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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창조 (창 01: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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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간단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답변하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가 소모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노력이 시도되었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가진 이래로 지금까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앞에 서 있는 스핑크스가 나그네에게 물었던 질문을 연상시킵니다. 어릴 때는 네 발로, 젊을 때는 두 발로, 늙어서는 세 발로 다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인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전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아직도 철학에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시간이 흐를수록 철학은 인간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풀었다기보다는 더욱 미궁으로 빠뜨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특히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는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답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창세기는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진술하고 난 다음에 얼마 되지 않아서 인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어쩌다 보니 생긴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인간의 유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단지 우연한 존재로 설명하려는 모든 종교와 철학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인간을 하나님에게 종속시키고 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철학과 사상이 인간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인간이 비참한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영광스런 존재인지 강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으로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자연과의 관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영광스럽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납니다. 인간이 영광스러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연과 다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과 다릅니다. 인간은 자연가운데서도 특히 동물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서로간에 넘어설 수 없는 구별이 결정되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창조의 순서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과 인간을 다른 순서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동물을 만드시고 (24-25), 이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26-27). 이것은 인간과 동물이 엄격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동물이 인간이 될 수 없고, 인간이 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동물이 인간이 될 수 없듯이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이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이 동물처럼 되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광을 저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은 결국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마저도 썩어질 사람과 조류와 짐승과 벌레의 모양으로 바꾸어버리고 맙니다 (롬 1:23).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최대의 문제점은 동물처럼 되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해서 보면 인간이 동물처럼 되어버리려고 하는 것보다 더욱 악한 일이 없습니다.

 이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창조의 방식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종류대로' (24,25) 만드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26,27)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동물이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에서 비교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선 육축과 기는 것과 짐승 같은 모든 생물이 서로간에 다르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며 (24), 또한 육축은 육축대로, 기는 것은 기는 것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서로간에 다르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25). 한 마디로 말해서 동물은 서로간에 수평적인 관계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상응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동물과 비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오직 하나님과 비교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동물이 서로간에 수평적 비교물로 창조되었다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직적 상응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해야지 동물과 같아지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대신 동물에게 호감을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동물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창 3:1-7).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함으로써 스스로 동물적 인간이 되려는 것을 방지해야 하며, 또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는 것을 항상 상기함으로써 (26,28) 타인을 동물적 인간으로 만드는 일을 방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을 다스릴 권세는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동물처럼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타인을 동물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 (예를 들면, 멸시와 착취)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서운 범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영광스럽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찬란하게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창조와 관련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26,28,29):

창조 (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26)
축복 (28) '하나님이 복 주시며 이르시되' (28)
선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29)

이 가운데서 첫 번째 말씀인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창조의 계획 (26)과 실행 (27)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인간창조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으로'와 '대로'는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또는 모양)과 관계합니다.

그래서 인간창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인간을 생각해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광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할 때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가장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으면 영광스럽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으면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항상 하나님과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머무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항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의 형상 (또는 모양)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형상을 관련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인간창조에 관련시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에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관련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상과 모양은 가장 닮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가인과 아벨 이후에 셋을 낳은 사건으로부터 잘 입증됩니다. 아담은 '자기 모양으로 자기 형상대로 아들을 낳아' (창 5:

3. 전치사에 주의할 것)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습니다. 셋이 아담의 형상으로 출생했다는 것은 아담을 가장 닮은 아들이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닮은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만큼 그렇게 인간을 가까이 두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입니다. 인간이 피조물가운데 어떤 것보다도 영광스러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이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것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약 4:8).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람과의 관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영광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놀라운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셨다. 그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 1:27).

 [사람 = 그 = 그들]
 [자기의 형상 = 하나님의 형상 = 남자와 여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에 의하여 표현됩니다. 하나님 안에는 남자의 모든 것과 여자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통하여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남자만으로나 여자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복수로 표현되듯이 ('우리', 26절), 인간도 복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표현되는 사회적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표현되는 사회적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사회성 속에 인간의 영광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일 때 영광스럽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결코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단독자로는 비참합니다. 인간은 보조적일 때 영광스럽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보조하는 것과 보조받는 것을 거절할 때 가장 비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창조시부터 모든 인간이 사회적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인간은 보조적인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조받지 않아도 되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보조하기도 하고 보조받기도 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로만은 불안정한 존재이며 '남'과의 관계에서만 안정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떠난 사회는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는 데 힘씁니다. 그들은 때로는 얌체가 되어 보조하기는 싫어하고 보조받기는 좋아하며, 때로는 폐쇄적이 되어 보조하기도 싫어하고 보조받기도 싫어하고,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보조하기는 해도 보조받기는 싫어합니다.

 인간을 사회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교회를 통하여 인간의 사회성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간의 사회성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런 노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행 2:42-47). 예수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김을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나 (막 10:45), 사도 바울이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가르쳤던 것은 (롬 13:15) 피조물 인간의 영광은 바로 사회성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로부터 인간이 무엇인지 배울 뿐 만 아니라, 인간이 왜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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