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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 (민 28:26-31)

첨부 1


아주 맑은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들은 행복한 삶에 대해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간구했습니다. ‘저희들에게 왕을 보내 주십시오’
하늘은 연못에 커다란 통나무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개구리들은 통나무를 왕으로 섬겼습니다. 통나무 주변에 몰려드는 애벌레, 딱정벌레, 지렁이들이 모여들고 통나무는 큰 왕이 되었습니다. 이 벌레들은 통나무에 붙어서 아주 맛있게 통나무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들은 몇 달이 지난 후부터 반응이 없는 통나무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을 향해 빌었습니다. ‘좀 더 강력한 왕을 보내주소서’ 하늘은 연못에 식욕이 왕성한 큰 물뱀을 던져주었습니다. 개구리들은 물뱀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이겁니다. 이렇게 강한 걸 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날부터 물뱀은 개구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습니다. 몇 달 후, 연못에는 단 한 마리의 개구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오늘 인간들의 불평이 개구리들의 불평같습니다. 줘도 줘도 감사를 모릅니다.

감사란 무엇입니까? 감사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은혜를 주신 분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글자는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자들이 은혜를 주신 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사례하는 것을 말합니다.
‘광수 생각’의 한 토막입니다. 입시를 앞둔 학생이 수업 중에 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순간 학생은 당황한 기색으로 혼자 중얼거립니다. ‘아, 난 이번 시험에 떨어질 것이 분명해’그 때 곁에 있던 예수를 믿는 친구가 연필을 주워서 다시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너는 이번 입시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붙을 거야. 봐라, 연필이 바닥에 붙었잖아.’
보통 인간 생활에 감사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기 시작한다면 언제나 불평할 일이 더 많이 나옵니다. 불평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물뱀을 만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할 것들이 계속 생깁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정신 질환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신명기 16:16절에서는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절기가 4월에 부활절, 7월에 맥추감사절, 11월에 추수감사절, 12월에 성탄절이 있습니다.

맥추절의 의의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를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셨고,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서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 수확을 거둔 때에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생각하고 구속하심에 감사하는 감사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6:12절에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의 의미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에서 건져 주시고 멸망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억압하던 사악한 사단 마귀를 홍해 바다에 장사시켜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여 감사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받고도 안 받은 것처럼 오리발 내밀기를 잘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성입니다.
사람들이 왜, 감사하지 못할까요?
감사할 조건을 먼저 찾기 때문입니다. 조건을 찾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위나 며느리 얻고 100% 만족하는 사람들 보셨습니까? 혹 있겠죠. 과분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합니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해서. . ., 얼굴이 조금 못생겨서 . . . 조건 따지면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뭄과 더위가 계속되면 타 죽겠다고 짜증을 내다가, 장마철이 되면 질척질척하다고 불평합니다. 여름에는 더워서 못살겠다며 살고, 겨울에는 추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둘째는 감사할 일에는 감사하고, 불평할 일은 어김없이 불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를 따집니다. 구분합니다. 똑똑하다는 말을 잘 듣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분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치고 부유한 사람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넉넉함이 없습니다. 말은 잘 하는데 . . .

로마서1:21-23에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핑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1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주 만물 속에도 나타내셨고, 우리 인간들의 만나는 사건들 속에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게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인간들은 깨닫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불평할 이유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지금 불평하면 말이 됩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기업들에 파업이 일어나고, 실직자 문제, 신용불량자 문제도 그대로 남아 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합니다. 이라크 파병문제, 북한 핵문제 . . . 현실을 보면 정말 답답하고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지키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른 길로 인도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지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지만 변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주님의 섭리가 깨달아진다면 더 큰 은혜입니다.

(찬양)

2.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즉시로 응답을 주심도 귀한 은혜이지만 침묵과 더딘 응답 속에서도 깨닫는 은혜 받았다면 그것은 더 없는 축복 입니다. 가시를 뽑아 주심도 은혜이지만 박힌 가시 속에서 말씀하심으로 깨닫게 하신다면 그 가시는 오히려 갑절의 은혜가 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이와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주안에서 항성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독교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기쁨의 종교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는 감사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감사를 한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감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쁨이 없는 예배, 기쁨 없는 감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과 비교해서 감사를 드려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항상 기뻐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늘 미래 지향적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미지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과감히 떠났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향한 두려움 때문에 불평할수도 있었지만, 아브람은 불평없이 믿음으로 순종 했습니다. 경험도 없었습니다. 나이도 많았습니다.(75세) 그래서 핑계할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한번도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찬양나팔41)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 하신 주-오 신실 하신주-내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 속하셨던 주님-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과거에 함께 하신 하나님은 미래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일이 잘 안되고 꼬이십니까? 이 때가 바로 감사할 때입니다. 찬송할 때입니다. 기뻐할 때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럴수록 꼬입니다. 힘들어 집니다. 푸는 길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감사하며 웃으며 사는 사람에게는 신기하게도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신앙인의 영적 성숙도를 평가하는 가장 올바른 기준의 하나는 ‘감사’입니다.
크리스챤은 건강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질병 가운데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장사가 잘되고 수입이 좋을 때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가 안되도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고, 성공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 중에도, 역경 중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감사절은 매우 중요한데 감사절에는



1. 온 성도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식어지면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이기를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때의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배드릴 때 에배의 내용도 중요합니다마는 전 성도가 다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자리에 모두 모이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리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잘했습니다.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기적이 있었습니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것이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2. 감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의 의미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그 예물에 담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에 드릴 제물은 하나는 번제이고 하나는 소제입니다.
번제는 생명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소, 양, 비둘기. . .
이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번제로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생명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합격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오, 죽은자를 살려 내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시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제물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소제는 번제와는 달리 땀흘려 농사하여 지은 곡식을 추수한 것을 드리는 제사인데 생명을 나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듯이 농사짓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농사는 계절과 자연의 힘과 직접적으로 관계됩니다. 농사는 하나님이 잘 되게 해 주셔야 합니다. 농부가 땀흘리고 일하지만 일의 댓가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는 것입니다. 사업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게 하시지 않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워도 소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 시편127편

소제는 하나님의 삶의 주관자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물입니다. 마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여러분,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건강을 되찾기도 하고,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서 깨어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더 큰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감사는 억지로라도 하면 유익합니다.
30절 31절을 보세요.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맥추절 제물로는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평상시 매일같이 드리는 제물도 그대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맥추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평소에 드리던 상번제인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이런 죄 회개는 평소에 늘 감사해야 할 제목들인 것입니다.

맥추절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번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살 수 있음에 감사(소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교만의 죄를 범한 것을 잊지 말고 회개하며 예물(속죄제)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물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감사의 마음의 표현은 성도의 믿음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다운 감사의 표현을, 성도는 성도다운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감사생활은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요, 명령입니다.
자동차 밧데리가 힘을 잃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서비스 자동차를 불러서 밧데리 점프를 하면 밧데리가 살아납니다. 시동이 걸립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사가 사라졌으면 때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억지로라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기도의 생활을 하면 다시 불이 붙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죽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신학대학의 학장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그런데 사모님이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사모님은 감사를 쓰다 보니 과거의 은혜가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감사를 하십시오.
감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병입니다. 저주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는 불신앙인으로 감사함을 잃어버리는 메마른 심령으로 저주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감사를 잊은 자를 찢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맥추 감사절에 여러분들의 마음에 감사가 회복되고 감사가 찬양으로 이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임경택 목사 (종로교회)
 (2005-06-2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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