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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물의 거룩 (레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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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명하겠다. 제사장은 여호와의 성소와 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식물을 드리며 그 식물을 먹는 자이다.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성소에 계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어른으로 제사장을 구별하셔서 그들도 성소에 계신 여호와의 상을 봉사하며 먹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레위에게 평강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로 여호와로 경외케 하시며 제사장은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로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다. 말2장을 인용했다. 왜냐하면 어른이 되었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백성의 어른으로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고 여호와의 식물을 먹어라. 어떤 의미로 어른이냐면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상에서 식물을 먹고 마시는 일에 어른이다. 왜 거기에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상에 들어가서 드리고 먹는 것은 온전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들을 이런 큰 생명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어서 백성들을 율법으로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르쳐서 정결한 백성으로 살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21-22장에 있는 내용이다.
서원제와 자원제 여기 낙헌제라는 말이 한자로 쓰여져 있어서 알기가 어려울 것같아서 다른 말로 자원제라고 풀었다. 여기서도 그렇게 풀어서 설명되어 있다. 앞에서는 17절에서는 서원제와 낙헌제로 그렇게 했다가 그 다음에 21절에 보면 서원한 것을 갚으려 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든지 하여 그렇게 되어 있다. 21절에는 서원제와 낙헌제라는 말이 조금더 설명되어 있다. 서원한 것을 갚는 것은 서원제고 자의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낙헌제다. 그래서 서원제와 낙헌제와 감사제는 화목 제물이다. 화목제는 여호와와 제사장의 식탁 교제가 중심이다. 그래서 특별히 화목제를 드리면 제사장이 무엇을 주는가?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준다. 식탁 교제가 중심이다.

번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향내나는 음식으로 드리는 것이 번제다. 다 태워 드리면 하나님이 향내를 맡으신다. 그러니까 화목제의 기름을 이 번제위에 태우라 그렇게 되어 있다. 기름은 하나님의 몫인데 그것을 번제와 일치 시켜서 번제위에 화목제의 기름을 태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번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향내나는 음식으로 드리는 것이 번제다. 그러므로 서원제나 자원제로 번제나 화목제를 드릴때에 즉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내용은 서원을 갚거나 스스로 기뻐서 드리는 것인데 그것을 드리는 방식은 전체를 다 태워 드리는 번제로 드리든지 하나님앞에 식탁교제로 드릴때에는 열납 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하시고 감사 희생을 열납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열납되도록 당일에 먹으라. 명하심으로 마무리 하신다. 이것이 여기 22장에 전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 삼으시고 성소에 불러 들인 것은 하나님앞에 생명과 평강의언약이다. 그들은 이 생명의 교제를 누리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도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여기서는 번제나 화목 제물을 드리는데 무엇으로 드리냐면 서원을 갚기 위해서나 자원제로 드리거나 감사제로 드린다. 그렇게 했을 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리고 흠없는 것으로 드릴뿐만 아니라 열납되도록 그 날에 먹어라. 그러니까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어라. 그 말이다. 하나님의 상에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드리고 하나님앞에 기쁜 친교로 먹으라. 드리고 먹어라는 말이 여기 22장에 강조점이다.

조금 미진된 것을 설명하겠다. 제 팔 일에 드리는 것도 흠없음과 관련된다. 여기 팔 일에 드리라는 말을 여러분이 의미를 몰라도 된다. 왜 몰라도 되느냐? 22장을 보니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러니까 팔일에 드리라는것도 흠없는것과 관계가 있구나. 그냥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문맥을 봐야 한다. 그러면 왜 팔일에 드리면 흠이 없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를 낳으면 여기서도 팔일후에 드리라는 것은 수컷을 낳았을 때 하는 말이다. 물론 암컷도 팔일후에 드려야 되겠지만 수컷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 27절에 보면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면 칠일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수컷을 두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칠일이 지나면 팔일에 할례를 행하고 그렇게 하면 그는 여호와의 백성으로 드려진다. 팔일에 할례를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한마디로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짐승의 새끼도 수컷은 팔일 후에 드려라 그런다. 이것은 암컷도 포함된 말이다. 그런데 팔일에 드리는 것은 흠없음과 관련이된다. 22장 전체가 흠없는 것을 말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남아를 드리는 할례에 상응한다.
그 다음에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 이것은 암컷을 두고 설명한다. 28절 보면 암소나 암양을 몰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한 날에 잡지 말지니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어미와 새끼를 말하니까 암컷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는 것은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라는 말과 상응한다. 그것은 신명기 14장21절이나 또 출애굽기 23:18-19절 34:25-26절 거기 보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이렇게 드려라. 드리는 삼대 절기가 나온다. 3대 절기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리는 절기다. 그리고 초태생을 이렇게 이렇게 드려라. 초태생을 드리는 문제를 말하고 나서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하냐면 빈손 들고 나오지 말아라. 초태생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드리되 새끼를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강조되는 흐름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앞에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드리는데 있어서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그렇게 했을 때 만일에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앞에 풍성한 것을 드린다는 것이 강조점이다. 풍성한 것 그러니까 그것은 생명을 멸하는 방식이 포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미의 젖은 새끼를 기르는것이지 새끼를 삶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해서 풍성함을 따라서 드리는데 그 풍성함은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아버리면 그것은 풍성함이 아니다.

어미의 젖은 새끼를 길러야 풍성한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 초산물로 내게 드려라. 그러나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그런 문맥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드리는 문맥인데 여기서는 드리는 문맥이 아니라 흠없는 것의 문맥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흠이 없는가? 팔일 후에 드려야 흠이 없고 여기서는 같은 날에 드리지를 말아라. 같은 날에 드려버리면 어미와 새끼가 한날에 죽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생명이 멸하는 방식이다. 이 앞에는 풍성한 양식으로 드리는 것이 강조점이니까 남자는 삼대 절기에 나오고 초태생을 드려라 그런 문맥이니까 젖과 새끼를 연결시켰지만 여기서는 제물드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팔일후에 드려야 거룩하고 어미와 새끼와 같은날에 죽여버리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식탁을 풍성케 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드리지를 말아라. 그런것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제 전체적인 설명이다. 흠있는 재물은 생명의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국의 여호와께 서원을 갚는 극상품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식탁에는 반드시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된다. 왜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생명의 흠이 있는 것은 여호와의 식탁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은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흠없이 먹어야 된다. 누가 먹는가? 제사장 가문만 먹고 부정한자는 먹지 못하고 제사장일지라도 그리고 그날에 먹어야 한다.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이틀지 양식을 안 주셨다. 구약 때 이틀치 양식을 주신 것은 만나는 육일에 거둔 것은 제 칠일까지 먹었다. 이틀이 지나도 안 썩었지만 다른 날에 주신 만나는 썩어서 못 먹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제물은 당일에 먹어야 되고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만 이틀까지 먹을 수 있다. 거기가 식탁의 친교가 강화되어 있다. 나머지는 그 날에만 먹어야된다. 그러니까 구약 때 아무리 먹도록 주셨어도 그것은 그 날에 양식일 뿐이고 제사장에게만 주셨고 심지어 제사장 딸일지라도 다른 지파로 시집가버리면 제사장 가문의 것을 먹지를 못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러 간격을 두셔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께 나갈 때 흠 없는 것을 드려야 한다. 만일에 흠이 있는 것을 드리면 그것은 서원제에는 안 맞다.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극상품을 갚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로는 드릴수 있어도 서원제로는 못쓴다. 만일에 그것은 서원제물로 쓰면 말라기서에서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흠없는 것을 드리자니 얼마나 귀찮은고 하는 식으로 나를 멸시하면 너희들이 그것을 너희 관원들에게 드려보라 차라리 갖다주지 안했으면 괜찮겠지만 갖다주면 벌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내 상을 멸시하지 말아라. 말라기는 여호와의 제도를 멸시해버린 제사장의 타락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앞에 가져온것중에 특별히 흠없는 것으로 골라서 하나님의 상에 드려야 된다. 흠있는 것을 받으면 안된다.

이제 이것이 어떻게 신약에서 완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교회는 자기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리시고 하늘성소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안에서 그 몸을 향내나는 제물로 산 제사를 지내며 그의 상에서 그의 피와 살을 먹는 평강을누린다. 하나님이 옛 언약 경륜에서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하시고 그중에서도 제사장 가문을 구별하시고 그중에서 대 제사장을 구별하시고 그만 하나님의 상에 나와서 먹도록 했다. 안식일날 진설병을 먹는 것은 대 제사장이다. 그리고 어누 누구도 성소에 나와서 봉사하면 안된다. 이처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하는 생명의 관계를 한집에서 살고 한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에로 인치신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은 아직은 못들어가고 장자를 대신한 레위 지파만 성소를 봉사하는데 그중에 제사장만 단에 들어가고 성소에 들어가고 대 제사장만 성소의 진설병을 먹고 그런 방식으로 여러 간격을 두었다.

왜냐하면 아직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온전한 길이 열리지 안햇을 때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처럼 여러 간격을 두고 교제했던 그 간격을 완성하셨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휘장밖에 자기 대 제사장을 둔 그런 교제 방식이 아니다. 큰 아들을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상하방에서 아버지만 문 닫고 방에서 잡수시고 큰 아들은 그 앞에서 먹고 다른 아들은 저 마당에서 먹고 하는 그런식으로 먹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의 온전한 대 제사장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으셨는데 그것은 구약에서처럼 휘장으로 가리운 한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에로 구원하신 것이다.

이전에 휘장밖에 두고 먹도록 했던 이 관계를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관계로 완성시키셨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어른으로 기른 것처럼 휘장 밖에서 먹고 마셨던 것을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관계로 완성시키셨다. 어떻게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렇게 하셨다. 이 일을 이루셧다. 이제 예수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화목제물이신 예수는 하나님과 제사장의 친교의 식탁의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바로 이 예수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분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화목의 길을 열으셨는데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제는 땅에 속한 성소에 먹는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부활시키셔서 하늘 보좌에 올리심으로 이제는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관계를 열으셨다. 이제 교회는 예수 안에서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땅에 속한 것 모세에게 속한 것은 아무리 흠이 없어도 그런 것은 짐승의 흠이 없는 것 뿐이고 그리고 그 피만 하나님의 단에 드린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나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는 주지 안했다. 아직도 그런 친교의 간격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지 우리는 예수안에서 몸으로 향내하는 제물을 드린다. 거기는 장자와 차자의 차이가 없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없이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대표자에게 속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성소에 속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에서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제사장의 간격이 없는 것 만큼 제사장과 일반 백성의 간격도 없고 대 제사장과 일반 제사장의 간격도 없고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간격도 없고 레위 지파와 일반 백성의 간격도 없고 이제 모든 간격은 제거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빛가운데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도록 했다. 구약 때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와 기름을 주지 안했지만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라고 그렇게 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와 하나이니라 하는 생명의 관계로 영원히 교회를 거룩하게 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시면 그럴 것이다.

구약 때는 이런 저런 규칙을 지킴으로 그 거룩을 누렸다. 부정한 것을 안먹고 또 부정한 짐승을 안만지고 또 부정한 여자에게 장가 안가고 그런 방식으로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누렸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에 속한 새 백성이 되고 예수께 속한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는 썩어짐의 그림자가 없다. 그 확증이 예수님게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 일반의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이 먹으면 항상 식탁에 술이 있는 식이다. 먹는 것을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먹고 마시는 방식이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만 드렸고 고기만 일부 제사장이 먹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그런 교제방식으로 우리의 먹고 마시는 삶을 거룩하게 했다. 누구든지 예수안에 있으면 우리의 전 삶의 질서로 거룩한 봉사를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제는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들로 취임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적인 교제를 누린다. 이제 이것이 일단 적용되는 문구다. 단지 우리들이 이제 구약에서 하나님앞에 흠 있는 것을 드리면 하나님앞에 욕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 직접 적용시킬때는 구약 자체의 본문을 우리에게 직접 적용시켜 가지고 돈도 한쪽이 접어 졌으면 흠이 있고 하나님앞에 성의가 없고 그것을 다리미로 다려서 드린다거나 돈을 벌면 제일 새돈으로 골랐다가 내면 거룩하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러분이 구겨진 돈으로 헌금을 하는 것보다는 좋게 펴서 깨끗하게 쓰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 상식이다. 성경은 돈을 새 돈으로 내라는 등 그런 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한 생명의 교제로 주시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할것인가? 종교적인 의식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금 제가 했던 말은 정당한 상식적인 이야기다. 부활하신 예수안에서가 아니고는 흠없는 것은 없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혹 그 사람이 가난해서 다른 사람에게 얻어서 냈다고 해도 한쪽 모퉁이 찢어진 돈을 내다고 해도 그는 거룩하게 봉사한것이고 아무리 세상에서 신사여도 그가 예수를 안 믿으면 그는 부정한자요 저주받은 자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이제는 제사장과 백성의 차이가 업다. 왜 우리의 대표자인 예수와 우리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형제로 대표로 들어갔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신약 교회에 종교 의식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일반 상식에서 보았을 때 마땅히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정당한 믿음으로 살면 분별할 수 있는 이야기지 성경 본문이 우리의 종교적인 의식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려고 줄긋기를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주의 이름으로 수고하고 이익을 모인 것은 안식 후 첫날 곧 예수의 부활의 날에 주님의 상에 함께 가지고 나오고 우리의 일상 양식 생명의 선물을 하나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오고 그 상에서 생명의 친교로 먹고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생명의 선물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히 주신 것으로 형제를 몸으로서 구제하고 이런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냥 토요일 되니까 아 벌써 주일이 되었냐? 일주일 내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못살고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달력을 보니까 빨간 날짜가 있다. 아 벌써 주일이구나 그래서 부랴부랴 나오고 그리고 마침 부자라 은행에서 바꾼 새돈이 있어서 새 돈 내고 그런다고 해서 다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 것 외에는 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구약의 제사장은 흠이 있고 휘장밖에 있어도 신약의 백성은 흠이 없다. 왜 우리의 대표는 하늘 보좌에 나가셨기 때문이다. 그 교제로 우리가 먹고 마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흠이 없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운데 먹을수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을 말하는것이지 종교 에식을 두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여러분이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줄 때까지라도 실은 가난한 사람 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부자 주기도 어렵겠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면 꼴아버릴 수가 있다. 나를 무시하고 이것 준가 하고 미국 사람들이 구제를 많이 하고 욕을 먹는 것이 이 사람들이 찝차를 타고 가면서 휙 던져 준다. 우리 나라는 두 손으로 주어야 예의지 지나가다가 휙 던져 주면 이것을 불사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휙 던져 주면 받아 먹으면 그 만이다. 미국식으로 주면 한국 사람들은 아주 기분이 나쁘다. 우리가 누가 지나가는데 어이 받아 하고 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친한 친구이면 몰라도 가난하다고 그렇게 주면 받아도 기분이 나쁘고 더구나 어른 한테는 그렇게 주는 법이 없고 그럴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영역에서 정당한 예의를말하고 있는것이지 이것을 성경과 막 직접 연결시킨 것은 아니다. 각 나라 마다 물건을 주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방식은 윤리라는 것은 서로 관계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어서 주어야 되는 것이고 더구나 자기 보다 어떤 면에서 높다고 생각하면 나이가 많던지 상관이던지 무엇이 있던지 하면 정당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오히려 무엇을 주는 것이 실례가 되고 불쾌감을 사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교회에서 가르칠 것이 아니라 가정 교육에서 배울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미국은 미국식으로 배우면 된다. 성경은 우리의 구체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완전한 새로운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그 완전한 관계 아래서 마땅히 형제를 존중해야 되고 또 하나님이 주신 질서 안에서 정당한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을 교회에서 다시 가르쳐야 될는지 그것이 좀 답답한 일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그런다고 그런다. 우리 나라 교회가 목사는 존경하고 장로는 존경하지 않는다. 목사는 신학교도 나오니까 좀 괜찮은 것 같고 장로는 신학교 나오지도 않고 오래 다니다 보니까 장로 되었으니까 나도 몇 년 다니면 되겠구나. 그래서 그런지 별로 존경을 안한다. 우리 나라 교회 형편이 거의 목사에게 들어가 버린다. 아마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로한테는 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우리 전도사들은 그렇게 안 가르칠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설교해도 교회의 대표는 장로다. 그러니까 마땅히 존경해야 된다. 왜 직무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국민학교 나와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장로로 뽑았으면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열심히 가르치니까 성탄절 때 장로에게 선물을 많이 한 모양이다. 얼마큼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전도사한테는 입을 다 씻는 것이다. 왜 배우기를 장로를 존경하라고 배웠거든 그러니까 꼭 우리 아이들 비슷하게 되었다. 하나 시키면 그것만 딱 배우는 식이다. 저는 그런 예를 들어서 여러분한테 미안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연말과 연초가 되면 인사를 차릴 때가 많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특별히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 직무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목사는 생각이 나는데 전도사는 가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는 것이 그런 종교 의식을 배워서는 안된다. 마땅히 성도들이 서로 존경할 줄 알아야 되고 내가 연말이 되면 가난한 성도에게 선물할 것을 기억을 해야 되고 그런 일에 있어서 정당한 예의들을 갖추어야 된다.

그 은혜는 태평하게 산 것이 은혜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데 진정한 은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허물없이 사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있는데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예의를 지키면 숨 못 쉬게 갑갑한 줄 아는데 그것은 타락한 본성이 그런다. 정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만 상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준 것이고 그것이 정당한 우리가 차지할 위치다. 서로가 정당한 위치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이 주신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땅히 남녀간에도 예의가 있는 것이고 조심해야 된다. 그런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신령한 분별력으로 사는 한 면이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서로 존중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흠이 있는 것을 드리면 전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막 그렇게 적용할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헌 것을 목사에게 줄 수도 있다. 목사는 새것만 쓰고 제일 좋은 것만 쓰고 그런 이야기를 이 본문으로 인용하면 안된다. 헌 것을 쓰기도 헌것도 못 받으면 자기가 일해서 먹기도 하고 교회를 봉사하는 것은 월급제가 아니기 때문에 교인 없어도 혼자라도 할 것이다. 교회를 세워야 할 일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삶의 질서에서 정당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그 말이다.

여러분이 집에서 못 쓸 것 교회 가지고 와서 써도 된다. 교회는 꼭 새것만 있어야 되고 그런 말은 아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당한 질서에서 이것을 교회가 쓸 수 있는지 모르는지 그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분별해라 그 말이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고 성도를 그리스도안에서 귀히 여기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질서를 지키면 된다. 이 본문하고 그런 것하고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흠이 없는 제사장이 되었다. 우리는 흠 없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이제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로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영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린다. 바로 구약에서는 제사장을 휘장밖에 두시고 교제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우리에게 선물하셨다. 이것이 이 본문이 신약 교회에서 읽혀지는 방법이다.

구약 규례를 신약의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다 맞추어 버리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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