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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다투지 말자 (창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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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투지 말자(창 13:1-13)-박조준목사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애굽에 내려갔다가 큰 망신을 당한 사건을 지난 시간에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데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흘러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인도되어야 할 터인데 왜 기근이 들까?

양을 치는 목자의 말에 의하면 양이 지나치게 살이 찌면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기 쉽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절식을 시킨다고 합니다.
세상의 것이 많은 것이 꼭 죄는 아니지만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세상 것이 너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뚱거리기 쉽고, 넘어지기 쉽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절식을 시킵니다. 그런데 양의 편에서는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사람도 몸이 너무 부해지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일이 많기 때문에 절식을 합니다만 이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몸이 부해지면 질수록 구미가 생겨서 음식을 잡아당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에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했습니다. 여기 ‘풍부하였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히브리어의 본래의 뜻은 ‘매우 무거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귀라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하박국 2장 6절에 보면 “부요하게 되는 자는 볼모잡은 것으로 무거운 짐 지는 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모으면 모을수록 더 모으고 싶기 때문에 거기에 염려가 있고, 그것을 지키려는 두려움이 있고, 그것을 쓰는 유혹의 짐이 있고, 남용에서 오는 죄책의 짐이 있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슬픔이란 짐이 있게 되며, 마침내는 이와 관련하여 남의 손에 넘겨야 할 계산의 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많이 소유한다고 하는 일은 사람을 무겁고 부자유하게 만들 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과 선행, 그리고 약속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육축과 은금도 풍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섭리를 통해서 때때로 선한 사람에게 부족함을 참고 견디는 방법은 물론 그들이 부요케 하여 풍부에 처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장 11-1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선한 사람이 부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는데 그 복은 그를 아무런 근심도 염려도 없는 풍부에 이르게 했습니다. 잠언 10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니라” 근심이 없는 부요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참된 경건은 큰 부요와 조화될 수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극히 어려워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는 하였지만 이 말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우리의 외적인 번영이 잘 관리만 하면 경건을 단장하는 장신구가 되며, 보다 큰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청지기의 사상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빈 손 들고 나왔고, 세상을 떠날 때도 빈 손 들고 떠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을 때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맡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요즘 우리 나라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노사문제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 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사업하시는 분의 의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관리인이다.” 하는 의식입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고용주가 엄연히 주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인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관리인이고 나중에 다 회개해야 할 때가 오므로 신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벧엘로 이동해 간 기사가 있습니다. 그가 거기에 간 것은 그곳이 전에 그가 장막을 쳤던 곳이요, 옛 친지들에게 가고자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제단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해도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그가 전에 그곳에서 가졌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됩니다. 혹은 그가 애굽여행을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맹세했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같은 사명을 주시고 바로 같은 곳으로 그를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35장 1절에 “이르시기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엄숙한 서약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고 온갖 기회를 잡아 그 서약을 지켜야만 합니다. 아마 그들이 서약했던 그곳이 그들의 기억을 새로이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4절에 “그가 처음을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들입니다. “기도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호흡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마태 헨리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믿음이 견고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사람은 끈기 있게 끊임없이 신앙의 봉사를 지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대로 보면 많은 사람은 여행 중에 신앙을 잃어버리기가 쉽지만 아브라함은 애굽 여행 중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를 행할 수 없을 때 헌신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제단이 없을 때도 기도하는 일은 쉬지 아니해야 하고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5절 이하에는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과의 불행한 관계가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떨어질 수 없는 벗과 같은 사이였지만 이제는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싸움이 나게 된 이유는 부유한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아브라함은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니 “아브람의 일행이었던 롯도 역시 부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브라함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풍부한 것을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선한 사람의 벗이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큰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의 근원되는 아브라함과 같이 있던 롯도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함께 한 보디발의 집에 형통한 축복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사귈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그런 복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불평, 불만, 원망, 시비에 싸여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시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영향을 받아서 그런 사람으로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순종하는 일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협동하는 사람은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이사야 66장 10-14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났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런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축복과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에 보니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치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음이라” 했습니다.
재산이 많아져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아도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은 화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유는 재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전서 6장 9절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사모하면 시험에 빠집니다. 부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 아니라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탐욕스럽게 해서 분쟁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것과 네 것은 이 세상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화근이 됩니다.” 가난하고 괴로울 때, 곤궁하고 방황할 때 아브라함과 롯 사이를 분리시키지 못했지만 부유할 때 그들을 갈라놓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싸움의 직접적인 도구 역할을 한 것은 그들의 종들이었습니다. 7절을 보세요.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했습니다. 그들은 보다 나은 목장이나 물을 차지하려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 싸움에 주인들이 관여하게 된 것입니다. “애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형편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싸우는데 자기들끼리만 싸운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주인들을 끌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들이 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아니 조카님의 종들이 우리가 구해 놓은 초장에서 자기들이 끌고 온 양떼를 먹이면서 주인님 욕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너무 분해서 한마디 해 주었습니다.” 롯의 종들은 그 주인 롯에게 가서 “주인님, 삼촌 아브라함의 종들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요. 우리야 비천한 사람이니 무슨 상관 있습니까만 어떻게 감히 그 놈들이 우리 주인 어른에 대해서 그런 방자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궁금한 롯은 물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던데?”
“무슨 말이 다 뭡니까? 감히 주인 어른께 전할 수도 없는 말입니다. 이거 도무지 분해서 그냥 지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롯이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짐작해 보면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속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싸움은 직접 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 말을 만들어서 시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일을 일삼는 것은 마귀의 하수인이 하는 일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데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아브라함과 롯이 다투게 되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공격해 올 수가 있었습니다.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다투면 마귀의 습격을 받게 되고 분열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큰 수치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게 되니까 모든 이웃들의 눈이 그들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저것들 좀 보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들이 싸우는 꼴 좀 보게. 하나님은 저렇게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지.”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본인들은 말할 것 없이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다툼은 그 서약에 대한 치욕이며,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8절과 9절을 보세요.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할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평화를 지켜 파괴하지 않는 일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불화도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투쟁을 보이는 한 표면에 불과합니다. 시편 133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습니다.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물을 드리러 가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그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하게 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보세요. 한 마디로 평화로운 사회는 아닙니다. 중상과 모략, 욕설과 뒷공론, 불평과 불만 투성이 입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불안합니다. 요즘 소위 치안 부재 시대라고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한 교회를 이룩하려면 소극적으로 다툼이 될 요소가 있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생각 없이 이런 저런 말을 마구 하게 되면 이로 인해 화평한 교회에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잠언에 보면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화평한 교회를 흔들어 놓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써, 성령이 하나되게 하여 주신 화평의 매는 줄을 끊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해야 합니다.
교회가 다투면 누가 제일 기뻐하는지 아십니까? 마귀입니다. 마귀를 기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다소 어려운 일이 있고 내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해도, 내가 좀 손해를 보는 일이 있어도 다투는 일만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살 때 그 목자들이 풀밭과 물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다. 만일에 우리가 싸우면 저들이 우리를 멸시할 터이니 서로 싸우지 말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다투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든지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화평을 이루어 불행한 가운데 지내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 우리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화는 아무런 수고없이 하늘에서 그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수고와 땀을 흘리는 사람에 의해서 피는 꽃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탈무드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로 뭉쳐 있으면 너희는 모두 이렇게 살아 있다. 누구든지 한 묶음의 갈피를 묶은 채로 꺾을 수는 없다. 평화가 없는 곳에 번영과 복지가 있을 수 없다.”
내려오는 말에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개인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맞지 않으면 차선은 싸우지 말고 서로 떠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편에서 양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누린 축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임하고 우리 서로 화목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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