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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 (창 0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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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대홍수로 세상이 멸하게 되고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정만 구원받게 된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홍수가 끝나는 장면입니다. 한때는 그렇게도 검고 어두운 것으로 나타났던 구름이 이제는 보다 밝은 면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40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6-7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8-9절에 보면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했습니다. 10절 이하에 “또 7일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까마귀의 임무는 어둡고 무서운 율법을 내어 놓은 것의 그림자이고 그가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어떤 위로의 표적이나 소망의 징조로 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보내신 것은 비둘기로 미리 알리셨는데 그가 죄인에게 오시는 것은 감람 잎사귀로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율법을 대표하는 까마귀는 맹렬하고도 거칠게 침울한 울음소리만 내기 때문에 율법에는 조금도 평안이 없고, 복음을 대표하는 비둘기는 입에 감람 잎사귀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복음의 기초에는 평안이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을 소위 은유적인 해석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내용을 모두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퍽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저녁 생각하게 되는 이 사건은 그 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둘기는 신자의 영혼은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때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모든 것을 관찰해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고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과 평안이 없습니다.

먼저, 방주를 떠난 비둘기를 생각해 봅니다. 비둘기가 방주 안에 있을 때는 늘 안전했습니다. 다른 모든 가축과 짐승들이 홍수로 인해 죽었지만 이 비둘기는 은총을 받아 구출 받은 것입니다. 비둘기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비둘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방주 안의 의인 노아가 언제나 이 비둘기에게 그날의 모이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날개를 펴고 이 안전한 방주를 떠났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악의 홍수가 많은 사람을 뒤덮을 때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제공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기 위해서 날개를 펴며 눈을 떠서 다른 곳을 바라보려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다른 곳을 기웃거립니까?

디나가 아버지 집을 떠나 세겜의 장막을 찾아갈 때 스스로 범한 과오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녀는 강간을 당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세상을 찾아 나아갈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비둘기가 왜 날아갔습니까? 비둘기는 날개가 있어서 입니다. 날개를 가진 짐승은 본능적으로 날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생각의 날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각의 날개를 펴서 여기 저기 날아다닙니다. 우리에게 이 공상의 날개가 없다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증거하고 있는 소수의 명백한 진리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공상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확고하고 진실하게 보이는 일들까지도 참으로 그런가 하여 흔들거리기가 쉽습니다. 믿음이란 이론으로 따져서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론을 따지지 말고 순전하고 단순한 믿음에 머물게 되면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이 노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캐고, 이론으로 결론을 얻으려 하는 동안 번거로움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복잡하게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만 그 능력은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영은 탐구 여행을 떠나며 발견의 항해를 떠나자는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더욱 더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이외에 또 어떤 굉장한 사랑의 대상물이 있는 줄 알아서 애써 찾아나서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랑의 대상이 어디 있습니까?

비둘기는 전에 살던 곳을 찾아가는 본능이 있습니다. 요즘는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그런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비둘기를 이용해서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비둘기 다리에 작은 종이로 편지를 써서 묶어 날려보내면 비둘기는 자기가 살던 집을 찾아 날아갑니다. 사람의 기술 가지고는 비둘기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게 만들 수 없고 단지 비둘기 자신이 살던 집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비둘기는 공중으로 높이높이 날아오릅니다. 높이 떠서는 열심히 무엇을 찾는 눈초리로 여러 번 빙빙 돕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가 안식을 취하던 그곳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큰 행사를 할 때 수천 마리의 비둘기를 가두었다가 한꺼번에 풀어놓으면 함께 나와서 공중을 빙빙 돕니다. 아주 장관입니다. 그러다가 여러 곳에서 모아졌던 이 비둘기는 결국 자기 집을 찾아갑니다.
노아가 내놓은 이 비둘기는 오랜 시간 방주 안에 있었지만 방주에 들어오기 이전의 과거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주 밖으로 날아가는 자유를 얻자 자기가 살던 과거의 집을 향해 날아가려고 시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주님을 알기 전에 안식은 그런 대로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전에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쾌락을 누렸습니다. 이 세상의 허무한 것 가지고 유행을 따라 그런 대로 만족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가졌고, 기쁨도 가졌고, 쾌락도 가졌고 환희도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그 옛적 성품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 옛 성품이 자유를 가지게 되면 그 옛날 소굴을 찾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찬양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부르던 음탕한 노래가락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행하던 그 어두운 죄악의 그림자가 회상되지 아니합니까? 지금은 새 성품을 가지고서 과거의 그 어두운 죄를 증오하고 있지만 그래도 옛 성품이 그것을 향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 육체가 땅에 묻혀 썩기 전에는 옛 성품이 자꾸만 되살아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고기 가마가 자꾸만 생각나지 않았습니까? 그 속박의 집, 노예 생활에서 그토록 맛있던 애굽의 마늘과 부추와 파를 먹으러 가보지 않겠냐고 속삭이지 아니합니까? 그렇습니다. 비둘기 집은 아직도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죄의 씨앗이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뱀이란 놈은 아직도 기회를 노려 우리에게 살금살금 기어 들어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데 뱀은 여기를 기어다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육의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권면합니다. 옛 생각이 우리 영에 우세하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죄를 찾아 헤매게 되는 사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비둘기는 노아에 의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둘기를 내보낸 노아의 동기는 그 차원이 높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험을 참고 견디도록 허용하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험 당하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시험을 당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은 우리에게 훌륭한 결과를 안겨줍니다. 그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처리되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들의 유익이 됩니다.

비둘기는 물로 황폐한 땅 위를 날아본 후에야 그 이전보다 더 한충 방주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둘기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자기가 안식할 곳이 없음을 똑똑히 눈으로 보고 안 후에 비로소 노아의 손에 있는 것 이상으로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꾸밀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생각 나름대로 배회하고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가도록 내어놓으십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돌아다녀 본 연후에 취하는 휴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허무한 데서 허무한 곳으로 괜히 날아다녀 보는 것입니다. 그후에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참된 복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겠다고 할 때 아버지는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몫에 돌아가는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아버지를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즐기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얼마 동안은 자유로웠고 사람 사는 맛이 있는 것 같았고,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데 아버지 밑에서 멋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돼지우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나보다 낫게 지내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돌아갈 곳은 하나님 품밖에는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을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거기에 참된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이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둘기는 자기의 날개를 펴서 새로운 집을 찾아 날아갑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산봉우리 뿐이었습니다. 날아다니다가 맥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디 좀 쉬어 보려 해도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평안히 있습니다. 어떻게요? 까마귀는 물에 떠 있는 큰 짐승의 시체 위에 올라앉아서 죽은 짐승의 고기를 실컷 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거기에 안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둘기는 그 천성이 부패한 것이라면 딱 질색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큰 태풍에 부러져 물 위에 떠 있는 나무가 하나 눈에 뛰었습니다.
거기에 앉으니까 그 나무는 온통 진흙과 오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도 비둘기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날개를 펴고 날아갔습니다. 저기 또 어떤 물체가 눈을 끌기에 죽을 힘을 다해서 날아가 보았더니 거기도 자기가 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사방을 날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 자기가 발붙이고 안식할 곳은 찾을 수가 없고 점점 날개가 피곤해 지기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마음의 안식할 만한 곳을 찾아 헤매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어떤 것입니까? 지식인들도 안식을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안식을 구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교육을 많이 받은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많이 받은 교육이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지성인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만 예수님은 그를 만족케 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중생한 사람의 마음도 안식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만족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족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까마귀는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어도 만족하지만 비둘기는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날아다녀 보아도 안식할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아오면 됩니다. 하나님에게만 안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맡기십시다. 그리하면 주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는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좋아하던 모든 것, 사랑하던 모든 것 가지고 주님께 온전히 나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측량할 수가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참된 안식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은 사실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에게는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에게는 엄청난 통치권이 있었는데 이것도 소용없단 말입니까? 그의 번영했던 영광의 왕위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자기를 평안히 안식하도록 만드는 그 감미로운 소리들, 그리고 자기를 즐겁게 만들던 춤과 노래 등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의 대답은 여전합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심판의 피곤만 더할 뿐이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을 시험하고 난 뒤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애 이상으로 더 좋은 생이 있을까 알아보기 위하여 어떤 다른 형태의 인생살이를 시도해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안식이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한 사람은 토굴 속에 살아도 부족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특출할 사람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밝은 면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괴롭다고 하는 곳에서도 그들은 만족해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발 붙일 안식처를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비둘기가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는 꽤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주님밖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기쁨을 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적인 것을 좋아하며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단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처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미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재산이나 소위 세상이 말하는 쾌락이 있으면 그것을 다 볼 줄 압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해서 그런 것을 못 보는 장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기에 집착하지도, 거기에서 만족을 얻지도 못합니다.

비둘기는 날개가 없어서 안식처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비둘기의 날개는 강했고 빨랐습니다. 까마귀 이상으로 날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원하면 세상의 쾌락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은 거기에 참 만족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안식처를 찾지 못한 이유는 비둘기 자신의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서 “올라가라, 올라가라, 올라가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디서도 만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비둘기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어느 곳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한 비둘기가 그 다음에 한 일은 방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요세프스는 “비둘기는 온통 물에 젖고 진흙이 묻은 날개와 발을 가지고 노아에게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안식처를 얻으려 하면 결과적으로 얻는 것은 세상의 물과 진흙으로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둘기는 방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진흙 속에 빠졌어도, 물에 흠뻑 젖었어도, 맥이 하나 없게 되었어도, 주님께로 나오면 됩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노아는 온종일 자기의 비둘기가 돌아오는가 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저기 비둘기가 옵니다. 그 비둘기는 얼마나 지쳤든지 떨어질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 노아는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잡아 주었습니다. 비둘기는 이제 더이상 자기 힘으로 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두 손들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아 드리는 아버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내게 오는 사람을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심령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 주시는 참된 평안과 쉼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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