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눈을 밝히소서 (창 21:1-21)

첨부 1



내 눈을 밝히소서(창 21:1-21)-박조준목사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권고하셔서, 사라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잉태하고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 나이가 100세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옛날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지금보다 길었습니다. 그러나 100세는 자식을 낳기에 너무 늦은 나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이삭을 얻음으로 기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6절에 보니까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만 그 당시에는 가정에 자녀가 없을 때 그것을 여자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나이는 점점 들어 노년이 되어 가는데도 자녀가 없으니까 사라는 그 책임을 자기 때문이라고 느끼고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고, 못할 일이라도 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되었는데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신 후였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무엇을 주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직 무자하오니 제 상속자는 이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다. 제게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제 집에서 자란 사람이 제 후사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 몸에서 난 사람이 네 후사가 될 것이니 저기 하늘을 쳐다보라. 저 수 많은 별들을 네가 셀 수 있느냐? 이제, 네 자손이 그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을 말합니다.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더러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이미 아들이 10여 형제 되고 손자가 수십명될 때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을 내다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하실 때는 아직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믿기 어려운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에 보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85세가 되었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그대로 믿었는데 10년이 지났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생리적으로 이미 출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라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착잡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주실 것은 틀림없는 일인데 사라 자신은 이제 생산할 처지는 못되고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는가?
하루는 사라가 그의 남편 아브라함을 향해 이런 안을 내놓았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우리 자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별로 힘이 없이 대답합니다. “아무렴.” “그런데 저는 이미 출산할 형편이 못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러 가지로 생각을 많이 해 봤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은 틀림없는 일,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10여 년을 하루같이 기다렸어요.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아, 그러게 말이요.”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에 대답을 합니다.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보, 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찾아냈어요.”
“묘안이 뭔데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법 문제예요.”
“어떤 방법인데?”
“제가 애굽에서 데려온 제 몸종 하갈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아브라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 생각은, 제 생각은요,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려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저는 양해를 할테니까 당신이 동의하시면 제 몸종 하갈을 통해서 우리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도록 합시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제의한 내용을 들으니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하도 강하게,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제의하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도 움직여서 결국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로 했습니다.

저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자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안을 제의한 사라의 마음이 즐거울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도 소위 ‘씨받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본부인이 생산을 못할 때 순전히 자식을 얻기 위해서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서 자식을 받아 오는 것인데, 당시의 사회 환경과 풍습이 그래서 그런 일을 하긴 했어도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마음이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사라도 하도 안타깝고 답답해서 이런 안을 내고 그대로 했는데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몸종 하갈이 그 상전 사라를 대하는 태도며 눈빛이 달라지고 말의 톤(tone)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사라가 평안할 수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속상한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여보, 당신이 어떻게 했기에 하갈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저렇게 오만불손할 수가 있습니까? 아이구 가슴이야, 나는 이제 못 살아.” 하면서 달려듭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지 인간의 생각이 개입될 때 인간의 잔꾀가 잘 될 것 같지만 결국은 혼란을 초래하게 되고 비극적인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웃음이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매일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창세기 16장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리고 17장 첫 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는데, 그때의 나이가 99세였습니다. 그러니까 13년 동안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에서 떠나 자기 생각대로 한 때부터 아브라함을 떠났다.” 다시 말하면 13년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아브라함의 가정은 불안과 공포, 시기와 다툼의 분위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 생각대로 하여 얻은 이스마엘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만족과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근심과 걱정 그리고 다툼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자라면서 그 가정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00살 나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얻은 아들 이삭을 이스마엘이 희롱을 합니다. 그러니 이 광경을 본 사라의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달려들어 야단을 합니다. “여보, 당신이 어떻게 하였길래 저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우리 아들 이삭을 희롱하게 합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이제 가정의 질서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가 됐어요? 우리 집이 언제부터 이렇게 첩의 자식이 판을 치게 됐어요?” 아브라함은 입장이 퍽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눈치를 보면서 힘없이 대꾸합니다.
“아, 글쎄. 내가 그 애들한테 어떻게 하긴 어떻게 했겠어요? 그저 그 애가 그러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주의를 주어야지, 원. 그러면 되나?”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그의 뒤를 이을 약속의 자손입니다. 이삭이 귀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 역시 사라의 몸종을 통해 나은 아이였으나 자기 씨를 받은 자식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입장은 퍽 난처했습니다.
이스마엘에게 무슨 말을 하면 하갈은 또 가만 있겠습니까? “여보, 영감. 내가 무슨 죄가 있어요? 당신들 때문에 나는 젊은 나이에 제물된 것밖에 더 있어요? 우리 이스마엘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요? 나는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 하면서 가슴을 치며 눈물짓는 하갈을 보고 아브라함의 마음 역시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사라에게서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여보, 저 하갈하고 이스마엘을 당장 내쫓으세요. 만일 당신이 우물우물하고 있으면 나 가만 있지 못해요. 어떻게 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가 있겠어요?”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사람 편에서 볼 때 일이 된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말할 수 없는 고민 가운데 빠져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12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언제까지나 둘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릴 수가 없습니다. 머뭇거리는 한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한 쪽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잘라 버리고 내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결단을 내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먼저 떠나게 했습니다.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무조건 떠났습니다. 얼마를 가는 동안에 물병에 물이 떨어졌습니다. 어린 아이는 목이 말라 하는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어린 이스마엘은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합니다. 밥은 한두끼 굶어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은데 목이 마른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목말라 괴로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인가도 없는 광야에서 이런 일을 당했으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하갈은 기진해서 쓰러져 있는 아들 이스마엘을 땅에 눕힌 채 어린 자식이 목말라 죽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한참 떨어진 데 나아가 하늘을 향해 대성통곡했습니다.

오늘도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방황하며 괴로워하고, 목말라하고, 절망 상태에 빠진 사람이 우리 생활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하갈은 너무 기가 막히고 겁이 나서 대성통곡했지만 바로 자기 옆에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갈의 마음이 혼란해서 눈이 있어도 바로 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허겁지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광야같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목이 말라 애타하면서도 그 눈이 어두워 곁에 있는 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샘이 바로 옆에 있었어도 그 눈이 어두워서 샘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초조하고, 절망과 좌절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샘물은 사실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걸어가고 있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모두가 목이 말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이 지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샘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샘물을 발견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샘물, 우리의 갈한 목을 적시고도 남을 샘물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을 밝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공관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실 때 바디메오라는 소경이 거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못 고치는 병이 없으신 예수라는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바디메오는 물었습니다.
“지금 누가 지나갑니까?” 그러나 자기 일에 바쁜 행인들은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말에 제대로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행인들에게 물으니까 어떤 사람이 귀찮다는 듯이 “예수가 지나가!” 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때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거듭거듭 소리질렀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이 그를 오라 하시고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바디메오는 다른 말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한 마디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필요한 요구입니까? 그는 정말 바로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간구대로 이루어져서 당장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앞을 보는 것입니다. 앞을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샘물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옆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어두워서 샘물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같은 세상을 걸어가며 목이 말라 괴롭습니까? 괴로워하고 계시지만 마세요. “내 눈을 밝혀 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그리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가 찾고 있는 바로 그것을 발견하고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내가 어떻게 하면 만족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밝아지면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가 만족합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내가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염려합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지면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신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나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죄를 그에게 고백함으로 용서받는 축복을 얻을 뿐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길이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데 있습니다. 힘든 길이 아닙니다. 매우 쉽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지금 그 말씀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이야 그런 혜택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이 풍성하고 만족스러운 축복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나 오라 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지금 수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수고를 포기하고, 그 무거운 짐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아오세요. 그러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령이 목이 말라 애타하는 여러분, 주저하지 마세요. 의심하지 마세요. 샘물을 발견하였거든 물러서지 말고 당장 앞으로 나아와 마시십시오. 이 물은 바로 우리를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끝으로, 이 샘물을 마시는데 사람편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하갈이 한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가죽 부대를 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꺼내서 아들 입에 갖다 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곤경 속에서 건짐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가죽 부대를 샘물에 담그는 것처럼 내 삶 전체를 생명수 샘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담그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주님에게 온전히 의지하세요. 나 자신을 주님께 맡기세요. 그럴 때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믿음의 식구 한분 한분의 눈을 밝혀 주옵소서. 그래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에 생명의 샘물이 솟고 있는 것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빈 병을 이 샘물에 완전히 잠가 생명의 샘물로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 수많은 하갈과 같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옵소서. 그래서 생명의 샘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옵소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