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문둥병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 (레 14:1)

첨부 1



위기 14장-문둥병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

읽어 오신 줄 알고 주보를 읽으면서 강론을 하도록 하겠다. 14장은 문둥병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하는 그 말을 따라서 제목을 붙였다. 14장 2절을 보면 문둥병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쭉 있다. 항상 처음에 나오는 것이 주제적인 서론이다. 그리고 그것을 쭉 풀고 그 다음 가령 32절을 보면 문둥병 환자로서 그 힘이 부족한 자의 결례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그리고 57절을 보면 문둥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그런 말로 마치고 있다. 먼저 이 전체적인 문제를 해석을 해 버리고 그리고 부분 부분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부분 부분을 그 때 그 때 설명을 하면 상당히 길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방법을 바꿨다.

문둥병 규례에서는 13장에서는 문둥병 진찰하는 규례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몸과 집에 다 문둥병이 들 수 있다. 죽음의 세력이 활동하면 부정하다. 그러나 성소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면 생명의 하나님을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정결케 하는 규례는 해가 져서 새로운 생명의 날이 오면 그는 정결하다. 그 때 정결한 물로 씻으면 된다. 그리고 안식의 칠일이 차면 나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고 나았으면 씻으면 된다. 그리고 정결의 물과 생명의 피를 뿌리는 것 즉 산 새를 흐르는 물위에서 잡아 가지고 그 피를 뿌리는 것 그리고 제사법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해서 친히 함께 하시는 규례들이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정결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교회에 주심으로 이 생명의 언약 역사를 완성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얻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안에 있고 우리에게 썩음의 흔적이 없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들 생활에서 문둥병이 있는가 조심했던 것처럼 우리 생활에서도 그런 것이 없는가 조심하라고 그런 식으로 연결을 하면 안된다.

이것은 우리 생활의 경건의 모델로 준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구체적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언약 적인 삶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삶의 교제를 예수 안에서 완성시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이스라엘처럼 휘장밖에 있다거나 이런 저런 썩어짐의 세력안에서 교제한다거나 그런 것이 없이 우리는 휘장안에 있고 예수와 함께 새로운 생명에 있지 썩어짐의 흔적이 없는 그런 완전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결법을 보면 제사장이 진에서 나가서 진찰하고 환처가 나았으면 정결함을 받을 자로 제물을 준비하게 하고 제사장이 정결법을 집행하는데 정결법은 물과 피로 씻는 것과 제사법 그 두부 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씻어 정결케 하는 규례가 1절부터 9절까지 있고 그리고 제사를 드려서 정결케 하는 규례가 10절 이하에 있다. 그리고 그 제물에 드릴 수 없는 가난 한자의 대한 정결법이 그 이하에 있고 33절 이하는 가옥의 문둥병인데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문둥병이 들면 치료하는 방법이다. 가옥 문둥병 이전에는 지금부터 집행되고 있는 것이고 가옥의 문둥병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문제다.

먼저 씻어 정결케 하는 규례를 보면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새 하나는 흐르는 물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위 질그릇 안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그렇게 하고 산 새는 들에 놓는다.
정결함을 받는 자는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으면 그러면 정하다. 이런 정결로 완전케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정결로는 진으로는 들어올 수 있지만 자기 집밖에 칠일 동안 있고 그 칠일 후에 모든 털을 다 밀고 옷을 물에 빨고 몸을 물로 씻으면 정하다. 그래야만 자기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해석인데 여기 흐르는 물은 죽엄에 접촉하여도 정결하다고 11장에 나왔었다. 흐르는 물위에는 죽엄이 떨어져도 부정함을 입지 않는다. 그래서 흐르는 물은 죽음에 접촉하여도 온전한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질그릇은 피를 받기 위한 것이다. 흐르는 물위에서 잡으면 피가 흘러가 버리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질그릇 안에 보화를 가졌으니 해서 신약 성경에 질그릇이 나온다고 적용해 버리면 안되고 그냥 그 그릇 속에서 잡는데 흐르는 물위에서 잡는다. 그렇게 해서 산 새와 백향목과 홍색실 이것을 함께 가져오고 우슬초도 가져오게 해서 흐르는 물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바른다. 그러니까 물과 피를 바르는 것이다. 산새와 백향목과 붉은 실은 생명을 표상 하는 것이다. 산 새니까 확실하고 백행목도 가나안 땅의 큰 번성을 표현했을 때 백향목을 쓰고 있고 붉은 실도 그런 색깔이다.

그 다음 우슬초는 유월절 양의 피를 각 집에 바를 때 우슬초로 발랐다. 그래서 그것은 정결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산 새는 들에 놓음은 새로운 생명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산 새는 백향목과 붉은 실과 우슬초와 함께 흐르는 물위에서 잡은 새의 피에 적셔진 새다. 그 새를 놓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완전한 생명 산 새와 백향목과 붉은 실은 흐르는 물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문둥병 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산 새는 날려보내고 그렇게 했을 때 산 새를 날려보내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리고 생명의 피와 정결의 물을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온전한 생명과 정결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털을 미는 것은 물로 씻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거기 보면 물로 씻어라 옷을 빨아라. 털을 밀어라. 같은 위치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까 옷을 빠는 것 목욕하는 것 그것은 같은 개념이다. 옷을 빠는 것은 행동을 고치는 것 털을 미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짜르는 것 목욕하는 것은 뭐 이렇게 해석하면 안되고 같은 개념이다. 어떻든 죽음이 활동하는 몸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정결케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씻어서 정결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문둥병 환자가 만일에 무슨 이상이 있다. 그러면 칠일을 가둬 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았냐면 생명이 활동하는 피부 같은 것은 칠일 동안 가만히 있으면 또 칠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가죽옷이든지 의복이든지 그런 것은 그냥 칠일만에 판정할수 있다. 그래로 있으면 또 칠일을 기다려 본다. 그래도 더 번지지 안했으면 이것은 죽음의 세력이 몸에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생명의 활동이 죽음의 세력을 이겨나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결하다.

정결하니까 끝나는가? 물로 항상 씻어야 된다. 가령 이상한 흔적만 있고 문둥병이 아니어도 씻어야 된다. 그런데 만일에 우묵하거나 흰털이 나거나 아픈 자리가 퍼져 버렸으면 그것은 죽음이 활동하고 있는 증거기 때문에 부정하다 문둥병이다 판정하고 진 밖으로 나가야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증상이 나았으면 제사장에게 연락하면 제사장이 진 밖으로 나가서 진찰을 해야한다. 나았으면 이런 방법을 통해서 진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하는 방법은 산 새를 두 마리 가지고 그리고 백향목 그리고 홍색실 우슬초 이것을 가지고 흐르는 물위 질그릇 위에서 새를 잡는다. 그래서 물과 피가 섞어진다. 그러면 그 산새 한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 우슬초로 한꺼번에 물과 피가 섞어진 거기에 적셔가지고 정결함을 받을 문둥병 환자에게 일곱 번을 뿌린다. 그리고 뿌리고 나면 이 사람은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몸을 씻으면 일단정하다. 그러면 어디 까지 들어올수 있냐면 진안에 까지는 들어온다. 그리고 아직 자기 집에는 못들어간다. 또 칠일을 기다려서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몸을 물로 씻으면 그 다음에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거듭 반복되는 정결법이다.

그렇게 해서 진 밖으로 나가는 문제를 반복되는 방법을 통해서 완전한 정결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 있는 것은 전부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표상들이다. 이전에 죽음에 활동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해서 산 새는 날려 보냈는데 새로운 생명의 활동력이 있어서 그는 죽어 있는데 매어 있지를 않는다. 그리고 다시 깨끗게 하면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몸이고 옷이고 이런데 죽음에 세력이 활동해도 하나님이 정결케 하신다. 죽음은 성소에 계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는 것이다. 진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해가 지면 또는 칠일이 차면 또 하나님께서 낳게 하시면 이런 저런 정결법을 통해서 진안으로 또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하고 생명의 교제를 나누게 하신다.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제물을 드려서 속죄하면 정결하다. 먼저는 씻어야 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도 아직 성소에는 나아가지를 못한다. 이젠 성소에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제물을 제 팔 일에 드리는데 제 팔 일에 제사를 드려서 죄를 속한다. 여기서 우리들을 죄를 속한다고 하니까 보통 죄 값을 갚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를 속한다 그 말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백성으로 구원되어 있다. 예물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이다. 성소에서 함께 살고 예물을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이다. 그런데 문둥병 때문에 진밖으로 쫓겨나고 하나님앞에 이제까지 드릴수 없었다. 그 드리지 못했던 것을 드림으로 속하는 것이다. 이제는 드릴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속한것이지 죄가 많으니까 너는 일단계만 씻어 이단계가 또 있다. 한단계해서 되겠느냐? 그런 문제들이 아니다. 이제 진안으로 들어왔어도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지를 못했고 많은 사람을 부정케 할 수 있도록 문둥병이 옮겨 있었다.

이제 그가 하나님 앞에 정결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면 이제까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지 못했던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고 있으니까.
제 팔 일에 제사를 드려서 죄를 속한다. 제 팔일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하는 언약적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칠일만에 목욕하고 자기 집안으로 들어가잖아요? 이제는 완전한 회복이 왔다. 그렇게 했을 때 그는 제 팔일에 성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함의 의미는 성소를 봉사하지 못한 죄를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사의 핵심은 속건제 수양을 요제로 드리면 그 제물을 제사장이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먹고 요제로 드린 속건제의 피와 한록의 피를 정결함을 받을 자의 몸에 제사장의 위임식의 관유와 피처럼 바르는 것이다. 그것이 속죄함을 받은 제사의 핵심이다. 우리 같으면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속건제를 드리도록 하고 있고 속건제를 먼저 드리고 속건제가 중심된 제사다. 속건제는 권리를 갚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수양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흔들어 드린다. 그리고 흔들어 드린 것은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리고 이 흔들어 드린 수양을 잡아서 그전에 제사장은 위임식에 수양 화목제의 수양의 피를 오른 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발가락 발랐다. 그런데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는 속하는 제사는 속건제의 제물의 피를 하나님 앞에 먼저 흔들어 드리고 그 제물은 제사장이 먹고 그 피는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부터 엄지발가락 손가락에 바른다. 꼭 제사장에게 바른 것 같다. 그런데 제사장은 화목의 피를 발랐고 이 문둥병환자는 속건제의 피를 바른다.

그리고 한 록의 기름을 발라야 된다. 그 기름도 속건제처럼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렸던 기름이다. 그 기름을 피를 발랐던 그 위에다 바르고 나머지 기름은 머리에다 부어서 바르면 된다. 왼손 바닥에다가 기름을 따라서 오른 손으로 찍어 발라라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오른손 하는 것은 구약에서 권세의 표고 도와주는 표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언급하고 있을 것이다. 왼손잡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말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발라라 하는 말은 그런 말일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문둥병 환자가 먼저는 씻고 씻어서 진에 들어온 뒤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속죄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제사장이 위임식의 화목제 피를 바르면 그는 위임식에 화목제를 드리는 자로 위임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즐겨 드리는 자로 위임된 것인데 문둥병 환자는 속건제를 드렸을 때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그는 이전에는 권리 침해를 하면 하나님 앞에 속건제를 드린 것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회복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속죄제로 암양을 드려서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속죄한다. 이 성경에는 어떤 것으로 제물을 드려라 그런 말은 없고 제물을 한꺼번에 언급하고 제사만 말하니까 제가 알기 쉽도록 설명한 것뿐이다.
여기서 제물을 일일이 구별하지 않고 한꺼번에 제물을 언급한 것이 이 성경 표현법이다. 왜 예물 드리는 자다. 예물을 많이 드린다. 그 다음 제사의 일을 다음에 언급이 되어 있고 이러 이러한 제물을 한꺼번에 가져와라 그리고 이런 제사를 지내라 그렇게 성경은 언급이 되어 있다. 단지 제가 알기 쉽게 이런 제사를 이런 예물을 드리고 이렇게 구별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성경 기록법대로 하면 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제사 종류보다는 많은 예물을 가져와라 그리고 이것을 드리라 했다. 그리고 드렸는데 이 사람은 속건제를 드렸을 때 자기의 전지체를 제사장이 화목제의 예물을 드린것처럼 자기의 전지채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자로 그렇게 피를 바르고 기름을 발라야 된다.

피와 기름이 발라지면 새로운 생명이 발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 전채를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전에는 전 몸에 죽음이 역사 해서 그는 성소밖에 있었다. 이제는 속건제의 피와 기름이 발라져 있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려진 존재로 그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존재로 피와 기름이 발라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그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 번제로 수양을 소제로 에바 십분의 삼을 단에 드려서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해서 속죄한다. 그리함은 그가 정결하다. 여기서도 보면 번제는 본래 속죄를 위해서 드린 것은 아니다. 번제를 향내를 위해서 드린 것이 핵심이다. 소제는 더군다나 피있는 제사가 아니다. 소제도 레위기를 보면 향내를 위해서 그것도 유향은 소제와 함께 하니까 제일로 향내나는 것이 그런 의미로 소제일 것이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드림으로 향내가 나지만 소제는 고운 기름 가루에다가 또 기름을 섞고 거기다가 특별히 유향을 불살르니까 제일 향내나는 것은 소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소제 그런 것은 속죄함을 위해서 드린 것은 아니다. 죄와 관계된 것은 속건제와 속죄제고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향내를 위해서 기쁨을 위해서 드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 14장을 보면 번제를 드려서 속죄하고 소제를 드려서 속죄하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속죄는 이제까지 드리지 못했던 것을 드림으로 속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죄 때문에 그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린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권리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 드리도록 되어 있고 그 다음 속죄제 그 후에 번제와 소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부정함 때문에 진밖에 나가 있었거든. 그런데도 이 사람의 부정함은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특권을 침해하는 그런 의미로 죄는 있지만 그가 구체적인 도적적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그런 존재는 아니다.

그러니까 속죄제가 앞서 있지 않다. 속건제가 앞서 있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속건제가 앞서고 그리고 나서 나머지 모든 제사를 지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는 속건제의 요제를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린 것처럼 그 피와 기름을 바른 이 사람도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린 것처럼 드려진 존재로 봉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드려진 것은 나중에 번제와 소제를 드림에서 속죄하라 향내나는 제사를 드릴수 있는 존재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에 가난한 자여도 하나님 앞에 그 권리 침해를 하는 일에 있어서는 깍아주지를 않는다. 오히려 레위에서는 오분의 일 벌금을 더 물어야 한다. 그러니까 속건제를 드리는 것은 똑같이 되어 있고 나머지 속죄제 번제 소제를 드리는 것은 가난한 자의 형편에 조절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왜 화목제를 안 나오는가? 그것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화목제를 화목의 교제 친교가 핵심이다. 그런데 문둥병 환자에서는 속건제에서 봉사가 강조다. 그래서 화목제는 제사의 목표처럼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번제와 소제를 드리는 헌신에다가 강조를 둔 것 같다. 그래서 가난한 자면 그 형편에 조절되어서 낮아져 있다.

그리고 가옥의 문둥병은 기업으로 주시는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에 만일에 문둥병의 색점이 발하면 이제 처리하는 방법이다. 진찰 법은 제사장이 그 집에 들어가서 진찰하기 전에 그 집을 비우게 하고 집안 물건에 부정이 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찰이 끝나버리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전부 다 비우게 하고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우묵하면 이것은 문둥병의 환처이기 때문에 그 집은 칠일동안 가둬두고 그리고 칠일만에 와서 살펴봐야 한다. 색점이 퍼졌으면 색점이 있는 돌을 빼어내어 성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또 집안 사면을 긁어 그 그 흙을 성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다른 돌과 흙으로 대신 교채를 시켜야 된다.

퍼진 것을 보니까 분명히 문둥병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일차 정결법을 하는 것이다. 긁어 버리고 빼어 내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칠일 후에 와서 하는 것이다. 만일에 다시 긁고 발랐는데도 색점이 다시 나타나고 퍼졌으면 악성 문둥병이기 때문에 부정하다. 그 집을 헐어서 모든 것을 성밖 부정한곳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집을 폐쇄한 동안 왕래한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하고 들락날락 하는 사람은 자는 자나 먹는 자나 다 저녁까지 부정하고 다 옷을 빨고 해가 지면 정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고쳐바른 후에 퍼지지 않았으맨 색점이 나은 것이기 때문에 정결하다.
그렇게 되면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산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로 정결케 한다. 정결법은 이 앞에 나왔던 정결법이다.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정결법이다. 일곱 번 뿌리고 정결케 하고 날려보낸다. 그 산새는 성밖들에 놓아서 그 집을 위하여 속하여 정결케 한다. 그러면 문둥병 자를 이런 산새 백향목 홍색실 흐르는 물 이것으로 정결케 했던 것처럼 그 집도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고 그런 정결함이 있다.

여기 보니까 부정하니까 긁어서 성밖에 버리도록 했다. 그리고 또 기다려 봐야 한다. 한 번 치료했는데도 또 제발 하면 그것은 악성 문둥병이라 집을 다 헐어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한 번 치료한 뒤로 괜찮으면 그것은 나은 것이다. 어떻든 처음에 우묵하면 일주일 동안 기다려 보고 만일에 칠일 후에 와서 보니 그것이 퍼졌으면 일단은 문둥병 판정이 된 것이다. 그래도 처음부터 집을 헐어버리지 않고 일단계 치료는 흙을 긁어버리고 돌을 빼내버리는 것이 일단계 치료다. 그 다음에 치료도 회복이 안되면 그것은 헐어 버려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 칠일이 지난뒤로 퍼지지 않았으면 나은 것이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를 정결케 하는 것처럼 그런 정결법으로 그 집을 정결케 하면 가나안 땅에서 주신 집이 깨끗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영해 해서는 안되고 구체적으로 그 사람들의 옷 또는 몸과 집 그들의 구체적인 가나안 땅의 기업 그들의 삶에 죽음에 활동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치료시키는 하나님으로 그들 중에 계신다. 죄의 권세 죄의 활동을 썩어짐의 활동이요 주님과 동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그런데도 그 썩어짐의 권세가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료의 대책이 있는데 하나님은 씻어 정결케 하는 법으로 그리고 제사 드리는 법으로 정결케 해서 이제 이스라엘로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리는 속건제물처럼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피와 기름을 그 문둥병 환자에게 발라서 마치 요제로 드리는 제물처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존재로 드리는 자로 그렇게 정결케 하신다. 이 약속을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 앞에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는 세계는 너는 썩어졌다. 진밖으로 나가라 이제 내가 너를 정결케 한다. 그런 반복적인 정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썩어짐이 제거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우리의 전 지체로 하나님을 봉사할수 있도록 그렇게 거룩하게 하셨다. 그것이 이 약속이 예수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것을 소위 영해라고 한 말을 잘못된 말이지만 성경에서 신령하다 그 말하다 그 말은 예수 안에 신령함 모세 안에 신령함 신령하다는 말을 쓰자면 하나님과 함께 함이 신령함인데 모세 안에 신령함은 땅의 제도로 함께 함이다. 썩어짐의 질 서안에서 함께 함이고 휘장밖에서 함께 함이다. 이제 예수 안에서 함께 함은 부활하산 예수 안에서 함께 함이고 하늘에 속한 함께 함이고 그런 의미로 성령이 친히 우리에게주신 교통으로 함께 함이다. 그러지 정신적인 것은 신령하고 외적인 것 육체적인 것은 질이 낮고 그런 것은 없다.

단지 우리가 이방 언어로 읽어 들어가니까 정신적인 것은 신령하고 육체적인 것은 덜 신령하고 이렇게 읽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의 언어는 그런 관점의 언어가 없다. 약혼했으면 약혼의 의미로 약혼 예물이든 무엇이든 사랑의 선물이고 결혼하면 그것이 비록 은반지여도 사랑의 선물이다. 그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금속의 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들을 잊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말하자면 소위 신령하다는 의미로 적용을 할 때 집에 문둥병 우리들은 좋은 집이면 문둥병 든 사람이다. 요새 예배당도 문둥병 든데 있겠지요? 보니까 예배당에 치장을 건사하게 해 가지고 보니까 자기들은 좋다고 해도 조금 눈뜨고 보면 문둥병도 대개 걸렸제? 그런 식으로 영해 하지 말라 그 말이다.
예배 처소를 예배하기 좋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좋지만 실은 종탑을 높이 세우는 것은 요새로 하면 선전탑이고 옛날에는 하늘을 향에 오른다고 쪼삣하게 했는가 모르겠다. 이제 미술적인 표현력이다. 그런데 큰 교회 보면 종탑하나가 우리 예배당 값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 속에가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이 많이 들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보면 문둥병인데 그런 식으로 진찰하지 말라는 말이다.

자기들은 좋고 이 정도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지 하지만 제대로 보면 그런데다가 실은 돈 쓸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것도 문둥병이구나 그렇게 하지 말라 그 말이다. 요새 보면 목사는 기본이고 박사가 높다. 그러니까 교회가면 이 까운 저 까운 입고 색깔도 여러 가지다. 그런데 우리 나라만 들어오면 유치원 같이 되어 버린다. 미국만 가도 그렇지 않는데 우리 나라는 사철 색깔이 달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저것이 무슨 박사인지 모르겠다. 그래야 여자 성도들이 보면 거룩하고 무엇이 된것같다. 소위 영해하자면 문둥병이 들어도 대개 걸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실은 예배를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적용하지 말라 그 말이다. 만일에 부흥사들이 이런 본문을 그렇게 읽으면 신령하도다 그렇게 죄가 깊구나 아! 우리 문둥병 안들었는가 보자. 반지 문둥병도 있겠지요?

전도사가 큰 반지 끼고 가난한 집 심방 가서 성경을 펼 때 반짝반짝하면 안될 것이다. 그것은 조심해야 한다. 이제 그런 식으로 문둥병을 지적하면 아 굉장히 신령하고 그 집회에 은혜가 만겠지요? 이제 죄를 알았고 이제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로 분별하는 것이다. 성경은 반지 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에 함께 하시는 교제로 복주셨고 가나안 땅을 친히 성소로 복을 주셨다. 그래도 그들의 몸에도 죽음이 활동한다. 옷에도 심지어 가옥에도 죽음이 활동한다. 아직도 완전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죽음이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부터 온 땅을 생명의 물로 적심으로 되어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사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전체로 헌신하는 약속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 때는 문둥병이 나았어도 제발할 수가 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니까. 아무리 속건제의 피와 기름을 발라도 그것은 여전히 다시 휘장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야 된다. 만일에 문둥병이 들었으면 또 진밖으로 나가야 한다. 또 15장에 보면 여러 부정이 있는데 그런일만 있어도 그는 거룩하지 못하다. 그런데 이제 예수안에서는 그런 부정이 없다. 예수의 죽으심에서 옛 죽음의 그림자는 다 끝났다. 죽음의 권세는 끝났다. 예수는 부활하셔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셨다. 교회는 그 몸으로서 장자다. 예수께서 첫 머리다. 그가 만물의 창조자요 머리인것처럼 그가 새로운 세계의 머리다.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썩어짐의 그림자가 없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우리가 주님의 몸으로 함께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로 봉사하는 새 백성이된 것이다. 이것이 이 레위기에서 약속한 것을 완성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받았다. 그랬는데도 조금만 무엇이 흔들리면 달달 떤다. 그것은 아무리 부활하신 주님이 생명의 교제로 주셨어도 여전히 썩어진 질서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몸까지라도 여전히 썩어지는 질서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은 우리의 몸도 주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를 시킬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구약 조상들의 죽음처럼 조상들의 어두운 묘실로 들어가는 그런 죽임이 아니다. 영광의 주님의 거처로 옮겨지는 죽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금만 일이 어려워도 달달 떤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완전한 교제 가운데서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속한 기업을 받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부정 한자가 진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소밖에서 죽으심을 당했다. 그가 저주받은 자로 나무에 달렸을 때 그는 예루살렘 성밖에서 달린 것이다. 왜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런 부정한자를 처벌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도 그의 능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다. 이 세상은 영구한 도성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썩어짐의 질서 가운에 있다. 그것에 매여 살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어도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 안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속건제 피를 바르는 자가 하나님을 봉사한 것처럼 그런 제사장 적인 봉사로 하나님을 봉사해야 한다. 여러분보고 반지 끼고 심방 하지 말라 그런 말 아니다. 나는 그런 말을 안했다. 우리 교회는 18금 이런 식으로 교회를 통일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부자의 반지를 보고 부러워하는 것이 큰 죄가 될 수가 있다. 우리 나라는 그래가지고 문제다. 부자는 부자대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면 그만이지 나도 그렇게 못해서 열나가지고 우리는 공평하지 않다고 야단하고 있다. 배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부자를 매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각각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이 있겠지요? 단지 그런 것들이 어느 것이 덕이 될 것인지는 자신들이 조절해야 되겠지만 절대로 경건하게 살려면 남편이 다이아 반지를 해준다고 해도 절대로 거절해 버리고 나는 금반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획일화시킨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형제에게 덕이 될 것인지 그런 문제는 조절해야 딜 것이다. 단지 내가 예를 그렇게 든 것 뿐이다.

기독교는 옛날 예수 믿는 사람은 전부 검정 치만 입고 하얀 웃옷에다가 가방 하나 들고 그러면 딱 전도사 폼이 난다. 말하자면 그래가지고 기독교인 하면 참으로 멋도 모르고 삶의 재미도 모르고 누가 그것을 표준을 정해 놓았는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여러분의 삶의 즐거움이 부름 받은 자리가 있다. 그것은 누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할지 자신들이 조절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 나갈 때는 멋쟁이 옷 입고 가다가 교회올 때는 부덕이 되니까 청치만 입고 가자 하고 슬리퍼 짝짝 끌고 와서 나는 경건한척 하면 안된다. 물론 덕대라고 바꿀 수는 있겠지요? 할 수 있겠지만 세상 친구들을 만난 때는 사회적인 수준이 있으니까 착 빼 입고 나간다 그 말이다. 그런데 시내는 교인들이 짝 깔렸거든. 보니까 아 그거 묘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도 조절하느라고 하는 그런 지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까지라도 그런 사람들을 이중 인격자로 매도할필요는 없다 그 말이다. 그가 어떻게 자기의 제물을 활용하는지는 그 다음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과도한 사치는 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 것이라고 자기가 맘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이 서로 믿음으로 사셔야 될 것이다. 각자 자기 생활의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질문이 없다 그 말은 성경 읽지 말라는 의미로 없어서는 안된다. 주님을 아는 만족으로 질문이 없다 그 말이고 그러니까 더 많이 읽어야 한다. 더 많이 읽고 이제 참으로 주님을 얼굴로 대면할 때는 그가 얼마큼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을 완벽하게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예배당에 올 때는 제일 좋은 옷 입고 나오셔야 한다. 옷 경연장이 되어라 그런 말이 아니라 예배오셨거든. 그러면 부자는 자기에게 맞는 좋은 옷이 있을 것이고 가난한자는 시집올 때 한 번 입다가 만옷이 있더라도 하여튼 있을 것이고 그것이 정상적이다. 예배당에 올 때는 대충나오고 그러지 마시고 그래도 예배당에 나오면 예배당에 나올 때 단정함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절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예배시간에 부족한대 가능하면 청년들도 만일에 아버지가 신사복 한벌 사준 것 있으면 계속 입고 나오시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다. 아마 외국 같으면 어디 예식에 나간다면 다 예복을 입을 것이다.
단지 서양식을 따라라 그 말이 아니라 단정하게 입으라 그 말이다. 그런 의미로 제일 좋은 옷을 입으라 그 말이다. 최고급 입으라거나 최 신식 입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단정하게 입고 출석을 해라 그 말이다. 예배하러 모였으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