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 (창 09:1-11)

첨부 1


노아 때의 대홍수가 지나고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는 장면이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한 호의와 은혜로운 은총을 약속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보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라고 했고,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노라” 했습니다. 창세기 8장 20절에 보면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린 사실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그를 찬양하는 자들에게 은혜롭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드리는 것이 그 은혜를 확증하고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대헌장을 주십니다. 이전의 헌장은 벌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새로이 건설되고 실현될 새로운 시계에 대한 ‘위대한 헌장’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헌장은 인간에게 친절하고 은혜로운 것을 허락합니다. 광대한 땅의 허락과 사람이 크게 증가하며 그 땅을 소유하고 향유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축복이 여기 갱신되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고, 이것이 7절에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종족이 새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그 앞에 두시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소유이며 후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상을 소유하고 거주지로 삼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의 관리를 맡기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낙원이 아니라 오히려 광야이긴 하지만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는 사실 훨씬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지옥에 가서 멸망 받아야 마땅한 인간에게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이만큼 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이 땅 위에서 번성케 하시고, 영속케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더구나 하등 동물을 다스리는 권능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셨다” 했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이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말씀하신 인간의 권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무흠한 자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타락한 자는 두려움으로 다스린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유용한 동물들은 길들여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부리거나 식물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말과 소는 참을성 있게 고삐와 멍에를 달게 받고 있으며 양은 털 깎는 사람과 도살자 앞에서는 벙어리와 같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들은 속박을 당하게 되며, 때로는 사람들이 사나운 짐승들에 의해서 피해를 입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 맹수들이 힘을 합해서 인간을 해치게 하지는 못합니다. 만일 맹수들이 힘을 합해 인간을 공격했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용하셔서 홍수로 하셨던 것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맹수를 광야에 감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절에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땅에서 나는 소산인 열매와 채소와 뿌리 및 모든 종류의 곡식과 젖만을 먹도록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창세기 1장 29절에 약속하신 것을 보게 되면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아마 홍수가 땅의 효력을 대부분 쓸어 버렸기 때문에 그 소산물은 보다 부족되고 영양분이 적게 되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허락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육식을 하도록 허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이 채소를 먹듯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육식을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4장 4절에 보면 “모든 피조물은 선하매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매우 중요한 계율을 말씀하셨습니다. 6절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지니라”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말하면 이 계명은 소극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전통적인 해석은 우리의 그릇된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영어나 독일어 번역에서는 “너는 죽이지 말라”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히브리 원문에는 ‘살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말 번역이 오히려 원문에 가깝게 번역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두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생명을 죽이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가령, 식물은 동물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죽여서 음식을 만들어 먹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의 생활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계명은 어떤 생명이든지 없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했는데 이 계명은 그 뜻과는 다릅니다. 불교와 형제 종파인 잰교(Jainism)의 창설자 마하비라(Mahavira)는 단순히 살생을 금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의 일생에 살생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목욕을 하러 탕안에 들어갈 때에도 혹시 눈에 띄지 않는 벌레라도 다칠까 봐서 빗자루로 쓸고 목욕을 했고, 또 비가 올 때에는 길을 걷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혹시 벌레들이 밟혀 죽을까 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원래 힌두교에서 시작이 되었고 거기에서 분리된 불교나 잰교에서 시행이 되어 동양의 전체적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살생을 금하는 것이 자비심의 표시라고 해서 모든 생물, 그러니까 미생물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생명까지 죽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소위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사상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생명을 없애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계명은 정당하지 못한 살생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 살생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트 슈바이처의 중심사상이 “생명에 대한 경외”입니다. 모든 생명은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나 죽이지 말라는 불교나 힌두교의 불살생(不殺生)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경의 계명은 정당하지 못하게 살생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살생이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도움이 될 때 그 살생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완전히 반전론적(反戰論的)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폭력이나 거친 행위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 방어를 반대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 신앙과 자유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린 위대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에 어느 나라가 우리 나라를 공격해 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떳떳한 마음으로 전장에 나아가 국민의 생명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적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 사회에는 반드시 전쟁이 있게 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제 나름대로 평화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류 사회의 전쟁에는 의로운 전쟁(a just war)이 있고, 불의의 전쟁(an injust war)이 있다고 했습니다. 의로운 전쟁, 자기 방어를 위해서는 적을 죽이는 것도 불가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육신 속에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병들고, 기력이 없고, 늙고, 모습이 추할지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흔적을 그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리한 짐승이 아니라 살과 피와 뼈로 된 생각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 육신 가운데 번영하고 자라는 영원한 혼과 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은 엄격히 말해서 육신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육신의 주인은 영혼입니다. 우리가 관속에 있는 시체를 볼 때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이 살던 빈 집을 보는 것입니다.
올리버 웬델 홈스라는 분이 90살이 거의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올리버 웬델 홈스 선생님, 요즘 좀 어떻습니까?”
그때 그는 상쾌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올리버 웬델 홈스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사는 집이 이렇게 좀 낡아졌습니다. 지붕의 널판지가 벗겨져 나가고 재목이 여기저기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 올리버 웬델 홈스는 여전합니다.” 의미 깊은 대답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장막이 낡아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은 언제나 새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다른 말로 살인하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인간의 감수성이 부활해야 합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기에 앞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감정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별로 마음에 어떤 상처나 괴롭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교통 사고로 한꺼번에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해도 “참, 안 됐군.” 하는 말을 할 뿐 우리에게 아무런 심각한 충격도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이렇게 무디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수천만, 수억만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 배가 부르면 다른 사람의 사정은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인간의 요구에 민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렸을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지 않았으며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왼편에 서 있던 사람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때 주님의 대답은 “너희가 나의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감수성, 우리의 동정심이 부활한다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과 22절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이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미워하는 것, 시기하는 것, 저주하는 것을 살인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사실 분노는 살인을 낳게 합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에 대하여 분한 마음을 품었더니 결국 그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분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시 분이 나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안양에 있는 교도소엘 다녀왔습니다. 거기에는 거의가 장기 복역을 하는 분들로 약 3천여 명이 수고하고 계셨습니다. 강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때 명성그룹의 총수였던 김철호 회장님도 거기서 만나 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1200-1300명 가량은 교도소에 들어와서 복역 중에 예수를 믿게 되신 분들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참석하신 분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는지 감동이 될 정도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얼마나 열심히 부르는지요. 어느 교회에서도 예배드리면서 그렇게 간절히 목소리를 다해서 부르는 찬송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도관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느 복역수는 60이 넘으신 분이신데 시골에서 농사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논에 물을 대느라고 밤 11시가 되도록 지키다가 다 물을 받아 놓고 집에 들어왔는데 이튿날 아침 논에 나와 보니 이웃집 사람이 이 할아버지의 논의 물을 몽땅 빼서 자기 논에 채운 것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 이웃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말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에서 자기가 할 일을 했다고 나서니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들고 있던 호미를 휘두른 게 그만 그 사람의 머리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살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형 구형을 받았다가 무기언도를 받고 나중에 감형이 되어서 20년의 형을 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도소 안에서 형기중에 세상을 떠나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극기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날 때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술 좌석에서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고 해서 화를 내고 그 자리에서 그 부하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자기의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기록하기를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는 다스릴 줄 알았지만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감정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이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주시는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산다면 이 사회가 놀랍게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위정자가 자기 정권 유지를 위해서 국민을 도탄 가운데 빠지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을 손해시키는 일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오해를 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도시락 싸가지고 쫓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은 간접 살인입니다. 이 입으로 살인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격을 서로가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에야 자기 자신도 바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성격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절망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 변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 새 사람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도 “바로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바꾸어 놓았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정말 우리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 뜻깊은 크리스마스 계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하나의 마음에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완전히 변하여 새 삶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고 피 흘리는 자리에서 떠나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적극적인 자리로 나아가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