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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 (레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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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금 설명한 것은 이 성회에 대한 근본적인 것을 설명한 것이다. 성회는 무엇인가? 지금 이스라엘의 삶을 축제적인 삶으로 거룩하게 해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에 드리고 백성이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또 그 성회를 완전히 누리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 성회를 완벽하게 누리도록 그렇게 해주고 있다. 핵심은 절기는 가나안 땅을 완전히 성회의 삶 하나님 앞에 예배의 삶 축제의 삶으로 성화시킨 그런 규례다 그런 말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안식일은 그러면 어떤 의미로 복인가?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는 것인데 그것은 칠일 주기의 예배일이다. 그 연중 절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기한에 미쳐서 그런 말은 아니고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절기는 이러하니라 그런 말만 있지 기한이 미쳐서 그런 말은 없다. 왜냐하면 칠일 주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칠일에 쉬셨다. 여호와의 안식일에 참여하는 안식일이다.

그 다음 기한이 미쳐서 지키는 연중 절기는 일월 달에 지키는 칠일 절기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시작이고 일월 달의 완성은 오순절이다. 물론 오순절은 일월달은 아니다. 칠칠사십구 하면 한달이 훨신 넘어가버린다. 그런데도 초수절의 완성이 오순절이다. 첫 단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수확하고 그리고 수확하고 나면 칠칠은 사십구 오십일에 누룩 섞은 떡을 드린다. 누룩을 섞은 것은 이럴때는 안식이다. 편안히 누룩을 섞어서 부풀려서 떡 두 개를 드린 것이다. 그러니까 일월달에 속한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월달에 기한에 미쳐서 지키는 연중절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순절이다.

그리고 칠월에 절기가 강조되는데 모세에게 이르셨다 하는 말이 칠월 절기에는 항상 앞에 붙어 있다. 칠일 절기인 초막절이 칠월 절기의 완성일뿐만 아니라 모든 절기의 완성이다. 그런데 오순절과 속죄일과 초마절은 말씀하신 형식이 비슷하다. 대대로 지키라 하는 말이 있고 뒤에 부과적인 언급이 따라 있다. 해석하기 전에 구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23장에 절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구체적인 설명에 들어가서 이제 어떤 형식으로 이 본질을 설명하는가? 먼저 구조 파악을 했다. 이제 해석을 하겠다. 그러면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의 안식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무교병을 먹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자기들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지만 거기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뒤로 돌려져 있고 먹으라는 말이 항상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무교병을 먹는 것이 유월절과 무교절 성회의 본질이다. 초실절은 안식후 첫날 첫단을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이 새 양식을 먹는 것이 초실절이다. 그 날은 그것 먹는 재미로 흠뻑 젖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초실절에는 안식하라는 말은 없지만 전체적인 문맥으로 봐서는 그럴 것이다. 그 다음에 오순절은 이 안식으로부터 일곱 안식일을 계산해야 된다. 그리고 안 식후 첫날이기 때문에 초실절이 안식후 첫날 첫단을 드렸던 것처럼 일곱 안식후 첫날 새 소제를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실은 초실절의 완성이다. 오순절은 새 소제로 누룩섞은 떡과 함께 여호와께 많은 화제를 드려야 된다. 본문을 보면 암양 일곱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숫소 하나를 드리고 드린 예물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도 다른데는 소제나 전제 이런 말인데 여기서는 누룩섞은 떡 두덩어리를 구워서 드려라. 다른데서는 누룩섞은 떡을 못드린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누룩섞은 떡 두 덩어리를 드린다.이것은 새 소제를 하나님앞에 드리고 백성도 먹는것인데 이것은 안식의 완성이다. 편안히 먹는 것이다.

나팔절은 칠월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절기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 나팔절이다. 여기서 직접 월삭절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달의 첫날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은 민수기에 나와 있지만 여기 레위기서는 직접 언급은 안한다. 그런데 칠월 1일 그 달 일일 여기서 표현은 칠월 일일 곧 그 달 일일로 해서 칠월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칠월 달을 그들에게 거룩한 달이다. 일월달이 구속 때문에 하나님 앞에 첫달로 되었지만 그런 의미로 칠월달과 일월달이 서로 상응하는 구조다. 칠월달이 일반 달력으로는 거룩한 설날이다. 그러니까 모든 월삭을 기념 했던 것처럼 칠월일일은 그런 의미로 모든 월삭의 머리다. 그러기 때문에 칠월 일일 곧 그 달 일일을 나팔을 불어서 기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절기에 예물에 나팔은 분다. 그 나팔 부는 것은 시내산 나팔 부는 것이 항상 모델인데 나팔 부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강림하시고 함께 계신다.

그들이 제물위에 나팔을 불면 하나님이 거기 강림해 계신 것이다. 그런데 첫달에 그러니까 그들의 일반 달력으로 새해 첫날 일월 일일에 그런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칠월 일일 곧 그 달 일일에 나팔을 불어서 기념해라. 이것은 모든 달의 시작의 달로 기념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달의 시작에 그들의 예물위에 임하신 것을 기념해서 나팔을 불고 화제를 드려야 된다.

그리고 속죄일은 스스로 괴롭게 하고 속죄함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그 날은 굶어라 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한다. 괴롭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하루종일 안식해야 한다. 괴롭게 하는데만 모든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날은 속죄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속죄일에 어떻게 제사하는가 여기는 안 나와 있다. 그것은 16장에 나와 있었다. 여거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축제의 절기인가 하는 것인데 실은 속죄일도 축제다. 왜 그들이 속죄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날은 전적으로 굶어야 한다. 만일에 그 날에 굶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다른데서는 그날 안식을 범하면 죽인다는 말이 직접 없다. 그런데 그날 안식을 범하면 죽인다는 말은 어디가 나오냐면 이 속죄일에 있겠지요? 다른데는 그날안식을 범하면 죽인다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속죄일에는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길을 위한 속죄일이었기 때문에 만일에 그날 그 일을 위해서 전념하지 안했으면 그는 그 교제로부터 끊어지기 때문에 죽인다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핵심은 그 날에 속죄하는 일이 핵심이다.

그 다음에 초막절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는 것이 중심이다. 칠일 동안 지켜야 되는데 36절에 보니까 화제를 드려라. 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을 앞세워 놓고 그 다음 39절 이하에서는 초막에서 함께 즐거워해라 그런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초막절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며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한 것을 즐거워하며 매년 칠일동안 초막에 거하며 대대로 기념하는 것이다. 다른 절기는 매년 지켜라 이런 말은 없다. 매년 절기인데도 그런데 여기서는 매년 지켜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초막에 일주일 동안 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그 완성을 소망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절기의 완성을 초막절에다 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모든 것을 하늘에 속한 안식과 교제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온전히 주셨다. 교회는 주의 상에서 주의 몸에 참여하며 그 몸의 지체를 봉사한다. 여기 22절에 오순절을 보면 곡물벨 때 하는 이야기가 있고 26절에 속죄일도 32절에 보면 쉴안식일이니 덧붙여 있는 말이고 그리고 초막절은 무엇인 덧붙여져 있냐면 전체적으로 39절 이하도 덧붙여진 말이 된다. 왜냐하면 37절에 절기는 이러하니라 결론은 내려버리니까 그렇다. 그런데도 41절 너희를 칠월달에 이 절기를 대대로 지키라 하고 나서 칠월에 지키라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난자마다 초막에 거하라 하는 말이 덧붙어 있다.

이 덧붙어 있는 말이 절기들을 강조하는 말들이 된다. 여러분 부모들도 말씀하실 때 그런다. 말 다해서 문 열고 갈려고 하니까 야 너 잘 알았지? 정신 똑똑히 차려라 그 말이 강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대대로 지키라는 말이 있어 놓고 뒷말이 덧붙여져 있다. 그러면 오순절에는 실은 첫 수확을 마치고 누룩을 섞어서 편안히 부풀린 떡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떡 두덩어리를 드리는 것은 항상 증거의 떡이다. 열두덛어리 떡을 안식일에 드린 것은 24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의 완성을 나타내 보인것이고 여기서는 그런 의미보다는 증거의 떡인데 두덩이를 드리는데 누룩 섞은 떡을 드린다. 그것도 어떤 의미로 안식을 일곱 번 채우고 난 안식후 첫날에 드린다.

안 식후 첫날 하는 것은 항상 새로운 시대의 양식을 말하는데 새 소제인데 안식이 지나면 항상 새로운 날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첫 이삭은 안식후 첫날 드리고 그리고 오순절은 칠 안식일을 계수하고 나서 안식후 첫날 드리고 그런 의미로 안식의 완성이기 때문에 누룩섞은 두덩어리를 드린다. 그렇게 해서 수확을 그들에게 주신 안식 새 곡식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 앞에서 드린 것을 말해놓고 나서 그 다음에 강조점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순절에도 하나님 앞에 새 곡식을 드리고 그리고 백성들이 자기만 풍성히 먹는 것이 아니라 고아나 객이나 과부까지라도 자기 밭에서 즉 하나님의 밭에서 먹을수 있도록 남겨라. 즉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새로운 곡식을 풍성히 주는 것이 오순절에 핵심이다.

그런데 속죄일을 보니까 31절에 대대로 지키라 해 놓고 이날을 쉬어야 한다. 이날은 괴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 쉬어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이날은 괴롭힘을 위해서 쉬는 날이다. 그 괴롭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속하기 위한 괴롭힘이라고 16장에서 말씀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 날 그들은 하루종일 굶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쉬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초막절이 완성인데 35-36절 보면 풍성히 드린다. 첫날만 칠일 동안 한 것이 아니라 칠일후 팔일 까지 한다. 유월절은 칠일절기인데 초막절은 팔일절기다. 칠일을 다 끝마치고 나서 팔일 이것은 실은 안식후 첫날과 관계된 날이다. 칠일이 끝나고 나면 팔일도 큰 축제로 지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축제의 완성이면서도 새 시대의 축제를 여전히 예상하고 있다.

백성들은 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많은 예물을 드려야 한다. 37절에 전체적인 결론이 되면서도 특별히 초막절에 결론으로 하는 말이 많은 예물을 드려라 하는 말이 37-8절에 강조해 놨다. 그렇게 되어 있다. 안 식후 무엇에 무엇을 드려라. 그런 말로 전체적인 말로 결론이 되면서도 초막절에 결론을 그렇게 해놓고 나서 그 다음 39절에 초막절을 또 다시 언급한다. 오순절이 속죄일보터 훨신 길게 덧붙이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더하고 있냐면 칠일동안 지키는테 첫날도 안식하고 팔일도 안식해라. 첫과 마지막을 안식하며 전체가 안식의 의미다. 그리고 첫날에 초막을 지어야 된다. 아름다운 나무 실과 그러니까 주렁주렁 과실이 붙은 나무다.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버드나무 가지 그런 것으로 집을 지어놓고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 해야 한다. 우리들은 이것을 그전에는 즐거움으로 알지를 못하고 괴로움으로 알았다. 첫막에 사니까 얼마큼 괴롭겠냐?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꼬 그렇게 해서 초막은 임시 처소고 자기 집은 영원한 처소고 그래서 땅에서는 나그네요 집으로 들어갈날을 기다려라 했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여기서는 초막에서 즐거워하라 그랫다.

왜 광야에서 하나님이 초막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셨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할 때 초막에서 그들을 즐거워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칠일동안 즐거워 해라 칠일동안 즐거워하는 것은 완전하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팔일에 한 번 더 쉬고 즐거워해야 한다.
매년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키는데 대대로 지키라. 그리고 나서 42절에 또 강조점이 붙어 있는데 칠일동안 칠월에 지켜라. 칠월에 이를 지키되 칠일동안 지켜라. 이스라엘에 난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할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줄을 알게함이니라. 즉 가나안 땅에서 애굽에서 구원을 함께 기념하고 즐거워하는 절기로 기뻐해라 그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내서 함께 초막에 거하게 하시고 즐거워하게 했는데 그것을 가나안 땅에서 함께 기념하면서 매년에 기념하면서 대대로 기념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라. 그런데 여기 보니까 팔일 절기여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칠로 완성만 되지 않는다. 항상 새 날이 되면 시 시대가 창세기 원리다. 그래서 팔 일에도 안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가나안 땅애 들어가서 새로운 곡식을 주시고 첫 곡식을 거둘때도 그는 즐거워해야 되고 그리고 연말에 곡식을 다 거두고 나서도 하나님앞에 즐거워해야 되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주신 선물로 하나님의 식탁에 드려야 되고 자기도 먹고 함께 즐거워 해야 되고 그런 축제의 삶을 살아라 하는 것이 레위기 23장의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의 수확과 연결이 되어 있다. 처음 그들이 무교병을 먹었을 때 그들은 바로의 종으로 먹지 않고 여호와의 종으로 먹는 것이고 그것의 완성이 가나안 땅의 안식의 양식이다. 그래서 첫 수확과 수확의 마지막에 큰 축제의 절기가 있다. 칠월 달에는 이것이 완벽하게 셋트로 있어서 일일날은 달의 기념일로 기념하고 십일은 하나님의 성소를 속하는 날로 기념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함께 계신 것을 성소의 축제로 기념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소에서만 기념한 것이 아니라 초막에서 기뻐한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서만 예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도 십일조를 객들과 함께 먹도록 하셨다. 성소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들이 거하는 각처에서 초막을 짓고 거할 수 있으면 이것은 성소가 온 땅에 확대된 의미로 즐거워한 것이다. 왜 광야에서 초막에 계셨던 분이 가나안 땅에 성소에 계신다. 이제는 성소에서만 이 축제는 지낸 것이 아니라 칠월 십일에 대속함이 있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온 가나안 땅에서 즐거워하도록 각처에서 초막을 짓고 즐거워해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것이 축제의 완성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이 축제가 이 절기에 맞추어져 있다. 반복적인 칠일주기인 안식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쉬심을 그들의 삶의 모델로 삼아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그 일하신 목표에서 하나님과 함께 쉬고 만일에 그 날 쉬지 않으면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되고 다른 데서는 죽인다고 그랫다. 그렇게 즐거워해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양식을 주셨으면 그것을 먹는 일에 전념하고 다른 일은 잊어 버려야 된다. 왜 완벽한 안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부 새 양식 주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가나안 땅의 수확의 절기와 일치되어 있다. 모든 날에 드렇게 한 것은 아니다. 하늘에 만나를 그치시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땅에 산물을 주신 것이 구약 경륜에서 구원의 완성이다. 가나안 땅을 젖과 흐름으로 복주신 것이 구약 경륜에서 구원의 완성이다. 그런데도 이것은 땅에서 수확하는 절기에 맞추어져 있고 다른 날은 이런 축제를 못 누린다. 그것이 구약에서 누리는 축제다. 그들은 이 기념일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함께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상에 드리고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다. 이렇게 교제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누렸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일은 일체 하지 말고 그 일에만 전념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곧 그들의 생명의 완성이고 그들의 안식이다.

그런데 이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완성적으로 주셨다. 이것은 구약 때는 완성될수 없는 것이다. 구약 때는 모세 제도이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이것을 완전하게 지켜봤자 그것을 그만 지켜라 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특별히 대속죄일에는 다 굶어라 그런다. 하나님앞에 속함을 얻었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었던 것이 구약의 교제의 본질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나갔을때도 굶었다. 아무런 교제의 떡을 주지 않았다. 왜 나아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부 축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죄를 속하는 십일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교제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절기들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식은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이 누리는 안식이다.

구약 때는 모세를 대표로 세우고 모세 제도 안에 있는 복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우시고 아들안에서 누리는 교제다. 구약 때는 모세가 누린 것을 백성이 누리는 것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린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아들은 가나안 땅의 성소의 교제가 아니라 그 아들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았다. 그분은 우리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떡과 포도주를 자기 백성의 교제의 식탁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반복되는 칠일 주기로 누리는 그런 안식이 아니라 역사의 완성에서 누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안식이요 우리들은 먹으면 뒤로 나오는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받는 것은 내 살과 피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교제하는 생명의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받았고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상에 드리고 그것을 주님의 상으로부터 받고 그것으로 형제를 먹이고 그런 교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은 성찬 예배다.

천주교가 항상 반복되는 제사 의식으로 성찬을 설명해 버려서 우리들은 그런 의식을 뺄려고 그러지만 구약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성소에 가져다 그리고 그 성소에 있는 것으로 제사장이 먹는 것이 오순절이다. 특별히 화목제물을 그렇게 되어 있다.(20절) 화목제물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려야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 드린 성물이기 때문에 제사장 몫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제사장 몫이다. 구약에서도 성소 교제 가나안 땅의 산물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불렀을 때도 죄인과 함께 먹는 신랑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제사를 반복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살과 피 구약 때는 그런 것을 주신 적이 없다. 그것으로 우리들은 우리의 먹고 마심을 복받았다.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식탁이 그런 식탁이다. 우리는 그런 산물로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주님께서 생명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주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주님의 몸이 바로 그 몸의 교제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구제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배의 본질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핍절함이 없고 풍성히 먹었다.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오순절에 나타나 있다. 가난한 자를 먹여라. 거기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초막절에서는 온 땅이 초막 성소가 되어 있다. 그렇게 풍성히 누려라 그렇게 되어 있다. 더 완성적으로 되어 있다. 이제 신약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그의 살과 피 그것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어서 구약적인 개념이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구약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주시는 생명의 선물을 최상품으로 골라서 그것을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단에 드리면 그 피가 나아가는 곳까지가 그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누리는 교제다. 그러니까 먹는 것과 생명이 일치되어 있는데 아무리 좋은 것을 주셨어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단에까지는 못 들어간다. 일단 죽고 나면 뿌려지고 뿌려진 거기 까지가 제사장이 나가는 곳이다. 이처럼 죽음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헌신 죽지 않고는 못나간다. 휘장은 죽음의 가리움이다. 죽으면은 들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데도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맛보시고 그는 성령으로 흠 없게 된 자기 피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신 분으로 성소에 나아 가셨거든요? 바로 새로운 생명이 헌신된 거기까지 자기 백성을 대신한 생명이 헌신된 거기까지 그의 백성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안에서 우리는 그가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그런 교제로 주님의 살과 피에 교제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새 양식을 받았다. 이것은 완전한 안식의 떡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하고 먹지 못하고 먹으면 부정하게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은 다 부정하게 먹는 자요 만일에 구약식으로만 먹어도 다 부정하게 먹는 자이다. 우리는 먹을 때마다 성찬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나를 위해 몸을 주신 주님께서 이것을 양식으로 주셔서 주님의 몸의 교제를 누리도록 주셨다고 주의 몸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지 교회에서 먹는 것은 거룩하고 집에서 먹는 것은 대충 먹고 그런 식으로 먹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것은 주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와서 주님의 몸으로 삶으로 주신 것을 우리가 풍성히 누리고 우리가 이 삶을 하나님 앞에 교제하기 위해서 모였나이다. 주님이 그의 몸을 주셔서 그의 부요에 참여시킨 이 주님의 몸으로 가난한 자도 부자가 가지고 그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자기 집에 가서 까지 먹을 수 있도록 풍성히 주어서 하나님 집에서 먹는 부족함이 없는 교제가 자기 집에서도 누려야 될 것이다. 아버지 상에서 먹을 때는 야 닭다리 먹어라 주어 놓고 집에 갈 때는 너는 네것 먹고 나는 내것 먹고 그리고 가난한 집 옆에서 날마다 고기 구워 먹고 그러면 안될 것이다. 자기 아버지 앞에서는 효자인척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너 얼마큼 배고팠냐 많이 먹어라. 그래 놓고 자기 집에 가서는 안주면 안된다. 성소의 교제가 일반 식탁 교제에 나타나야 한다 그런 말이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와 구제와 항상 일치되었다. 오순절 예배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 앞에 풍성이 드리고 제사장만 먹는 것이 아니라 고아나 과부나 객도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밭에서 함께 거둬서 먹도록 해라. 그런데 거기서는 이삭 밭에 모퉁이것만 먹었다. 구약 때는 모퉁이만 베지 않으면 100점 짜리다. 이삭을 하나도 떨치지 아니하고 조심해서 베어버렸다. 그리고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안했다. 이 사람은 율법 지킨 사람이다. 깨끗이 베어 버렸다. 그런데 마치 보아스가 룻이 이삭을 주울 때 종들에게 대충 대충 베라고 명했었다. 그리고 나서 보리를 더 줬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소녀로 먹도록 해라.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내 풍성한 수확에 그도 걷도록 해라. 오순절 예배다. 그런 예배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의 교제에 참여한다. 그가 나를 사랑해서 부요하신 자가 가난하게 되어 자기 몸을 주셨으니 우리들도 우리의 부요한 것으로 형제와 나눠서 우리에게 몸을 주신 주님의 부요함에 참여토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자나 부족함이 없는 평균을 이루게 함이니라. 그것이 고후8-9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다. 돌아봐야 한다. 그러니까 일년에 한 번 라면 박스 들고 어디 갔다 와서 일년내내 양심의 위로를 받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여러분 친족한테는 절대로 그렇지 않는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일반 가정에서도 형제로 사는 방식이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행사를 치르는 집은 머리가 무거워도 그 가난한 친족은 그날에 풍성이 먹는다. 일반 연합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한데 왜 주님의 몸으로 사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면서도 우리에게 그런 의식이 부족해서 되겠는가? 단순히 조직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 하라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일상에 생활에서 감사한 생활을 살뿐만 아니라 예배의 모임에서 그것이 충분이 드러나줘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주의 몸의 교회가 주님께서 몸을 주신 그 부요함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여기 참여한 백성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백성들도 누릴 수 있도록 손을 펼쳐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의 의미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들어오더라 사도행전은 그렇게 전도를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교제 주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교제를 누리고 이제는 하늘에 속한 주님의 몸의 교제로 서로를 봉사하는 완전한 봉헌을 받았다.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향기로운 예배를 드리고 예수안에서 예수님 대리자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봉사한다. 왜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니까. 그것이 이 레위기에서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우리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 일에 전념하는 것이 실은 안식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의 상에 앉은 예배일로 모이는데 만일에 이 모임보다 필연적인 다른 할 일을 빼 놓고는 만일에 이 모임을 멸시하고 다른 일로 모여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것이 신약에서 주일을 지키는 방식이다. 구약에서 주일을 지키는 방식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 구약에는 강제력으로 쉬게 해서 강제력으로 주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의 몸에 참여하는 교제의 즐거움 안에서 우리들이 그 일을 완벽하게 누리고 그 완전한 소망 때문에 우리들이 전날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누리라 그 말이다. 이것이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성찬 예배다. 우리는 주의 몸의 참여 할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의 지체로 형제를 봉사한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 몸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신의 몸을 주신 주님의 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썩은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교제의 떡이다. 왜 주님께서 영원히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고 성경 본문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제가 말한 설명이 어떻게 그 문장에서 그렇게 조직화되어서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저는 문장을 읽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 자신들이 읽어서 아하! 비교해 보니까 여기는 축제가 강조구나. 한상에 먹고 마시는 교제가 강조구나. 이 교제가 어떻게 많은 절기가 있는데도 똑 같은 절기가 아니라 연중 절기의 발전에서 어떻게 그 축제를 강화시켜 났는지 봐야 되고 마지막 절기는 팔일 절기여서 새 시대를 소망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절기로 말씀하셨을 때도 항상 초막절의 완성자로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첫절기와 마지막 절기가 칠일 절기로 배열되어 있다. 일과 칠을 첫과 마지막 칠은 완성이다. 성경이 쉬워야 되는데 제가 쓰는 것이 성경보다 더 어려워 있다. 성경이 원조인데 우리를 사람을 의지하니까 안된다 그 말이다. 물론 교회 목사를 주셔서 우리로 장성한 분량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사자를 주신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각자 은사가 다르니까. 그러나 목사를 통하지 않고는 모른다는 의미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지나면 여러분이 충분이 읽을수 있도록 차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선지서들을 보면 이제는 회복된 새로운 다윗 왕국을 말한다. 북과 남은 망하고 남은 자를 구원한다 했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 유다 했을 때 그것은 북쪽만을 말하는지 남쪽만을 말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회복의 연합체를 말하고 있는지 그 문맥을 따라서 읽어야 한다. 본래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이름으로 칭하니까. 가령 우리가 서울이라는 말을 쓸 때라도 내용에 따라서 범위가 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우리들은 다른 절기 없다. 지금도 유월절 지켜야 되고 그런 일은 없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항상 하늘에 속한 잔치의 떡을 먹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모일 때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서 그런다. 그런 의미로 예수는 절기의 완성자시다. 단지 우리들이 지금도 맥추 추수 감사절 하고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풍성히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은 정상적인 질서다. 하나님이 풍성히 수박을 주셨는데 그것으로는 감사하지 않고 아 수박이 맛없다. 딸기가 생겼으면 좋을 것인데 하면 그것은 감사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절기를 더 많이 지켜야 될란가 모르겠다. 구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확이 두 번에 집중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달마다 수확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여러분이 풍성한 수확이 있으면 교회가 함께 참여하고 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 구약의 절기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 있는 절기의 정신 때문에 우리 일상적인 삶에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감사 절기를 지킨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는 삼대 절기를 지켜라 그 절기를 안 지키면 비 성경적이라고 우리를 공격하면 제대로 하자면 그들은 이단이다. 단지 모르고 그런가 보다 하고 정상참작 해서 우리가 참으니까 그러지 이론 그대로 하면 그 사람들은 이단이 된다. 왜 예수께서 절기의 완성자이신데 구약 백성들처럼 지금도 다른 절기를 통해서 완성된 절기를 맛이나 봐야 되는 것처럼 가나안 땅의 질서로 맛이나 봐야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축제의 떡을 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구약은 아무리 축제여도 먹으면 뒤로 나오는 떡이다.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니까 썩지 않는 양식이다. 지금 우리가 절기를 지키는 것은 구약 절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삶에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날마다 감사하면서도 풍성한 수확이 있으면 풍성함을 표현해야 되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추수감사절이 언제가 보자 그것 가지고 여러분이 계산을 해도 마누라 생일을 위해서 일년 동안 저축한 남편보다 정성이 없을란가 몰라도 정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월급을 받으니까 보너스 나올 때 다 써 버렸다가 마침 추수 감사절이 있는 달에 보너스가 안 나온 달이다. 돈이 없다. 목사님 말씀이 있는 은사대로 봉사한다 하더라. 하고 이제 조금만 한다 그 말이다. 나는 아주 성경적이다 하고 나머지 일은 일년 내내 계산하다. 계획을 세우고 여러분이 지금은 수확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들이 아직도 하나님이 주신 수확의 절기에서 살고 있는 그런 농경 문화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미리 예비하던지 하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절기 아니 더러도 가령 보너스 받을 때는 더 많은 감사가 있어야 상식이다. 더 잘 믿어라 그 말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식이다 그 말이다. 여러분 보너스 철에 돈을 더 많이 쓰지요? 더 생겼다고 그것은 정당한 상식이다. 그리고 돈 떨어지면 언제 보너스 나오는가 그 때 돈을 쓸려고 그런다. 그런데 왜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감사는 그런 생활이 안되는지 정상적인 삶의 질서로서 주의 교회를 세운다는 개념이 안서는지 그런데 그것을 빼버리고 보너스철에는 헌금을 더할 것 그런 규칙을 내가 여기서 다시 세울것인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도 풍성함을 따라서 가족을 해석하는것처럼 그 일을 위해서 세로운 질서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 마음이 모아져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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