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악한 때에 의롭게 산 사람 (창 06:1-12)

첨부 1


아마 옛날 세계에 대한 기사 가운데 가장 특이 할만한 사실은 세계적인 대홍수로 온 세계가 멸망했다는 기사일 것입니다. 흔히 노아의 대홍수라고 불리는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6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6장 1절에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번성하게 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8231;&8231;&8231;&8231;&8231;&8231;”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너무 남용하고 왜곡시켜서 그 축복이 저주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더욱 큰 죄악을 범하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가령,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인류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지식을 가지고 죄악을 범하는 일에 사용한다고 할 것이면 지능적인 죄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관리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된 기회일 것입니다. 청지기의 사명을 가지고 물질을 바로 사용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안일과 향락을 위하여 사용한다고 하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죄악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사회에도 큰 폐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 사회의 안정과 발전, 국민의 복리 향상을 위해서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권력을 악용하게 되면 국민이 당하는 고난은 말할 것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6절에 보면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인이 많아지면 그만큼 죄악도 더 많아지는 것이며, 범법자들이 번성할수록 사람들이 범죄하면서도 대담해지는 법입니다. 전염병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며, 죄악이란 전염성이 강한 문둥병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히 문제도 많아지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에 보면 제자들의 수효가 많아졌을 때 원망하는 말도 야기되었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8231;&8231;&8231;&8231;&8231;&8231;” 하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동시에 이것이 잘못되면 큰 죄악이 생길 우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의 수효가 증가한다고 하여 그것이 그들의 즐거움을 더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된 이유 중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잡혼입니다.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은 ‘그 이름을 부르는 신앙 고백자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속되고 하나님에 대해 이방인들이며, 경건치 못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셈의 자손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며 배신을 하지 않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켜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파문당한 가인의 종족과 혼합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결혼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저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라고 했으니 저들이 단지 눈으로만 보고 곧 외모만으로 사람을 택한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Beauty is skin deep’ 이란 말이 있습니다. 외모로 아름다운 것이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청년들에게 중요한 귀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을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에서도 선택을 잘못해서 평생을 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롯도 선택을 잘못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가게 되었고 결국 소돔성에 죄악이 관영해서 불로 멸망당할 때 그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저들은 저들 자신의 타락한 욕정이 시키는 대로 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의 충고나 의논도 없이 “그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악하게 드러났습니다. 고린도 후서 6장 14절에 있는 말씀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고 이방인 아내를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금지된 사항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 2-5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로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어느 남자나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아내를 잘 만나야 하고 아내도 아내 노릇을 바로 해야 남편을 성공시킬 수가 있습니다. 아합왕이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서 바알신과 아스다롯신을 수입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나라가 고난을 겪게 되고 국민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가령,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만 하더라도 이세벨이 아합 왕을 부추겨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고 나봇을 죽이고 빼앗는 일을 했고 나중에 꼭 같이 비참하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솔로몬 왕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데려 와서 궁중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상 11장 1-5절에 보세요.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700인이요 빈장이 300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중한 믿음을 좇음이라”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사악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스라 9장 1-2절에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브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중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자녀들이 가정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겠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범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본문 6장 3절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의 여인들과 결혼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이 그들에게서 물러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두움이 자리를 차지하면 빛은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신앙을 떠나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비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산 것은 심판으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하나님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했는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습니까? 호세아 4장 17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 때 하나님이 떠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어찌할 수 없이 타락하고 육욕적이며 음탕하여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육체의 오욕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령이 깃들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헛되게 하는 것은 타락된 인간의 본성이요, 육체를 따르려는 영혼의 영향성 때문입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세상에 집착하여 성령에 반대하고 육체의 편을 들게 될 때, 성령은 마땅히 그 역사를 그만두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아니합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는 본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방 여인 블레셋 간첩 들릴라와 가까이하고 지내면서 들릴라의 영향을 받게 되고 결국 나실 사람으로서의 머리칼을 자르게 하여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가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능력 있게 왕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했으나, 그 마음 속에 시기와 미움이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떠나셨고 하나님이 떠나시니 사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미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할 때 이스라엘 군대는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를 무난히 점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 아간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여리고 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성 아이를 점령하려 했지만 오히려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그러나 그들의 날이 120년이 되리라” 했습니다. 의는 “그를 잘라 버리시오.”라고 말하고 자비는 “일년만 더 기다려 주시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그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120년 동안 오랜 세월을 인내하시지만 용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으시기는 하시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 세상은 어떠했습니까? 5절에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짝을 짓는 그것부터가 잘못되었는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결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자녀들은 어느 쪽을 닮을 것인가를 보기 위해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악한 쪽을 닮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남을 압박하고 폭력을 가하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장부들이었고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너무 강했으므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 자들의 땅에서 힘을, 횡포를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또 무장하여 그 모든 이웃의 권리를 무참하게 짓밟고, 의롭고 거룩한 모든 자들을 차별없이 유린했습니다.
남들을 압제할 수 있을 만한 대단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도 자신을 억누를 만한 힘은 좀처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힘이 클수록 사람에게는 그만큼 큰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이 절대 타락한다는 말도 바로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민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소위 5공 비리’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도무지 시작할 때부터 잘못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다가 보니 권좌가 손에 들어오고 그 자리에 앉아 보니 권력이라는 게 이렇게 굉장하구나 하는 것을 맛을 보게 되니 정신이 거의 나가서 앞뒤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잡이로 나라를 이끌게 되니 그 7년 동안 나라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힘에 붙어 아부해야 살 길이 있는 사람들, 소위 정경유착이라고 해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정권 잡은 사람에게 눈치 봐 가며 바쳐야 하고 억울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명예를 박탈당하고 귀한 생명까지 희생당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무지가 정치 철학이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니 기대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지만 요즈음 흔히 하는 말대로 “해도 너무했어요.”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악인이 세력을 잡으면 백성이 고생을 해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활 속에 흐르고 있는 죄악의 흐름을 감찰하시고 그 흐름의 폭과 깊이를 감찰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그 전 말씀과 비교해 보세요.
압제자들은 “용사요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보셨습니다. 가장 악명 높은 죄인들이 유명한 사람이 된 때에 사람이 범하는 죄악도 대단한 것입니다. 악한 자가 그 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악함 때문에 가장 추앙을 받을 때는 만사가 악한 것입니다. 위대한 자가 악해질 때 죄악은 커지는 법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커졌다는 것은 온갖 민족과 모든 지역에 죄가 범람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범했을 뿐 아니라 그 죄악을 제지하거나 벌을 가할 능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들마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할 때 사람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5공 비리 조사위원회, 공청회에 증인들이 나와서 심문을 받는데 소위 위증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하고도 안했다고, 알고도 모른다고, 주고도 안 주었다고, 받고도 안 받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근원을 감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가 소돔과 같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 이상의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거짓되고 절망적일만큼 사악해졌습니다. 도의는 부패해졌고, 습성과 성질도 악해졌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도 헛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꿈꾸는 착상도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계획과 책략 역시 악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부주의해서 행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해독을 끼칠 것인가 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고의적으로, 계획적으로 악을 행했습니다. 정말 악했습니다. 꿈을 꾸어도 악을 행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악을 항상 생각하고 계획했습니다. 그들에게서 선이란 것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자식이 반항하고 불순종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 일입니까? 차라리 자식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에게 괴로움이 됩니다. 이사야 43장 24절에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렇게 기쁘게 생각했고, 만족해 하셨는데 그들에게서 배신을 받을 때 한탄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멸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세상이 악해서 하나님이 모두 멸하기로 작정하실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8-9절에 보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악했을 때 노아만은 홀로 자신의 고결함을 지켰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들을 은혜로우신 눈으로 내려다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산 시기는 패역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노아가 이런 시기에 하나님과 동행했으니 영원히 기록되어 불후의 영예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아처럼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