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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인의 성 (창 04: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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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6-26) 가인의 성 (200

4.

1.2

5. 주일. 열린교회)

 인간의 타락은 그 얼굴을 하나님에게서 떼고 짐승에게로 돌린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떠나 짐승의 생각을 따르는 비참한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보다도 못한 자리로 타락했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해주는 것은 가인이 그 형제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창 4:8). 타락한 인간은 심지어 형제를 살해하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상은 이 정도로 멈춘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인간의 타락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가인과 라멕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인과 라멕은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가인에게서 라멕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라멕도 자신을 가인과 비교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24). 우리는 본문이 들려주는 가인과 라멕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이 타락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가인 (16-18)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와의 앞을 떠났다' (16)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앞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더 이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렸습니다. 가인의 이러한 모습은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와 비교해 볼 때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기는 가인도 아담이나 하와와 마찬가지였고, 결국 가인은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의 동편이라는 비슷한 환경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창 2:23-24; 4:16).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난 자리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에덴 밖에서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창 4:1)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에녹을 낳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면적으로 볼 때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그의 아내의 행동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으면서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을 생각하였지만 (이것은 후에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라'), 가인과 그의 아내는 에녹을 낳으면서 하나님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고백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인은 아담과 전혀 다른 길을 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의 외면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행동 뒤에 숨어있는 생각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생각으로 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자신을 위한 생각으로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락한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최고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WF LC 1).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은 비슷한 환경에 거주하였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기억하였고 가인은 하나님을 망각하였습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어디에 거주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거주하든지 하나님을 기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비록 놋 땅 (방황)에 거주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도 하나님을 기억하면 행복한 사람이지만 (히 11:8-16),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성전에 살아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삼상 2:12-17).
 타락한 인간으로서 가인의 두 번째 모습은 자식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가인은 자식에게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가인은 에녹을 낳은 후에 성을 쌓았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쌓은 성에다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17b). 이것은 추측컨대 가인이 자신의 성을 에녹에게 물려주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자식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이 에녹에 대하여 가진 생각은 물질적인 것일 뿐이지 신앙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에녹에게 성을 물려줄 생각은 했지만 신앙을 물려줄 생각은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에게도 자식은 우상처럼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자신이 쌓은 성에 아들의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가인은 아들의 이름을 남길 것은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남길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자녀에게 물질을 물려줄 생각은 하지만 신앙을 물려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려 합니까? 물질입니까 아니면 신앙입니까?

 가인의 아들 에녹은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신앙도 유산으로 물려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의 아들 에녹은 전혀 신앙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가인의 아들 에녹 외에 또 다른 에녹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셋의 후손인 에녹입니다 (창 5:21-24). 이름으로 볼 때 가인의 아들 에녹과 셋의 후손인 에녹은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셋의 후손인 에녹은 일생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아들 에녹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좋은 이름을 가졌지만 가인에게서 아무런 신앙을 물려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가인의 자손 라멕(19-24)과 셋의 자손 라멕(창 5:28-30)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현격합니다. 셋의 자손 라멕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노아라고 부르면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 5:29)고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름이 같다고 해서 삶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도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도시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인 가인이 보여준 세 번째 특징입니다. 본문을 가인이 성을 쌓았다고 번역하면, 가인이 원수를 막기 위하여 자기의 영역을 확보했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가인은 '나를 만나는 모든 자가 나를 죽일 것이다' (창 4:14)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을 쌓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을 쌓은 행위는 폐쇄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조금 넓게 해석하면, 가인이 도시를 세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에게서 도시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도시문화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가집니다. 가인의 도시문화의 문제점은 라멕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본문은 가인 이후 네 사람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건너뛰고 라멕의 삶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가인-에녹-이랏-므후야엘-므드사엘-
 ┎ (아다)┎야발: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
라멕┨ ┖유발:수금과 퉁소 잡는 모든 자의 조상
 ┖ (씰라)┎두발가인:동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나아마



2. 라멕 (19-24)

 라멕에게서 절정에 다다른 가인의 도시문화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19). 라멕의 두 아내의 이름은 아다와 씰라였습니다. 이것은 라멕이 하나님의 원칙을 깨뜨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2:24).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오직 한 여자만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말 2:15). 타락한 인간의 문화는 음행으로 대표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에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 번째 계명을 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소설이나 영화와 TV에서 음행에 관한 이야기는 공공연하게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야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음행을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금에는 음행이 쉽게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이런 정당화가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와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율이 무척 높아지고 말았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스르는 길을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의식 속에 녹아진 음행의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라멕의 또 한 가지 무서운 죄악은 살인이었습니다. 라멕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고... 소년을 죽였도다' (23). 라멕은 사람을 죽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 죽인 것을 자랑삼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라멕은 자신의 살인행위에 관하여 아내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23).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추악한 모습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여섯 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멕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반역하는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면 라멕은 왜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가 상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나의 상함을 인하여' (23). '내가 사람을 죽였고... 소년을 죽였도다' (23)라는 라멕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어떤 소년이 라멕에게 상처를 입힌 것 같습니다. 소년에게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라멕의 상해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이 소년의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라멕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큰 문제점 중에 하나는 용서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회는 용서가 없는 사회입니다.

 라멕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소년을 용서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라멕이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라멕은 가인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칠 배의 벌을 받아야 한다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마땅히 칠십 칠 배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3). 타락한 인간은 용서할 줄 모르고, 타락한 사회는 용서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라멕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용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타락의 표시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 18:21-22).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가인에서 시작된 타락한 도시문화의 문제점은 라멕의 자녀들에게서 극한에 도달하였습니다. 타락한 도시문화는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인간에게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라멕의 자녀들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0-22). 야발은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0),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1), 두발가인은 동철로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습니다 (22). 그들로 말미암아 건축과 목축, 예술과 기술이 발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생활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고 재미있고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도시문화의 문제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중심의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물론 가인의 후예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므후야엘과 므두사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자 [Theophor]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라멕의 자녀들이 이룩한 문화에는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하나님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위한 문화를 만드는 데 몰두하여 하나님을 위한 문화는 하나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셋의 계열에 서 있는 사람들의 행위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25-26). 셋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은 비록 인간을 위하여 아무런 문화사업도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으로 불렀더라' (26).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찬란하게 인간의 문화를 건설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거룩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 문화의 과업보다 하나님 영광의 실현이 우리의 관건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문화에 속해 있습니까? 인간의 문화에 빠져들어 하나님의 문화를 상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난 현상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오늘날도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인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셋의 길을 갈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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