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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 05: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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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에녹에 대한 성경 세 곳을 읽었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을 아담의 7대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롯 땅에서 낳은 아들 에녹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녹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위대한 진리를 그의 삶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람 에녹에 대한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따라서 모든 성도들의 바램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창세기 5장 22절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장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습니다. 셋은 912세까지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향수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3분의 1정도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에녹을 기억합니까? 오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였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사람과 동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하고 어떻게 오랜 세월을 같이 걸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에녹도 엘리야처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요, 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했었습니다.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오래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손을 많이 낳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특별한 은사와 재능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룩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조건을 구비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우리 가운데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첫째로 예수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죄 용서함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 너희가 그 안에서 행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에녹은 365년을 세상에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게 된 이유는 언제나 그를 믿었으며 신앙의 능력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보다 나은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그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해도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는 듣습니다. 히브리서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의 믿음은 이해하는 믿음입니다. 에녹은 모든 것을 믿되 딱딱한 교리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머리로만 믿는 단순한 정통파는 아니었습니다. 진리가 그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믿음이 그의 실제 생활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성경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에녹은 죽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고 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에녹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책이나 읽은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다만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걷는 생활입니다. 같이 걷는 것이야말로 경건의 실제요, 신앙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걸을 때 미면하고 약하던 우리의 심령이 점점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완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계속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때 점점 완전한 자리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상 주시는 이가 되심도 믿어야 합니다. 에녹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앉고 서는 것을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하나하나의 행동을 판단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친구와 더불어 교제를 나누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내려오는 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아보면 그 사람을 대개는 알 수가 있습니다. 친구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래야 격이 없이 교제할 수가 있습니다. 동행하는 가운데 대화가 됩니다. 대화하는 동안에 서로 자기의 문제를 털어놓고 비밀을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하고만 동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하고도 동행하시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하시며 내가 네게 무엇을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하나님의 비밀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로 교제하려면 서로가 비밀이 없이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의 비밀을 말씀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교제의 신비가 곧 기독교의 맛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의 맛을 알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긴밀한 교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왜 우리가 금요일 밤마다 심야기도회를 가집니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기 위해서 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깊은 교제를 했습니다.

더구나 동행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생활을 의미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돌아선 적도 없고 하나님을 떠난 적도 없이 365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아도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갈 곳으로 갔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한동안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다 보니까 세상이 더 좋아 보여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데마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향했다가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기도하며 가까이하는 것 같았다가는 멀어지기도 하며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그러나 에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65년 동안을 한결같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모두가 내 마음에 들고 납득이 되고 좋은 일뿐이었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이해도 되지 않고 내게는 손해가 되고 괴로운 일인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그러시겠지.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게 손해날 일은 안 하실 거야.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러시겠지.” 하면서 이해하려는 자세, 신뢰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꾸준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돌아서거나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교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1년, 2년 사귄 사람이 아니라 20년, 30년 사귄 사람은 좀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계속 교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이처럼 계속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동행한다는 것은 전진을 의미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10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나는 동안에 에녹은 처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전진했습니다. 진보했습니다. 성장했습니다. 성숙해졌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은혜와 지식에,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더욱 진보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은 지가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었는데도 왜 처음 믿을 때보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전진이 없습니다. 성장이 없습니다. 에녹의 생애는 영적으로 전진하는 생애였습니다. 그는 힘에 힘을 더해 가면서 귀한 순례자의 대열에서 앞장을 섰습니다.

킷토라는 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꼬마 아들의 손을 잡고 아들과 더불어 산들바람이 부는 언덕을 오르고 있는 아버지에 비유했습니다. 그 아이가 아버지와 같이 걷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걷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이르러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아버지와 같이 걷는 아들은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길이 험하고 날씨가 사나워도 아버지와 같이 걷는 아들은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명나게 걷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같이 걷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쁜 것입니다.
아버지와 같이 걷는 아이의 마음은 그저 단순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하고, 좋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아버지가 말씀하고 행동하는 것은 무엇이나 감탄합니다. 그 아버지를 따라가노라면 아버지에 대해서 최고의 애정을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경외심은 대단합니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합니다. 어린애는 아버지가 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합니다. 어린애는 아버지와 같이 길을 걷는 동안 길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인도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팔에 붙들려 걷는 동안 넘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내 조그만 실수로 넘어지려 해도 아버지의 강한 팔이 나를 붙들어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정말 힘든 길이 있을 때, 험한 구덩이가 있으면 아버지의 팔이 우리를 번쩍 들어 건너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에 다윗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목자와 함께 가는 양은 염려할 필요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떤 환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까? 성경에는 에녹이 살던 때의 환경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으로 족장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정의 선지자며, 제사장이며, 왕이었습니다. 그런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더구나 에녹은 매우 악한 세대에 살았습니다.
그는 죄가 온 세상을 뒤덮기 시작할 때 세상에 났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했던지 그 죄때문에 얼마 있지 아니해서 하나님이 온 지면을 물로 소멸해 버린 것이었다. 에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때에 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가 신앙으로 살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불평하지 맙시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에녹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유다서의 기록대로 원망하는 사람, 불만을 토하는 사람, 정욕대로 행하는 사람,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에녹을 거슬리는 말을 했습니다. 에녹의 증거를 비웃고, 거절했고, 에녹의 심령을 괴롭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맺은 교제를 끊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종말이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시므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온 인류 가운데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 저 하늘 나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가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에게 적용했으면 하는 말입니다. 에녹은 이 땅에서 갔습니다. 그는 여기 세상에서는 다시 보이지 아니하고 저기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지금도 같이 있습니다. 다만 죽음만 보지 아니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에녹은 변화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8231;&8231;&8231;&8231;&8231;&8231; 다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에녹의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므로 순식간에 변화를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부활의 날에 이런 체험을 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맥을 쓰지 못합니다. “사망아, 너의 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옮기셨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옮기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사도들이 현장에서 본 것처럼 모든 족장들이 그가 떠나 옮기우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장차 들리움 받을 것의 그림자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래의 상태에 대해서 의문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에녹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사실은 이 세계가 아니고 다른 세계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의 종말은 의인에게는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그 당대 사람에게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십시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강하고 담대하게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이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도 많은 사람에게 위대한 증거가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날마다 날마다 주와 함께 걸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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