렇게 해석을 한것이다. 그런데 이 문맥을 빼버리고 신학적으로 읽으니까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맥은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예물을 드리는 것이 그를 위한 속죄가 되는 것은 그를 대신하여 죽여서 드려지기 때문이다. 안수함은 연합함이다. 그렇게 해서 이 예물이 드려지는 곳에 임자의 생명이 드려지는 것하고 같다. 그래서 속죄가 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 다음에 각을 뜨고 내장과 정갱이를 깨끗이 씻는다. 제사지낼 준비를 다 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전에는 어떻게 해석을 했냐면? 각을 뜨는 것 내장과 정갱이를 씻는것 씻는 것은 성령으로 씻음 각을 뜨고 여기 저기 찔러보고 씻고 창자까지 씻고 이제 성령이 내속을 전부 정결케 한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그것은 지금 직접 여기서 연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흠 없는 제물을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완전히 씻어서 드린다. 거기는 어떤 오염물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조점이지 이것이 직접 성령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다음 제사장이 하는 일은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린다. 뿌릴 때는 휘장 앞에서 뿌린다. 단 사면에 뿌리고 제물을 단에서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로 드린다. 예물을 하나님 앞에 향내로 드리는 것은 제사장이 아직 임자는 아니다. 임자가 하는 일은 안수하고 죽여서 씻는 것밖에는 없다.

그 다음에 제물의 공통성은 흠이 없는 것이다. 동물성은 그리고 식물성은 기름 섞은 고운 가루다. 그것이 모든 제물의 공통성이다. 흠이 없는 것은 예수의 무죄성 하는데 여기서는 직접 도덕적인 문제로 봐서는 안되고 오히려 윤리적인 문제는 신약 시대에 드디어 강조할 수 있는 것이고 구약 때는 더 종교적인 예식적인 그런 것이 더 앞면에 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흠이 없는 것은 생명의 상함이 없다. 신체에 흠이 없다. 생명이 완전하다. 왜냐하면 레위기에서는 먹는 것을 가지고 정의한다. 자기 백성이 먹을 수 있는것 그런 것은 흠이 없다고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먹지 못하도록 한것만 먹지 못하지 먹을 수 있는 것은 흠이 있던지 비루먹었던지 다 먹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스스로 죽어버리면 먹지 못한다. 왜냐하면 비루먹은 것보다 더 큰 사망의 권세가 있으니까 부정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인한테는 팔면 그들은 먹을 수가 있었다. 왜 그들은 본래 하나님과 관계에서 죽은자처럼 언약 밖에 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면 그는 부정한자로 죽은자 처럼 진 밖으로 &51922;겨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 하나님 앞에 흠없는 것으로 드리는 것도 생명의 완성 완전한 생명 흠이 없는 완전한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도덕적인 무흠을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도덕적인 무흠 문제는 드디어 예수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것이고 이 관계적인 생명으로부터 드디어 나타난 것이지 이 자체가 도덕적인 무흠으로 바로 해석될 조항은 아니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동물성은 흠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의 상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식물성은 고운 가루인데 거기다가 기름을 섞어야 된다. 고운 가루이니까 최고 식품이 되겠지요? 꺼칠 꺼칠한 개떡 같은 것 아니고 아주 좋은 양식이다.
그러니까 식물성도 최고의 식품인데 완전히 기름 반죽을 해버렸다. 익혀서 안드릴 때도 기름을 섞어서 드려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명의 풍성함 기름은 하나님 몫이다. 그렇게 해서 생명의 풍성함 그런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상에는 일반 백성이 성소 밖에서 먹는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고 풍성한 생명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까지라도 그냥은 못 들어가고 죽여야 들어간다. 그러니까 휘장 밖에는 여전히 죽음의 영역이다.
드리는 장소는 회막 문 앞 번제단이다. 회막 문이라는 것은 교회 입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밖에 있는 것을 주로 회막문 앞 그렇게 말을 한다. 어느 때는 저 밖에 문을 말할 때도 있지만 주로 보면 여기 휘장으로 쳐져있는 여기 앞에 있는 마당을 회막문 앞 그렇게 해서 회막과 그 회막 문앞에 있는 것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 전에 향단은 어디하고 연결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증거궤와 연결을 시켜서 증거괴 앞 그렇게 되어있다. 밖에 있는데도 증거괴 앞이라고 되어있다. 향단은 증거괴와 연결을 시키는 것처럼 번제단은 성소와 연결되어있다. 그래서 성소의 회막문 앞 그것이 제사드리는 장소다.

안식일의 열 두덩어리 떡은 제사장이 회막안에서 먹지만 다른 모든 제사는 회막문 앞 번제단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 다음 숫컷으로 드리도록 되어있고 화목제물만 암컷도 드릴 수가 있다. 이것은 수컷을 대표적인 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 남자가 여자를 대표하지요. 그런 것처럼 수컷을 대표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암컷도 드리니까 여자 목사도 있고 그런 말 아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을 하나님 앞에 풍성히 드리고 풍성히 잔치하고 그런 것이다. 풍성히 드린데 있어서 암컷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 먹지 못할 것이 있는데 기름과 피는 먹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몫이다. 생명의 기름짐과 하나님께 드려진 생명이 백성에게는 아직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우리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고 한데서 그냥 알 수가 있다. 이제는 전체로 주어졌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먹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그 다음에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지 못할것이 있다. 누룩과 꿀을 아직 드리지 못한다. 누룩 썩은 떡은 초실절에 누룩 섞은 떡 두덩어리를 드린다. 이것은 누룩을 죄악의 누룩 직접 해석하면 안된다. 그것이 죄악을 표현할 때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직접적인 죄하고 관계된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생명과 관계된 일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식탁에 어떻게 향기로운 예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는가 그 문제지 윤리적인 죄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누룩을 죄로 표현하고 꿀을 정욕으로 표현하고 그렇게 해서 그냥 어떤 사람이 화토놀이를 해도 거기서 못 빠져 나오지요. 또 여자 잘못 알면 폭 빠져버리지요. 파리가 꿀 먹다가 붙어 죽어버리지요. 이제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빠지면 못나온다. 해 가지고 꿀을 먹지 말고 적당히 놀아야 되니까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야 되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여기서는 누룩이 죄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상에 드리는 문제다. 이것은 음식 문제다. 그러면 그전에 언제 그들이 누룩 섞은 떡을 먹었냐 하면 바로의 종으로 있었을 때 누룩 섞은 떡을 먹었다. 이제 여호와의 종으로 구별될 때부터는 무교병 누룩 없는 떡을 먹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한 식탁에서 잡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그 드리는 것은 아무리 완전한 생명 아무리 풍성한 생명을 드려도 죽여져서 드려지고 또 불태워져서 드려진 것처럼 아직 드리지 못할 것이있는데 꿀과 누룩은 못 드린다. 왜냐하면 꿀과 누룩을 하나님이 잡수시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는 것도 그들에게는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 구약 방식인데 하나님이 잡수시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이 옛 제도안에서는 참 안식과 참 즐거움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 예수님 식탁에서는 즐거움의 포도주 잔이 주어지지만 그전에는 오히려 쓴 나물이었다. 항상 처음 언약 백성의 문맥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아직 안식과 기쁨이 완성되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소제물에 빼지 못할 것이 있는데 꼭 있어야 될것이 있는데 유향과 소금이 있어야 한다. 향은 하나님이 기뻐 맡으시는 향을 대표하는 것이다. 소금은 향이 냄새로 향내가 나면 소금은 맛으로 향내가 나야 하겠지요. 왜 같이 놓아 지니까. 누루과 꿀을 같이 해석한 것처럼 유향과 소금을 같이 해석해야 할것이다.

특별히 유목민들에게 소금은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 옛날도 짠 것하나 있으면 밥 한 그릇 먹었다. 그리고 싱겁다는 말하고 맛없다는 말하고 똑 같다. 대개 심심하고 맛도 없다. 짜서 맛없다는 말은 없다. 맛은 있는데 짜다 그런다. 그런데 심심하다는 말은 대개 맛도 없다는 말하고 바로 통한다. 더구나 고기 같으면 소금 안치면 못 먹는다. 그래서 사냥꾼 읽기 같은데 보면 있다. 짐승 잡는 법은 전부 물있는데서 기다리든지 아니면 소금을 같다가 땅에다 묻어 놓고 기다리면 소금 먹으러 온다 그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고 중공 사람들이 인구 계산 한것도 소금 달아 보면 안다. 인구 숫자는 못 세고 소금 소비량을 보고 몇명이다 그렇게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금이 필수적인 요소다.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 음식 드리는 일이니까 유향을 빼지 못하고 드려야 한다. 왜 이것은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예물이거든. 그러니까 음식 자체가 향내가 나는데 거기다 유향까지 드리니까 최고의 향내나는 것이 소제물이다. 그런데 소금을 빼지 말아라 그러니까 소금은 유향과 같은 의미에서 해석을 해야 된다. 같은 가치로 그러니까 이것은 맛으로 해석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한다. 그렇게 친밀한 식탁 교제 참으로 향내하는 예물을 먹고 그렇게 맛있는 교제를 하고 그것이 언약의 소금을 빼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처음부터 구원은 하나님과 생명의 친교 지극히 향기롭고 맛있는 그런 생명의 친교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고 이런 친교에로 부르심이지 단순히 법적으로 너 죄 없다 석방 가서 벌어 먹든 말든 상관없고 무죄 석방 이런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의 상으로 부르심이다.

생것으로 드리는 법이 없다. 그런 것으로 보면 요새 채식하면 안되겠지요. 음식물 법으로 보면 하나님은 항상 익혀서 잡수시거든. 또 하나님은 기름은 또 자기 몫이라고 그러신다. 제일 건강에 나쁜 것을 그러니까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지만 구약을 요리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언약적으로 해석을 해야한다. 그리고 종교 제도적으로 해석을 해야되는 것이지 다른 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불로 태워드리면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된다. 그러니까 죽음을 통과하지요? 그리고 또 씻지요. 깨끗하게 하고 그리고 불로 태워드린다. 식물성 제물 같으면 고운 가루에다가 기름을 섞으고 기름 요리를 한다. 그리고 불에 태워드린다. 그러니까 기름 범벅이다. 그런 식으로 드린다.

그러면 이 불을 무엇인가?
이것은 음식물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이 흠향하시니까 이 그대로 정결케 하는 하나님이 항상 거기 계시어 백성의 예물을 받으시고 거기 계심을 말한다. 그래서 화제로 항상 드려진다. 불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되지 않는다. 제사장이 전부를 먹어도 한 주먹은 태워드려야 된다. 대표로 그러면 모든 것이 향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절대로 영해하면 안된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되지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를 발견해서는 안된다. 구약은 종교의식 하나님과 관계에서 의식법이지 윤리를 직접 포함하고 있지를 않는다. 윤리의 완성은 이 의식이 예수 안에서 참 실체로 왔을 때만 드디어 완전한 관계 아래서 완전한 윤리가 명령되고 주어진 것이고 구약 때는 휘장 밖에 있는 모세 제도가 윤리다.

그러니까 이것을 직접 윤리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윤리해석하면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라 밤새워 불을 지펴야 되겠지요. 새벽에 갑자가 나오면 안된다. 밤에 꺼져버리니까. 레위기를 보니까 밤새껏 꺼지지 않게 해라 그랬거든. 그러니까 철야기도 이런 이야기 또 만나는 했볕이 나면 스러져 버리거든 그러니까 아침 해 뜨고 나면 신령한 만나를 못 거둔다. 그러니까 아침 양식은 해 뜨기 전에 새벽기도지요.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레위기가 제일 심하고 부흥사들이 레위기 가지고 마음데로 해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완성 됐는가? 제사법은 회막에 계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자손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을 죽음과 불을 통하여 정결케 하시어 친히 흠향하시고 자기 백성의 대표자인 제사장을 성소의 양식으로 먹이신 것이다. 이것이 구약 제도의 의미다. 회막에 계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으로 주신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나님은 한 식탁에서 잡수기를 원하신다. 그들에게 주신 양식중에 최고품을 가지고 나오라고 그러셨다. 그런데도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들어와야 되고 정결케 하는 불을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앞에 흠향하시는 기쁨의 식물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은 자기 제사장에게 주어서 성소의 양식으로 먹도록 한다. 성소 밖에서 먹으면 안된다. 아직은 성소 밖에서는 먹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레위기다.

이 생명의 은혜의 동거와 식탁의 교제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썩어짐이 없는 하늘에 온전한 질서로 교회에서 완성하셨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상에서 그의 살과 피를 먹는 교제의 생명으로 살고 &47912;으로 산제사를 드린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이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죽음을 통과해야 할 생명이 아니다. 왜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는 끝났고 그가 주신 것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교제의 양식이 신약 백성에게 하신 전교제의 삶이다. 그것은 성소안과 성소밖의 구별이 없다. 그것은 대표자인 제사장과 일반 백성의 간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성소의 교제로 완성이 됐으니까. 그러니까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의 상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의 교제에 참여한다. 그것으로 전 삶의 질서에서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구약 성소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삶의 교제의 질서를 레위기에 준 것처럼 그리스도완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으로 우리의 전 삶의 영역을 성별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봉사를 기뻐 흠향하신다.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이다.

이것이 레위기 전체 5대 제사에 대한 개념이다. 이것을 이제 번제에서는 어디에다가 강조를 두고 있는지 그렇게 해서 번제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지 그런 비교된 차이점들을 통해서 이제 5대 제사의 의미를 강론해야 할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눈 감고 기도해서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겠요? 눈 뜨고 읽으라고 책을 주었는데 눈 감고 책은 안 읽고 있으면 안된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 예수가 보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되고 눈을 뜨고 여러번 읽어야 된다. 이것은 구약 백성에게 이런 제사법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림 언어여서 잘 알 수 있도록 되어있다. 복잡해서 우리가 잘 모를 때도 있지만 우리가 그런 차이점을 따라서 읽으면 우리에게 굉장한 것을 가르친다. 그렇게 편안히 읽으면 된다.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문맥 전체를 읽어야 되지 조금만 단락들만 읽어 가지고 알기가 어렵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읽어오면 쉽게 이해를 할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어떻게 완성하셨는가로 연결하면 될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한 마디로 하면 단에 드리는 일이다. 임자는 단에는 못 나가고 잡는 일만 한다. 생명의 선물이 드려지면 그 생명의 선물과 먹는 생명이 일치된다. 가령 죽은 것을 먹으면 그는 부정한 자로 진 밖에 나가야 된다. 먹을 것이 죽었다는 것 죽음의 권세가 먹을 것을 침범 했다는 것과 그가 생명되신 하나님과 단절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하나님이 흠향하신 것을 먹으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소에서 사는 것이다. 성소적인 생명이다. 그러니까 먹는 것과 생명의 질이 일치되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그런 관계로서 우리의 생명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전히 먹어봤자 썩어질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고생을 하면 참으로 빈곤한 것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이 내 살과 피다. 그런 방식으로 먹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죽음의 영역이라는 것이 없다. 그렇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 한다.

항상 제사법 자체의 문맥을 보고 그 시대의 생명의 질서를 보고 그 다음에 이것이 예수 안에서 어떻게 완성 됐는가를 해석하는 것이다. 먼저 그 당시 역사적인 토대가 안잡히면 기독론적인 해석을 해도 틀려버린다. 단지 예수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가 좋다 뿐이지 문장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김강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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