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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성도입니다 (창 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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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도입니다(창 17:1-14)-박조준목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주신 은혜로운 방문의 시기는 “아브라함의 99세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생각과 수단으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 출생한지 13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13년 동안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별로 교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나눈 모든 교제는 통상적인 의식과 섭리의 방식을 통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용할 양식과도 다르며 오히려 가장 선한 성도들의 것도 아니지만 은총이 주는 특별한 위안이 때때로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세상적인 위안이 즐거움이 되지만 그것이 계속되는 잔치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지연되었습니다. 까닭은 아브라함이 지나치게 서둘러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은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기대하는 위안은 당연히 지연된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더 찬양 받게 되기 위함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는 시련도 더욱 많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그를 알게 하시며 믿음으로 그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 후에야 우리를 하나님의 계약 속으로 끌어들이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엎드렸습니다. 그 이전에도 여러번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밝은 빛으로 압도당하여 바로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도,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환상 앞에 엎드렸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고 그처럼 무가치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영광을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였고 하나님은 숭앙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계약과 교제를 맺는 자에게 이야기하시기 위해서 은혜스럽게도 그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야기하십니다.
잠언 6장 22절에 보면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들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교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지극히 겸손하고 경건하게 그에게 나아가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발 아래 엎드려 예배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생활 자세가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곧게 서서 성실하라는 것입니다. 은총의 계약은 질서정연하며 성실한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끊임없이 그의 말씀을 우리의 규율로 삼고 그의 영광을 우리의 최후의 목표로 생각하며 항상 그를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경건한 예배를 통해서 언제나 마음 속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곧게 서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의 권능하심에 우리들이 관계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긴다든지 하나님을 속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주는 은혜와 위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웁니다. 4절에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15절에는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을 얻었고,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 자녀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7절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있던 교인들 뿐만이 아니고 고린도에 있던 교인들도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똑같이 성도라고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에베소에서도 그렇게 불렀고, 빌립보서에서도 그렇게 불렀고, 골로새서에서도 역시 골로새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르셨고 사래를 사라라고 고쳐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세상에 속해 죄와 사망 가운데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성도라 불리게 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성도’라고 하는 말은 그 뜻이 ‘거룩한 이들’이란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무리’라고 할 수도 있고, ‘성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뜻이 무슨 뜻입니까? 과연 그때 모든 교인들은 그 성품과 생활이 거룩하게 변화가 되었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믿음과 생활이 온전했었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가 실수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가령, 신약 성경에 보아도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성도라고 부르기는 불렀지만 고린도 전서나 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당파를 일으킨 사람도 있었고, 7계를 범한 사람도 있었고, 송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범죄한 사람들이 그 가운데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던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말씀한 대로 그 뜻은 죄가 하나도 없어서 성도라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죄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완전해졌다고 하는 뜻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라가 완전했기 때문에 만민의 어미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을 성도라 불렀습니까?

가령, 우리 예배당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마련된 집이기 때문에 이 집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집을 지은 벽돌이나 시멘트나 철근이나 그밖의 모든 재료들이 다른 집을 지은 재료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사실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집은 본래 밑층은 예식장으로, 2층에는 식당으로, 그리고 그 위는 안마시술소로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다 사가지고 새로 내부공사를 해서 예배당 시설로 용도를 변경했습니다. 재료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집을 성전이라고 부르느냐 하면 이 집은 다른 모든 집과 구별해서, 성별해서 하나님께 바친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세상 사람에게 속한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집입니다. 그래서 이 집을 하나님의 집, 성전, 거룩한 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왜 성도라고 부릅니까? 왜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느냐 하면 그것도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불완전하고 때로는 죄를 짓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뜻대로 사용하시고 그의 목적대로 우리를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다 거룩한 무리라고, 성도라고 혹은 성자라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에서는 성자라고 하는 말은 좀 다른 의미에서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옛날부터 이 성자라는 말을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 국한해서 불렀습니다. 가령, 신약시대의 여러 사도들이나 유명한 분들에게 성자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 바울, 성 마가&8231;&8231;&8231;&8231;&8231;&8231;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밖에도 교회 역사상 유명한 교부들이나 유명한 순교자들에게 특별히 성자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 성 폴리갑 같은 이름을 특별히 주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 역사를 내려오면서 그들의 성품이나 생활이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거룩한 생활을 해서 교회 위원회가 이를 심사하고 정해서 모든 사람이 성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자라는 이름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자라는 이름을 주어서 가령 성 프랜시스니 성 캐더린이니 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특별히 성자라고 하는 이름을 주어서 그런 성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성도라고 하거나 성자라고 하는 뜻은 어떤 특수한 사람만을 가리킨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온전히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성도 혹은 성자라고 하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다 성도요, 성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아들과 딸 하나 하나를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과연 성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생각할 때 과연 이와 같이 귀한 이름을 받았으므로 이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5-16절에 이와 같은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귀한 성도의 이름을 받았으면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힘을 써야겠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속도(俗徒)’의 생활을 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러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또는 과거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과거에 거의 완전한 자리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여러 성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성도의 생활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 생활의 첫째 특색은 성결이었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입니다. 시편 24편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다시 말하면 손이 청결하고, 마음이 깨끗하고, 뜻이 깨끗하고, 입이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 속에 살지만 그 살은 짠물에 배이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속세에 살지만 더러운 물이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장 3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성도의 모습은 첫째, 성결에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표입니다. 도장입니다.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저가 할례의 표(sign)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seal)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할례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로 말하면 세례를 받음으로 성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성도가 되는데 할례나 세례는 그 표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이 계약은 이루어질 것이며, 때가 이르게 되면 가나안 땅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그것으로써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 저들의 소유가 된 후에도 이 의식을 계속하는 것은 이러한 약속들이 보다 미래에 있을 또 다른 가나안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계속하여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피를 흘리는 의식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것은 피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이제는 피 흘리는 모든 의식은 폐지되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세례로 대치된 것입니다. 할례는 포피(包皮)를 잘라 내는 것인데 이것은 세상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사실은 육신의 할례보다도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세요. 한번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당신이 정말 메시야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보통 사람 같으면 “이 사람들아, 내가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그 사람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고 가서 말하라. 그리고 메시야이고 아닌 것은 너희가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고 묻는 사람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보고서 당신이 판단하시오.”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보고 예수 믿는 선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시오. 내가 공부하는 것이나 활동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말해 보시오. 내가 장사하면서 손님 대접하고, 물건 팔고 사는 것을 보고, 돈 거래하는 것 보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시오. 내가 사무보며 손님 대접하는 것 보고 예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시오. 내가 정치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 믿는 정치가인지 아닌지를 말해 보시오.”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은 그의 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살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한 생활을 해 온 아브라함도 그의 생활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 무슨 의식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4장 9절에 보면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미 할례 받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은 도덕적인 행위로 인한 것도 아니며 또는 어떤 예식적인 것에 순종함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식은 하나의 인친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신교에서는 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성례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세례 그 자체는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없거니와 또 우리를 의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못됩니다.

단지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상징적인 의식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으로만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감정의 체험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놀라운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을 즐기는 것이라면 기독교가 아편이라는 무신론자들의 비난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비밀 장소의 경험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무실에서 나아가면 무서운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에 충만했던 감격스러운 은혜의 체험이 약해지고 굳은 결심이 풀려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께 새 능력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의 특색은 내가 없는 봉사입니다. 말이 없는 봉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데 말이 많습니다. 참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나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말이 없습니다.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병자를 돌봐 주고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고 김 못 매는 사람이 있으면 김 매주고, 추수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해 주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의 나병환자들만 사는 섬에서 일생을 바친 다미엔 신부를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슈바이처를 왜 우리가 존경합니까? 그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내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일본의 하천풍언 목사 같은 분도 내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봉사가 귀하지만 ‘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산속에 피는 꽃은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꽃이 피어 향기를 온 골짜기에 채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민의 아버지’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을 주셨습니다. ‘성도’라 이름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도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이 험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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