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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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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창 16:1-16)-박조준목사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서 우리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브라함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성령 안에서 행하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함으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꼭 성공하고 승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가 공포와 회의에 빠져 성령의 역사를 거슬렸을 때 그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아브라함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것은 너무 솔직합니다. 보통 경우는 어떤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할 때 그 사람에 대한 약점이나 실수한 일은 별로 기록하지 아니하고 장점, 잘한 점만을 확대해서 기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는 중에 누구에게도 치우침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 ‘인생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거울은 솔직합니다. 수정이 필요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그대로 보여 주고 추한 것은 추한 것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75세가 되었는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그리스도께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무엇을 주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직 무자하오니 제 상속자는 이 다메섹의 엘리에셀이니이다. 제게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제 집에서 자란 사람이 제 후사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니다. 네 몸에 난 사람이 네 후사가 될 것이니 저기 하늘을 쳐다보라. 저 수많은 별들을 네가 셀 수 있느냐? 이제 네 자손이 그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함입니다. 70이 넘은 할아버지더러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고 하신 말씀을 의심없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믿기 어려운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해가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창세기 16장에 보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85세가 되었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10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생리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출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 내외는 의논을 했습니다.
하루는 사라가 그의 남편 아브라함을 향해 이런 의견을 제의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우리 자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렇지.” “저도 그 약속을 믿어요. 그래서 10년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요? 저는 이미 출산을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는데 당신은 어떠세요?” “어떤 생각인데? 무슨 좋은 안이 있소?”
“예,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니 꼭 약속대로 이루어 주실 것은 틀림없어요.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죠. 저는 그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무슨 방법인데?” “나는 이미 생산할 형편이 못되니까.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약속하신 것은 이루어 주실 것인데 저 애굽에서 데려온 제 몸종 하갈이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 하갈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어 주실려는가 봐요.” “글쎄?”
“그래서 제가 생각한건데요. 제가 양해를 하니까 당신만 동의하면 제 몸종 하갈을 통해서 씨를 받읍시다.” 옛날 우리 나라에 소위 ‘씨받이’라는 것이 있었잖습니까. 사라가 그런 생각을 해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하도 옆에서 졸라대는 바람에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에 사라의 제안대로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보니 문제가 보통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삼각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갈이 잉태되고 나니까 주인 마님 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태도가 도도해졌습니다. 그 여주인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라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까?
“여보, 당신이 하갈한테 어떻게 해 주었기에 하갈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예요? 내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서 내 여종을 당신 품에 두었는데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안 다음부터는 나를 무시하니 이런 법이 세상 어디 있어요? 난 저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요. 당신이 한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빨리 처리하세요. 그냥 있으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요.” 하면서 바락바락 달려듭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이 퍽 난처해졌습니다.
“여보, 좀 고정하세요. 당신 여종은 당신 수중에 있는게 아니요?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세요. 나는 상관할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사라가 하갈을 학대해 집에 더 있지 못하고 도망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지 여기 인간의 생각이 개입될 때 사람이 잔꾀를 부리면 잘될 것 같지만 결국은 불화와 혼란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사랑 대신 미움이 싹트고 싸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범사에 조바심 있는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때는 바벨탑이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1000년 후에 있을 느브갓네살 왕 시대의 바벨론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문명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 죄악의 도시는 문명의 요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관계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젊은 내외가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도시 밖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 아버지와 친척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하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또 다시 떠나라고 명령하셨고, 그는 자기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그 성품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는 매사에 조바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회의 문이 열렸을 때 곧 들어가기를 주저하곤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를 떠나는 것을 주저한 것이 바로 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지의 땅에 가는데 안전을 기하기 위한 최후의 방편으로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안전을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조카 롯 때문에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불편한 일들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섯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너를 축복하겠다. 네 이름을 크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겠다. 너는 땅 위의 모든 복받은 민족의 조상될 것이다.” 이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만일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랐다면 그의 마음이 상하고 혼란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약속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불성실하게 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 후에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특별한 약속을 주셨는데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아브라함은 그 당시 75세로 아이를 낳기가 어려워도 불가능한 때는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기가 되기까지 기다리셨다가 나중에 전적인 기적으로 과거의 약속을 성취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어느 세대의 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그의 믿음을 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원칙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적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시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 받아야 합니다. 시험이 올 때 원망하거나 인간적인 해결 방법을 구하지 말고 이런 시험을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해결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방법대로만 하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훌륭해 보이고 인간의 계획이 현명해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밝혀 볼 수가 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라함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 기근이 심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애굽은 참된 안식처가 못되었습니다. 문명의 도시에서 기근에 시달린 광야로 나온 아브라함은 가까이에 있는 기근이 없는 곳을 찾았는데 거기가 바로 애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어디로 갈 것인지 묻지 않고 자기 가족을 데리고 이방 땅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곳과 비슷한 땅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대로만 따랐다면 거기서 그런 불명예스런 실패는 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무사히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워낙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부드럽게 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목장을 양보할 때 얼른 보면 시원스럽게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의 인간적인 안식처를 떠나는 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큰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평화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롯이 소돔 땅으로 옮겨 간 후 얼마 안 있어서 가나안 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엘람 왕인 그돌라오멜과 다른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정복하고 거기서 살던 주민들을 종으로 데려갔는데 그 중에는 롯과 그의 가족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포로 중에 한 사람이 도망쳐 나와서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고했을 때 그는 자기가 훈련시켰던 사람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가서 그들을 쳐 파하고,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 그리고 부녀자들을 도로 빼앗아 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 자신의 안전과 정신적인 안정을 돌보지 않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두려움이란 것이 우리 인간에게 끼치는 해독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도 계속해서 “두려워 말라.” 하신 말씀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실 때 이 두려움의 약점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두려움 때문에 비겁한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일이지만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 왕들은 후궁이 많았고 자기 아내와 처첩을 택하는데 결혼한 여자건, 안한 여자이건간에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겁이 났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게 “그대는 내 누이라고 말하라. 그렇게 되면 내가 안전해지고 그대의 까닭으로 나도 살리라.” 했습니다. 사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애굽의 눈에 띄게 되었고 왕 앞에 불려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녀의 오라비라고 생각한 왕은 그에게 정성껏 대접을 했고 사라를 그가 생각하는 대로 대했습니다.

나중에 이 일로 인해서 바로 왕이 하나님의 벌을 받고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죄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운 생각 때문에 그들은 결국 거기서 쫓겨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방인의 나라에서 큰 창피를 당해야만 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가나 하나님께서 양식과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다고 할 것이면 이런 수치스러운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한번만이 아닙니다. 몇 해 후에 이방 나라 왕인 아비멜렉 앞에서도 이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원인은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 끝에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면 알수록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고 두려움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가장 큰 상급이니라” 하셨습니다.(창 15:1)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최대의 상급으로 여기는 일에 주저했었습니다. 그 대신 인간적인 해결책을 강구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를 때 하나님은 그에게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이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생리적인 기적을 일으켜 이삭을 낳게 하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을 통해서 이삭을 낳기까지 아브라함은 때로 주저하며 때로는 거짓말도 해 가며 차츰차츰 그의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믿는 모든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그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절대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나중에 생각하겠습니다만 창세기 22장에 가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희생의 제물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아들을 데려가 그를 잡아 번제물로 드릴 준비를 했습니다. 어린 아들 이삭이 모리아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 드릴 양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는 아들 이삭에게 “내 아들아, 하나님이 받으실 번제에 쓸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 올라가 나무를 쌓고 아들을 묶어 단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이삭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칼을 멈추게 하신 후 “이제 네가 네 독자라도 나를 위해서 아끼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삭의 죽음 대신으로 산양 한 마리를 제물로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수십대 후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사건의 모형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였듯이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을 우리 위해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해 주시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본래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도 없던 아브라함이 히브리서 11장 9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자기 제단에 바칠 이삭을 반드시 살려 주시리라고 믿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약속대로 따른 데 있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답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일이 어떻게 될지 알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놀랍게 역사할 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아브라함이 역사상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 없는 일을 많이 하고, 실패하고, 망신하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을 허락해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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