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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함2 (레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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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결법에 대해서 뒤에 한참 말하고 있다. 그러면 41절 이하를 읽으면 더 잘 알 수가 있다. 땅에 기는 모든 것은 가증한즉 먹지 말라 배로 다니는 것 네발로 다니는 것 여러발로 다니는 것은 먹지 말라 가증하다. 하여튼 배로 다니든지 네발로 걷든지 여러발로 다니든지 땅에 기는 것은 다 가증하다 그 말이이다. 기어 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를 가증하게 되지 말며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지 말라. 이것이 마지막 무엇이 부정한가 하는 강조다. 보니까 이것은 배로 다니든지 네발로 걷든지 여러발로 다니든지 하여튼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은 부정하다. 그 가장법을 땅에 기는 것으로 점점 강조하고 있다.

곤충도 네 발이 있어도 팔딱 팔닥 뛰는 것은 괜찮은데 네발로 기어다니면 가증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땅에 기는 것은 다 가증하다. 한마디로 땅은 부정하다는 말고 같다. 죽엄에 접촉한것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땅과 접촉한것도 부정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새는 땅에 내려오지도 않고 날아다니는데 무엇이냐? 새 중에서 먹을 만한 것을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새는 땅에 안다니까 훨씬 좋은데 날아다니는 새는 먹을 만한 것은 한 마리도 언급을 안하고 다 가증하다고 해 났으니 아마 하늘을 나니까 괜찮겠지 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같다. 강조 점은 한마디로 땅은 부정하고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짐승도 굽이 갈라진 것은 아마 땅에 접촉하는 힘이 약하고 굽이 갈라지지 않는 것은 땅에 깊이 밟는 것이 될 것이다.

기차도 그렇다. 자갈을 많이 깔면 무게가 분산된다. 전체적인 내용은 땅에 깊이 접촉되는 것은 다 부정하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제 해석이 가능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되새김질로 만약에 풀을 직접 막 뜯어 먹어 버리고 다시 한 번 돼시김질 하면 되지만 먹는 그대로 있으면 부정하다. 그런 것이지 말씀을 돼새김질하고 하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다.

배로 다니든 발로 다니든 어떻든 땅에 기는 것은 부정하다. 한마디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가증하다 한 것과 엇비슷하다. 단지 그 중에 굽이 갈라져 있던지 되새김질 하던지 그것은 정하고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으면 정하고 그래서 비늘과 지느러니가 있는 것은 땅에 기는 물고기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런 면으로 구별을 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땅에 있는 것을 다 가증하다. 땅과 접촉한 것은 다 가증하다. 제일로 땅에 기어서 저주 받도록 저주 받은 것은 뱀이다. 땅에 흙을 먹도록 저주 됐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회복하면 그것이 구원이다.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하면 저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땅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거처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아담이 범죄 했어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도록 하셨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다 부정한데 부정한 것과 접촉해도 부정이 안 옮기면 여기는 부정을 이기는 생명이 있지요? 만일에 이것까지 부정해버리면 부정을 이길 방법이 없지요? 그런데 어떤 것은 죽은 시체와 접촉하면 다 부정하고 못먹을 시체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먹을 만한 것도 죽어버리면 부정하고 그것에 접촉하면 부정하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땅과 죽음을 전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이 죽은시체가 접촉이 되어도 깨끗한 것이 있다. 그것은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죽엄에 접촉하는 것만 부정하다. 그 물자체는 절대로 부정해지지 않는다. 만일에 물에 둥둥 떠 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부정하면 그것은 부정해도 물을 절대로 부정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종자도 부정하지 않다. 그것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땅으로 새로운 생명을 내는 것이 종자다. 그러니까 종자는 부정하지 않다. 그러나 종자에다가 물을 더할 때 접촉하면 부정하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종자에다가 물을 더하면 종자 자체에 밖으로부터 무엇이 들어가는 것이 되겠지요? 그 때는 말하자면 부정이 물과 함께 들어가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물은 샘물이나 방축물 정결케 하는 물이 아니다. 요는 씨앗을 싹트게 해서 물이 들어가면 그런 이야기다. 샘물이나 방축물은 흐르는 물이다. 문둥병자도 흐르는 물위 질그릇 안에서 새를 잡으라고 그랬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부정에 접촉한 것이 질그릇이면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라.
29절에 이런 것에 접촉하면 모든 것이 부정하다. 물에 담거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라. 질그릇에 떨어지면 부정하니까 깨뜨리지만 다른 모든 것 가죽이나 옷이든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부정한데 물에 담그면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해가 지면 깨끗하게 된다. 그러나 질그릇을 담가서 된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한다. 그 질그릇이 어떤 용도로 쓰든지 화덕에 놓고 굽든지 깨뜨려라 그 말이다. 왜냐하면 질그릇은 냄새가 한마디로 배기는 것이다. 그래서 깨뜨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깨뜨리지 말고 빨아라. 담가라 그러면 정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때 질그릇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급이 낮겠지요? 우리가 같으면 유기 질그릇이야 냄새가 배길 것이 없지요? 항아리는 된장 간장 냄새가 고약하게 배긴다. 물에 오래 담가 논다고 될 일이 아니다. 불에다 구으면 모를까. 그러니까 아마 그런 상황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 부정하다. 그러나 가죽옷이든지 옷이든지 또 유기 그릇이든지 그런 것은 부정하지 않다. 그러나 물에 담그면 해가 지면 정결케 된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부정하다는 것이 점점 강조된 것과 함께 제일 뒤에 보니까 그 부정을 이기는 문제들을 말하고 있다. 흐르는 물과 샘물을 정결하다. 그리고 부정하게 된 것도 그 물에 담그면 해가 지면 깨끗케 된다. 그것이 여기서 정하고 부정한 문제다. 그런데 이런 땅에 기는 것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먹을 만한 것도 죽어 버리면 그 시체는 만지면 똑 같이 부정하다. 그러니까 먹을 수 있는 것까지라도 아직도 죽음이 완전히 제거 된 것이 아니다. 땅에 기는 것은 다 부정하다.
특별히 땅에 기는 것이 부정하다는 말을 41절 이하에서 많이 말을 하고 있다. 땅에 기는 모든 것은 가증한즉 먹지 말라. 배로 네발로 여러 발로 다니는 것은 가증하다. 기어다니는 것은 부정하다. 더렵히지 말아라. 이 말을 계속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것은 도덕적인 거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을 땅에 기는 부정한자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땅은 저주다. 땅에 기는 것이 다 가증한데 땅에 기는 것을 먹어서, 가증한 것을 먹어서 가증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나는 너희중에 거룩한 하나님으로 계시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했으니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것으로 부정케 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먹는 것과 그들의 몸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굽지고 되새김질 한 것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 그리고 발로 뛰는 것 그런 것만 먹어야 된다.
그러니까 새는 높이 날아도 한마디로 이쪽으로 뭉쳐서 해석을 하면 된다 그 말이다. 이것은 거룩하다는 말 때문에 도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이 거룩은 몸의 거룩을 말하지 도덕적인 거룩하고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룩하다 하면 윤리적인 거룩으로 바로 단어 해석을 한다. 이 문맥의 거룩은 먹는 것을 거룩하게 해서 너희 몸을 땅에 기는 부정한 것처럼 만들지 말아라. 뱀이 티끌을 &54697;으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너희들이 땅에 살고 있어도 땅과는 구별된 방식으로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해라. 그렇게 해서 저주된 생명으로 그들을 먹이지를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부정에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이 있고 땅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 만일에 정결케 하는 방법이 없고 다 부정하게 되어 버리면 세상은 죽음으로 저주된 것이다. 그런데 샘물과 방축물은 부정하게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물로 씻어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물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물로 에덴 중앙에서 흘렀다. 그래서 물로 목욕하고 물로 씻는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을 생명을 주는 성령의 표상으로 쓰는 이유들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세상은 처음부터 물로 말미암아 지어졌다. 그렇게 해서 물을 정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생수 업자들이 가져다 쓰면 안된다. 목욕 탕 주인이 쓸것도 아니고 구약 언어 개념이다. 정수기 장사하는 교인이 있었는데 물에 대해서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성경에 물을 찾아 놓고 예수 이야기만 하니까 자기 장사하는데는 아무 도움이 안되지 판매원들은 멋있는 물에 대해서 나오면 써먹어야 할텐데 물 이야기 해 놓고 예수 이야기만 하니까 좀 그렇다. 제대로 받았으면 진짜 훌륭하게 되고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기독론적인 해석을 못하면 웃기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물을 처음부터 생명을 주는 정결함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땅은 부정케 되도 온 땅을 적시는 물은 생명 나무가 있는 에덴 중앙에서 흘러 넘쳤다. 그 물이 온 땅을 적셨을 것이다. 거기 있는 생명의 강이 온 땅에 생명을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세 언어는 항상 물은 정결하다고 말한다.
만약에 흐르는 물까지 부정하게 되어 버리면 씻을 방법이 없다. 그리고 제일 끝에 결론에다가 짐승 새 수중 생물 땅에 기는 것에 부정하고 정함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분별한 것을 말했다. 형식상으로 이 말을 해준 것이다. 모든 각 생물 중에 먹을 것 먹지 못할 것 정하고 부정한 것 정하면 먹고 부정하면 못 먹는다. 부정한 것을 먹으면 그 몸이 부정하다. 생명이 부정하다. 그것을 내가 가르쳤다. 그것이 결론의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해석을 하겠다. 먹는 것은 이스엘중에 생명의 하나님으로 거하신 여호와의 생명의 선물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먹을 만한 것을 제한해 주셨으며 땅에 기어다니면 배로 다니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모든 죽엄을 부정하다. 그러나 샘물과 방축물은 정하며 종자는 정하나 물을 더할 때는 부정한 것에 접하면 부정하다. 부정한 것은 가증한 것이며 거기에 접촉하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다. 옷을 빨아라 정하리라. 부정한것에 접촉한 질그릇을 깨뜨려 버리고 다른 것은 물에 담그라 저녁 까지 부정하다가 정하리라.
여기 까지는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이스라엘에 주신 생명의 선물은 아직 죽음과 부정함에 갇힌 것이었다. 땅은 부정하나 물을 정하다. 부정함은 하루에 제한되며 물의 씻음으로 정결케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를 소망하는 가운데서 먹으며 자신의 몸을 헌신했다. 죽음가운데 갇혀서 먹었다. 이스라엘처럼 죽음과 저주 가운데서 먹은 백성이 없다.
그런데 그들의 부정은 소망이 있는 부정이다. 왜 해가 지면 정하다. 물로 씻으면 정하고 물에 씻는 것과 하루해가 지면 정하다는 약속이 있다. 이처럼 하루해가 지나고 새로운 날이 오면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도록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에 부정이 내일까지 넘어가지를 않는다. 이 부정을 끝내는 새 날이 온다. 그렇게 해서 물의 씻음과 정하게 하는 새 날을 소망하도록 했다. 그래도 그들은 부정한 땅에 살고 먹는 것은 전부 죽음에 갇혀 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죽으면 부정하니 완전히 죽음에 갇혀서 먹었다.
이 은혜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하늘에 속한 정결함으로 온전케 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죽음은 정복되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시대가 왔으며 이제 땅과 만물을 정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하여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죽음에 그림자가 없다.
예수의 부활에서 새 시대가 왔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왔다. 땅은 하늘에 성소로 거룩하게 되고 이제는 친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주님 재림하시면 만물이 주님의 몸의 질서로 정결하게 될 것이다. 완전한 정결이 완성이다. 죄로부터 정결이 신약의 교회안에서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교제로 먹지 죽음에 갇혀서 먹지를 않는다. 여전히 죽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때문에 완성된 생명을 미리 맛보는 방식으로 먹는다.
그것이 교회가 먹고 마시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 주님의 몸의 지체로 거룩하게 드린다. 그러니까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한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한다. 이제 하늘에 새는 연구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아 ! 독수리는 징그럽습니다. 높이 날아 신앙이 좋다고 해도 눈이 고약하고 부리가 고약하고 발톱은 찢어 죽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남 비판이나 잘하고 찢기나 잘하면 이것도 못될 사람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이다. 한마디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부정하다. 그 말이다. 아마 하늘에 낳은 것은 정하다는 그런 사상을 가지지 못하도록 거기서는 부정한 것만 쭉 나열해 버린 것같다. 부정하다.
그러나 땅에 기어도 발로 뛰는 것은 정하다. 땅에 있어도 굽이 갈라져 있으면 정하다. 먹는 것도 한 번 먹고 끝나면 부정하고 되새김질을 하면 정하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세계중에 정결한 생명을 약속하셨는데도 이것도 죽으면 부정하다.그러니 완전히 죽음에 쌓여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하다는 생물이 몇가지 있고 그리고 그 중에 하나님에 드릴것도 있다. 또 이것이 부정해도 해가 지면 정하고 물로 씻으면 정하다. 씻는 물과 부정하지 않는 새로우 날이 온다. 이 소망가운데서 그들의 몸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몸으로 드리도록 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생명의 교제다.
죽음 가운데 갇혀 있는 교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죽음에 그림자가 없고 다 먹어라. 내 살과 피를 먹는 방식으로 먹어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려고 예수의 살과 피로 구원하셨다. 주님의 몸의 거처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다. 그렇게 먹고 마심을 성화 시켜야 된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동물학 박사 안되고 되고 여기 있는 문제만 해석하면 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원숭이 같은 것은 땅에 내려오지 않고 주로 나무 위에서만 사는데 그러면 훨씬 거룩하겠지요? 그런데 거기서는 그 구조가 굽이 없이 땅에 다니는 것은 다 부정하다. 맨살로 다니면 그리고 발이 많아서 땅에 다니면 부정하다. 하여튼 땅과 접촉을 이야기하고 있다.
땅은 부정하며 가증하고 저주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 저주되어 있고 죽음에 갇혀 있다. 먹을 만한 것도 죽음에 갇혀 있다. 소망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의 정결함과 새 시대를 약속하고 있고 그 죽음으로부터 먹을만한 식물을 주셧다. 죽음에 갇혀서 먹었다. 우리는 완전한 생명의 질서로 먹는다. 우리의 몸도 그 거룩한 몸의 질서로 드린다.

이 줄거리를 보고 본문을 읽어보면 그 말이 강조되게 설명을 해 노셨다. 그런데 구약 때는 아무리 부정해도 해가 지면 정결하고 굽이 있는 것을 먹고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약속을 보고 있지 더 이상은 없다. 그러니까 구약 문맥 자체만 읽어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책으로 못 읽는다. 그 소망은 여전히 갇힌 소망이고 그 완성은 예수의 부활에 있다. 부활의 빛으로 읽을 때만 구약에 갇혀 있는 임시적인 소망들 하루해가 지나면 씻으면 이런 문제들은 영원히 제거 되어 버리고 그리고 땅에 있는 저주도 영원히 제거 되어 버렸다.

항상 완성된 기독록적인 빛으로 읽어야 된다. 예수 오시기 전에는 그런 생명의 책으로 읽을 수도 없고 누릴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지킬수가 없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졌어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겠거든 이 짐을 이방인에게 지울려고 그러느냐 ? 그 말이다. 너무 너무 어려워서 못 지켰다 그 말이 아니다. 우리가 볼 때 굉장히 복잡하다. 왜냐하면 먹을것과 먹지 못할 것을 다 물어 봐야 될것이니까.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을 지켰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생명의 자유를 못 누렸다. 그런데 우리 조상이 수천년 졌어도 의롭다 하지 못한 것을 이방인에게 다시 지울려고 그러느냐? 그것을 져서는 지금 예수를 믿어서 의롭다 하는 그런 교제를 하나님과 못 누리잖냐? 그런데 왜 그 짐을 이방인에게 지울려고 그러느냐? 그것이 사도행전의 책망이지 이것은 너무 너무 어려우니까 아무도 못지킨다. 그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거룩한 생명의 교제안에서 살았던 것이다.

질문을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데 다 알고 있는 줄 알고 성경을 안 읽는 것은 진짜 거구로다. 남편과의 사랑에 있어서도 다 아니까 더욱 더 물어 본다. 나를 사랑 하냐고.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그가 우리를 생명으로 사랑하시는 일에 질문이 없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 것이 성경을 다 아는 것으로 말고 성경을 덮어 버리면 안된다. 열심히 읽으라 그 말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어야 이 교육을 받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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