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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숙한 여인을 찾으시오 (창 24: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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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3장 첫머리에 아브라함이 슬픈 사건을 당한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아브라함의 사랑을 온몸에 지니고 살아왔던 만민의 어머니 사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세상을 떠납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던 아내도, 아내의 사랑을 받던 남편도 세상을 떠납니다. 100년이 넘게 장수한 사람도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늘 같이 지내며, 매일 보고 교제하고 살면 늙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 서로 헤어졌다가 만나면 중년 이후에는 늙은 것이 눈에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2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죽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 왔다가 한번 가는 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엄연한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 잊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에서 지적한 대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다가 없어집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무상하기 그지없는 인생길을 정확하게 보고 어리석은 자처럼, 이 땅 위에 영원히 사는 것처럼 살지 말고, 내일 죽을 사람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면” 하는 생각과 자세로 사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이 잔칫집에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혹 어떤 이는 “그때 가서 하지.” 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누구도 모릅니다. 인생의 황혼이 언제 올지 누구도 모릅니다. 잠깐 지나갑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갈 때는 다 놓고 갑니다.

제가 어릴 때 여름철에 친구들과 더불어 ‘땅 따먹기’라는 놀이를 하곤 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지내 놓고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그 놀이를 할 때는 그렇게 심각할 수가 없습니다.
한 뼘을 먹어도 조금이라도 더 먹어 보려고 손가락 마디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손가락이 찢어질 정도로 눌러서 그 점을 그리느라고 하고 어떤 때는 상대방의 눈치를 보다가 다른 데를 보는 것 같으면 조금 더 나아가서 먹다가 들켜서 싸움이 붙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한 뼘만 더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고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마음의 뿌듯함이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열중합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저녁이 다 되었으니 어서 들어와 저녁 먹으라고 하면 “예!” 하면서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아까 그렇게 열을 올려 따 놓았던 땅이 다 뉘 것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높아져 보려고, 조금 더 모아 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친구도 친척도 다 소용 없고, 의리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그저 눈이 벌개서 돈, 돈, 돈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면 다 무엇합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북한에서 이곳으로 남하하여 여러 가지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만큼 되기까지 그저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돈을 벌었습니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고 해서 돈을 좀 벌었습니다. 60평생 양복이란 것은 입어 보지도 못했고 꼭 잠바만 입고 작업복으로 살았습니다.
돈 빌려 갔던 사람이 미처 갚지 못하게 되어 파산 지경에 이르니까 그 집 물건 싹쓸이해 오면서 자동차까지 가져 왔는데 자기 이름으로 명의 변경까지 다 해 놓긴 했지만 휘발유값 아깝다고 타는 차가 아니고 보는 차로 차고에 그냥 세워 놓고 아침과 저녁으로 인사차 한번씩 들러서 안부를 확인만 하곤 했습니다. 하여간 돈 안 쓰기로 유명했습니다.

평생 가게에서 점심은 700원짜리 짜장면만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니 누가 좀 도와 달라고 해도 도와 줄 줄도 모르고, 좋은 사업에 좀 기부하라고 해도 필요없다고 거절하고, 자기 돈은 일원 하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야단을 쳐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이 저렇게 돈만 모은다고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고 그러는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부자 욕하는 것은 가난뱅이라”고 하면서 계속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60이 넘어서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내가 그 동안 돈 좀 모으느라고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살았지만 이제는 재산이 그래도 계산해 보면 100억은 되니 먹을 걱정은 없게 됐다. 그리고 이 빌딩에서 매달 들어오는 수입만 해도 먹을 정도는 되고 자리가 나지 않을 것이니, 그 동안 내가 돈 모은다고 짜장면으로 배를 채웠지만, 이제는 그렇게 먹고 싶었던 쇠고기나 죽을 때까지 마음껏 먹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햄버거를 많이 사다 냉장고 냉동실에 넣고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그저 한끼도 빠짐없이 짜장면 대신에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계속 햄버거를 먹으니까 전보다 몸이 많이 불었습니다.
“역시 사람이 잘 먹어야 살이 오르는구나!” 하면서 속마음으로 그렇게 흐뭇할 수도 없었습니다. 6개월 이상 그렇게 먹었는데 그만 동맥경화증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입니다. 애굽 격언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너무 옳습니다. 아마 수의에 주머니가 있다면 다 쓸어 넣고 갈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시편 90편 9-10절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렇습니다. 빨리 지나갑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젊은 분들 가운데는 “글쎄요. 저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데요. 저도 늙을 때가 있을까요? 요새 같아서는 시간이 좀 빨리 지나가서 나이가 들어 봤으면 좋겠는데요!”

저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27세에 목사 안수 받고 목회를 하는데 장로님들은 다 제 아버님벌 되시는 나이신데 제가 너무 어려서 저는 어서 “나도 나이가 좀 들어서 목회를 했으면.”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나이가 좀 들어보이려고 옷도 신경을 써 가며 입곤 했습니다.
게다가 기도하시는 분들이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는 꼭 ‘젊은 종 박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고맙기는 하면서도 그 ‘젊은 종’이란 말을 빼고 했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말이 빠졌습니다.
요즘은 저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젊은 종 박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노종 박 목사님, 노종 박 목사님’ 하면서 기도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잠깐입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가정을 이루고 사시는 여러분, 서로가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사나요? 친구 사이에도 우의를 지키며 다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남은 날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합시다. 얼마나 오래 살겠다고 그러겠습니까?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돈에 매여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다 놓고 갈 것인데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라가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23장 2절에 보니까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며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와 같이 산 것이 100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이제 사라를 먼저 보내고 나니 아브라함은 지난 100년 동안 사라와 같이 살면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 대해서 진정 마음 깊은 데서부터 슬픔이 솟아났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이방 사람에게 수치스러운 일도 당했고, 망신도 여러번 당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식이 생기지 않아 고민하다가 사라의 제안으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 했던 것이 근본부터 잘못되어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사랑에 금이 가고,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이제 사라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그 일로 인하여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잠들어 있는 장막 안에 들어가서 그칠 줄 모르는 눈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퍼하고 애통해 했습니다. 모두가 아내에게 대하여 잘못한 것만 생각나서 후회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제 창세기 24장에 보니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겐 그의 늙은 종 그러니까 창세기 15장 2절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소유와 재산을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상속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장성한 아들 이삭이 이방 사람 가나안 처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 종은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가서 그의 친척들 중에서 젊은 여인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요즘 같으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함께 살아야 할 배필을 다른 사람이 골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런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 가정에서 아들을 낳고 저 가정에서 딸을 낳으면 부모들끼리 우리 서로 사돈을 맺자고 한 후에 그들이 자라면 같이 결혼해서 살게 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꼭 옳은 결혼제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때때로 어른들이 우리 자신들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알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요즘 우리 사회의 경우 두 가지가 겸행합니다. 순전히 자유결혼이 있습니다. 당사자 본인들끼리 서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잘하면 부모의 동의를 얻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결혼을 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변의 다른 사람이 혹은 부모가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을 보아서 객관적으로 괜찮아 보이니까 서로 교제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어느 정도 서로 좋아 보이면 결혼하는 경우입니다.
어느 경우나 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도대체 결혼이란 모험입니다. 며칠 동안 교제하는 동안에 상대방을 다 알 수는 전혀 없습니다. 몇 년을 두고 교제했다고 해서 완전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제할 때와 결혼하고 난 후에 생기는 일은 상상 못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극복할 때 결혼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부딪칠 때 생기는 충격은 아주 큰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잘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뜻하지 않았던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마지막 장면은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4장 마지막 절에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소박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이삭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아내를 품에 안고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깊은 의미를 찾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때때로 아주 특별하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인도하시는가를 미리 마음에 그렸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정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를 위해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날 좋은 일들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그것들을 상상하고, 그것들을 단언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엘리에셀이 요청한 사인은 구체적인 것이었지만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물가에 있는 처녀 중 주인 아들의 아내가 될 처녀는 그들에게 물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끌고 온 10마리의 낙타에게도 물을 제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충분히 동정적인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10마리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데 드는 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자그마한 테스트로 그 종은 리브가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야 유목민 목자의 아내로서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에셀이 찾고 있었던 자질은 그의 주인인 배우자로서의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16절에서 리브가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요구한 것들 중에 하나가 아닌 보너스였습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주인 아들의 아내로서, 유목민 목자의 아내로서 적합한 사람을 구했더니 하나님은 그 모든 조건을 채워 주시고 아름다운 것까지 곁들여 주셨습니다. 엘리에셀의 요구는 그대로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리브가는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잠언 31장 10절에 보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드뭅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은 많지만 인격이 아름다운 여인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외모의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오래갑니까? 잠언 31장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살림을 잘합니다. 여기 리브가의 경우 손님들에게 물을 대접하고 그들이 끌고 온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낭비하지 아니합니다. 불평하지 아니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 선을 행합니다. 남편에게 손해되는 일을 하지 아니합니다. 남편이 혹시 낙심되거나 상심했을 때 부드러운 말로 그를 위로하며 감싸주며 새 힘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남편의 명예를 높입니다. 그러기에 내려오는 말에 “한 남자가 성공하는 데는 두 여인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한 여인은 그를 낳아 기른 어머니의 손이요 다른 한 여인은 그를 보필하는 아내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합니다. 잠언에 보면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일한다.”고 했습니다. 양털은 겨울 옷을 위한 준비이고 삼은 여름 옷을 위한 준비입니다.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는 가정에 행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사상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압니다. 잠언 31장 20절에 보면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열심히 벌어들이며 알뜰하게 꾸려 나가며 구제하는 데도 열심입니다.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는데 하나님께 구제하는 것이 상달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현숙한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경건해서 양심의 원리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의 인도와 주관대로 살아갑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심려의 아름다움은 영원한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판단이 설 때 낯선 남자를 따라서 알지도 못하고 만나 보지도 못한 남자와 함께 살겠다고 오라비의 만류에도 엘리에셀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도 사랑을 받으며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성읍 백성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됩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자매님 여러분, 우리가 같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혹시 손가락질 받는 대상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매님들 모두가 현숙한 여인 리브가처럼 축복 받는 여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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