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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할머니들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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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고독을 `빗살이 다빠진 머리빗'으로 비유한 것은 프랑스 시인 발레리다. 늙어 가면서 친구-친지-일-돈-성욕-지위-미래-희망 등등이 낡은 머리빗의 빗살처럼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 언젠가는 빗살 없는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는 허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섣달 그믐날 81 세 된 쌍둥이 할머니가 고독을 참아내는 데 한계를 느꼈다는 유서를 남기고 나란히 자살했었다. 엊그제는 가평의 한 할머니가 유산을 불우 어린이들에게 남기고 목숨을 끊고 있는데, 이 역시 소외감과 고독감에 패배한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 짧은 여생을 끊는다는 것은 빗살 없는 빗으로 빗질하고 있는 허무감을 감당하기가 얼마나 벅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옛 전통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더라도 가족적으로는 수용되어 고독감을 느끼지않고 아들-손자 손잡고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일련의 할머니들의 잇단 자살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당하고 있는 개연성의 증거로서 자살아닌 간접 살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살아냈던 안네 프랑크도 함께 수용되었던 언니가 어 느날 발진티푸스에 걸려 침대에서 떨어져 죽은 직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죽고 있다. 수용소에서 수용된 사람들은 모두가 재산도 몰수당하고 지위며 희망이며 아무것도 없는 빗살 빠진 빗과 같은 상태다. 조금만이라도 연줄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손에 손을 잡고 그 손 틈에서 느끼는 애오라지 훈김으로 살아 낸다. 유태인으로서 더불어 수용되었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수용소 생활에서 육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넋을 잃고 죽어 간 많은 케이스를 학회에 보고하고 있다.
1944 년이 저물 무렵 수용소에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나고 유태인들은 모두 석방된다는 희망적인 소문이 나돌았었다. 한데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정월이 됐는데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수용소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아무런 기대가 없었던 때에 죽어 나간 수의 1 배나 죽어 나갔던 것이다. 프랑클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도 그 무렵 사경을 헤맸지만 이 참담한 모습을 관찰하여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죽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고. 이처럼 애오라지 오가는 육친의 정이나 회색 빛일 망정 눈곱만한 희망없이는 살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역전에 자살한 한 할머니가 죽을 마음을 먹게 된 동기가 생각난다. 독방을 달라고 졸라대는 손녀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참으라고 타이르는 것을 엿들은 순간이었다고 써 남긴 것을 보았다. 할머니들의 자살은 이처럼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고 있는 간접 살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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