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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롭게 되는 길 (창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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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창세기 12장을 강해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간 것을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염세적 행위자도 아니고, 고행주의자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일들과 어울리지 않은 감상주의자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당당하게 자기에게 부딪히는 문제에 도전하며 고충과 시련에도 끄덕하지 아니하고 견딜 수 있는 자세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롯의 일꾼들이 아브라함의 종들과 다투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사심도 없이 자기의 조카에게 목장지를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그 땅에서는 가장 좋은 물이 넉넉하고 풀이 많은 소돔 평지를 포기했습니다.

그 후에 조카 롯과 그의 가정이 곤경에 빠졌을 때 아브라함은 당당한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여 무서운 전투에 대항해서 훌륭하게 승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종을 모으고 이웃의 협조를 요청해서 동맹한 왕들의 추격을 이겨내고 강한 손으로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머리만으로 아는 이론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느낌만으로 사는 감정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의지적인 행위가 따르는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수도원에서나 통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거리에서, 시장에서, 직장에서, 부대에서,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일상 생활 전선에서 만나는 생의 험악한 투쟁에 과감하게 나아가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브라함에게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그것은 전투가 끝난 후 언제나 격조된 흥분에 의해 생기는 반응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용감히 싸워 멋지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겁쟁이들은 전투하기 전에 떨고 용감한 사람은 승리한 후에 떤다.”는 말이 있습니다.
엘리야도 겁없이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한칼에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이 끝난 후 오히려 그는 마음이 가라앉고 두려워 이세벨의 낯을 피해 멀리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도 하나님 앞에서의 위압적인 경외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그에게 임하자 그는 요한과 다니엘이 느꼈던 것과 같은 마음의 위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능력의 말씀이 임할 때 밧모섬에서 주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다니엘은 힛데겔 언덕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복된 두려움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두려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의해서 제거됩니다.
자기가 크게 부족한 것을 안 사람으로서 영화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광을 누리고서도 자기 자신의 판단에 비추어 다소라도 낮아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위로를 받았을 때 그는 그의 칭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믿음이 작용하는 순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따라옵니다. 믿음의 결과는 몇 달 동안 질질 끌면서 시간을 보낸 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순간 그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가 의롭다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용납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전하신 풍성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불완전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재산의 소유권 대장을 읽어 볼 수 없거나 또는 아직 소유권 대장이 있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속한 재산은 그대로 자기의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법률이 그렇게 권리와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젠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칭하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가 옵니다. 그 때는 우리가 의롭다 칭함 받은 사실을 지적으로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한없는 기쁨이 되어 우리가 차원 높은 생활을 하게 되며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명백하게 제시한 바 있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 본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도 선행입니다. 고상한 정신을 가지고 롯을 떠난 것이나 조카에게 선택권을 양보한 것도 선행입니다. 대담 무쌍한 용기를 가지고 침입한 왕들을 추격한 것도 선행입니다.

소돔의 전리품을 자기가 가지지 아니하고, 그 손을 하나님께 들어 소돔왕으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아니한 것을 보여 온전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렸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행위였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것 중에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자를 경배한 것도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행위들이 오늘 주신 말씀에는 일체 언급되지도 아니했거니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사실에 대해서 그의 행위가 조그만 암시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름다운 생활을 해 온 아브라함이 그 아름다운 생활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 존전에 용납을 받았다고 할 것이면, 하물며 우리처럼 의롭지 못하게 살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우리의 경우 더욱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사실이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거론의 여지조차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죽으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 구원은 삯으로 된 것이 아니요, 순전히 은혜로 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아브라함까지도 그런 선행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 아니고 다만 믿음에 의롭다 인정받았다면, 하물며 불완전하기 끝이 없는 우리야 더욱 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받도록 간구해서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예식적인 규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것도 도덕적인 법칙의 행위로 된 것도 아니며, 어떤 예식적 법칙에 순종함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가령,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 그 자체는 귀한 예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없거니와 또 우리를 의롭게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성찬식에 주님이 정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도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1.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러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날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2.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3.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4.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별이 비치는 하늘 아래로 데리고 가서 쳐다보라고 명했습니다. 거룩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는 말씀이 당장에 내려진 것은 그가 제사를 드리기 전이었으며 거룩한 말을 하거나 단 하나의 어떤 행위도 하기 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참 믿음이면 우리 생활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조금이라도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거룩한 약속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2-25)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을 의롭게 했던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그 믿음이 그를 완전히 의롭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믿음이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전치 못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생각한 바입니다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 아내 때문에 생명이 위험할 것을 느낀 아브라함은 아내더러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고 시켰고, 그 때문에 부끄러울 정도의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그랬습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후에도 아직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습니다.

이제 다음 장에 나옵니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아니 그 성취 방법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서 자기의 하녀 하갈을 취해서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완전히 믿지 못한 것이 나타납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완전 무결한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좀 부족해도 작은 믿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작은 어린아이의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만 못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단순하고, 진실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으면 그 믿음이 크지 못하고 완전치 못해도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여, 나의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믿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해 줍니다. 약그릇을 들고 가는 손은 비록 떨리고 있지만 손이 약하다고 해서 약효를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생각한 말씀을 통해서 분명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인하거나, 예식으로 인하거나, 일부는 행위, 일부는 믿음으로 인하거나, 또는 그의 흠없는 완전 무결한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부족하나마 단순한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구속과 그 행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 그 자체가 우리의 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구약의 말씀은 말하자면 의롭다 인정받는 외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규정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믿음을 사람에게 의로 돌립니다.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것은 단지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베드로후서에도 같은 뜻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의는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의를 지닌 저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받으십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지했던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약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의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진리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사실이라고 선언하신 데 기초해야지, 그렇지 않고 유명한 목사나 존경받는 사람의 말이나 설득에 기초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후사에 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미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후손을 주시겠다고 벌써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 가운데 아브라함은 한 후손을 보았습니다.
갈라디아 3장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이지 단순히 추상적 진리에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까?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도저히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는데 그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도 바로 그런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율법 아래서 죽었습니다. 육신적으로 타락해서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통해서 살 것과 약속의 축복을 유업으로 받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광대하고도 놀라운 약속을 다루는 신앙입니다. 약속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믿음입니까?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연합한 상속자인 것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요, 크고 넓게 쟁취하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가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기록된 바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은혜롭게 믿음에 의한 완전한 칭의를 인식하게 될 때보다 분명하게 부르심의 사실을 식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왜 세상에서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고 칭함 받은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수록 그는 더욱 더 자기 사명에 감탄하며, 또 세상과 완전히 분리해서 그의 주님께만 오직 충성함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확고하게 하려고 열심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믿음은 보다 분명하게 약속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이끌어 내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년 전에 내리셨던 언약을 그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은 더욱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연후에 제사의 능력을 보도록 보다 분명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뿌림을 받은 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을 다 닫습니다. 그리스도께 합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을 때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보다 완전하고 명백하게 알게 된다면 그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소생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신학을 연구해야 합니까? 논쟁점을 다룬 책을 읽어야 합니까? 어떤 신비로운 예언을 들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영양소입니다. 그것이 계속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지만 제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제사만 본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보도록 인도 받았습니다. 제물은 쪼개어져 있었습니다. 언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들이 쪼개진 제물 사이에서 만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과 언약 관계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오직 제물의 한 중간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목 제물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제물 가운데 두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하나님을 만나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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