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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서를 생각하라 (창 2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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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를 생각하라(창 27:1-23)-박조준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은 명예나 지위가 있는 가정도 아니고 돈이 많은 가정도 아닙니다. 가장 행복한 가정은 온 가족이 다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어떤 가정은 온 식구가 다 구원받은 것을 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들과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예수를 믿으니 이보다도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축복을 받은 가정도 있지만 아직도 그 축복이 완전치 못한 가정도 있습니다. 방주에 있던 노아의 가족이 그랬습니다. 셈과 야벳 그밖에 그들의 아내들은 다 믿는 사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유독 함이란 사람은 세속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이삭의 가정이 그랬습니다. 이삭의 가정은 식구라야 별로 크지 않은 아들 둘만의 가정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하나는 믿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아들 하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으로 육신에 속해서 정욕대로 살았고 세상 의지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에서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볼 때는 담대하고, 씩씩하고, 활동적이고 남자다웠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깊이 생각할 것 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퍽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생 야곱이 쑤고 있는 팥죽을 보고 환장해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였습니다.

에서는 몸이 건강하고 사냥하는 기술이 있으니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걸치고 대상들이 하듯이 세상 재미를 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이처럼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주 좋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처럼 장자권을 생명 이상의 귀한 것으로 여겨 장자권을 사기 위해서 별미를 제공하고 자기는 굶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원했는데, 에서는 그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에서는 한 마디로 불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그의 불경건성을 보이기 위해 장자의 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고 포기했으며, 그의 결혼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큰 슬픔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에서가 두 아내와 동시에 결혼했기 때문에 잘못을 범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혹 어떤 이는 에서가 아브라함의 축복의 대상이 아닌 이방인이요, 노아의 저주를 받은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속되게 살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에서의 결혼은 착하고 온유한 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에서는 결혼할 때 부모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부모의 충고나 동의도 없이 결혼을 했습니다.

요즘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에서는 그의 부모들의 결혼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아무런 신앙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헷 족속의 딸과 결혼한 것이 부모들에게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짐작이지만 에서가 결혼한 그 아내들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불경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슬픔을 안겨준 원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그들이 거하는 이방 족속들과 관계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방 사람들은 단순히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 성품이 아주 더러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범하면서도 당연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대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매우 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곳 사람들과 전혀 아는 체 하지 아니하고 지냈었습니다. 이삭은 이처럼 자기 가족이 비록 죄악된 세상에 살더라도 그 세상에 물들지 않고 분리되고 구별되게 살아가기를 원했지만, 에서가 결혼한 이방의 여인들이 있는 이상 자연히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가정의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에서의 아내들은 그 가정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을 이해도 못할 뿐더러 가정의 경건를 해치는 언사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가정을 축복해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시련과 걱정을 일으키는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우리 젊은이가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나 때문에 아버지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머님의 뺨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잘못된 길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다른 식구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으며 명예에 손상을 입습니까?

에서의 존재가 이삭의 가정에서는 이렇게 많은 과오를 빚어 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보십시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것은 이삭이 유언을 하고 자기 상속자로 에서를 세우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메시아와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은 위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맡겨졌습니다. 거기에는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이 내포되어 있었고, 또한 그것의 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삭은 이제 너무 나이가 많아서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이 지닌 모든 명예와 능력을 한 데 묶어 맏아들 에서에게 상속해 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일상적인 상속법대로 본능적인 애정에 따라 처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 자세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하기보다는 우리의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하기가 쉽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꼭 가야 할 길을 놓치고 말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보는 것은 보통으로 외부적입니다. 그의 인물, 학식, 재산, 능력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는데 이새의 가정에서는 으레히 맏아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엘리압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일곱째 아들까지 다 지나가게 했으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 여덟째 아들은 양치러 나가 있는데 데려오라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보는 눈과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다릅니다.

이삭이 나이 들어 점점 허약해져서 죽기 전에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언제 떠나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 우리는 그날 해야 할 일을 그날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서 잡아 온 짐승으로 맛있는 요리를 해서 그것을 먹고 맑은 정신으로 힘을 내서 축복하려 했습니다. 더구나 이삭이 에서에게 은총을 쏟기 전에 먼저 자기 아들의 효도를 받고 싶은 단순한 부모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에서가 결혼을 한 다음에는 그가 사냥한 고기를 아내들에게만 갖다 주고 자기 아버지에게는 갖다 주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아들 말 태우면 사촌 된다.” 했던데 그랬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아내가 둘이었으니까 제 가끔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니까 에서에게 둘 사이에서 아버지를 공경할만한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비극적인 일입니다. 한 가정에 믿음 없는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말할 수 없습니다.
에서 한 사람이 경건하게 살지 못함으로 받은 영향이 얼마나 큽니까? 무엇보다도 가족 사이에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믿지 못하고 부모 자녀 사이에 믿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해 주고자 했으면서도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아내 모르게 했으니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의 반대가 있을 것 같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말씀하신 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사실을 내걸고 반대할 것이 두려워 그랬습니다. 이삭은 아내를 믿지 못했습니다. 앞에 에서가 있고, 기회는 좋다 생각하고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보통으로 남편이 자기가 할 일을 아내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도 남편을 신뢰하지 아니합니다. 리브가는 남편과 에서가 하는 작은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글쎄요. 이것은 짐작입니다만 리브가는 남편과 에서가 만나면 무슨 말을 주고 받나 해서 항상 엿듣곤 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도 남편의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여보,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은 일을 하십니다”고 충고했어야 옳았을 것인데 말은 아예 하지 아니하고 자기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이삭으로 말하면 본래 그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내의 충고가 있으면 그 충고를 받아들일 아량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그렇게 생각지 아니하고 “흥, 당신이 우리 모르게 음모를 쓰고 있구려. 나도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기어코 당신 음모를 깨뜨리고 말거요. 당신은 그저 에서밖에는 모르지요. 어디 두고 봅시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갔습니다. 그래서 에서 대신 야곱이 축복을 받게 준비를 다 했습니다.

리브가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것 보세요. 이삭은 축복을 주자고 애를 썼고 리브가는 선수를 쓰자고 애를 썼고, 야곱은 자기가 축복을 빼앗아 가노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사람 모두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할 때 이것이 한 가정에서 얼마나 슬픈 일이며 비참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손 안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올바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짐을 우리 스스로 짊어지겠다고 나설 때 우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삭은 하나님의 목적과는 반대로 에서에게 축복을 빌어 주려 했었습니다. 리브가는 현실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략을 짜게 되었습니다. 야곱도 옳은 일을 수행하는데 자신감이 없어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면서 옳게 하자는 것이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리브가의 할 일도 아니며 야곱의 일도 아닙니다. 그들의 의무는 옳은 일만 행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기들 생각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이삭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낸 사람으로 우리가 아는 대로 화해의 사람입니다. 그는 흔히 황혼 들판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조용하고 온순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블레셋 사람과도 싸울 수밖에 없을 때 피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미덕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실수하게 했습니다. 그는 너무 착해서 “아니요”라는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아귀다툼을 하려 하지 않고 에서의 화가 자기에게 오는 것이 싫어서 그만 에서에게 축복해 주기로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도 모르게 에서에게 감쪽같이 축복해 주면 이 축복의 문제 때문에 일어날 가정적인 불상사를 피하게 될 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이삭은 축복을 전하는데 아주 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서둘러 행하려 했습니다. 이삭의 잘못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잊은 데 있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순전히 인간적인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유순하니까 자기와 반대되는 기질을 가진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노인 이삭은 하나님의 생각을 앞질러 축복을 비밀히 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 이삭의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훌륭한 여자였습니다. 그래도 잘못을 범했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내리는 축복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축복을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야곱이 받기를 갈망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신 것을 리브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략에 빠지지 않기를 힘썼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지 않고 자기가 이 일에 힘쓰려고 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면 무엇이든지 바치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만일 그의 계략이 잘못되는 날이면 “네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손해 볼 일은 아예 한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야곱은 그러면서 영적인 축복을 갈망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행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진실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깨달을 때 고쳐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삭이 자기가 에서를 축복하려는 소원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내가 이미 야곱을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안 것을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 역시 자기가 만들어 놓았던 과오를 알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리브가는 아들을 포기하고 멀리 떠나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빈 축복이 그대로 임하게 하기 위해서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집을 떠나는 바로 그날부터 발전의 길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나그네 신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맡겨 버렸습니다. 야곱은 그날부터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이들 모두가 잘못은 하였지만 회개함으로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겪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 가족은 뿔뿔이 헤어지는 이산 가족이 되었습니다. 함께 있었으면 불상사를 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야곱은 부득이 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은 받았지만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삭은 오래 살아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40년 동안 아들과 헤어져 살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리브가는 자기의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리브가는 자기가 아들을 외삼촌 집에 보낼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야곱을 보세요.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만사가 잘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슬픔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주의 종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노라.”고 했습니다. 그의 범죄 사실은 일평생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야곱은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랬더니 장인 라반이 야곱을 속였습니다. 속이고 속는 세상입니다. 야곱이 나이가 들었을 때는 아들들에게 또 속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오는 세상에서의 형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범한 모든 죄에 따르는 체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가 그치지 않게 하십시다. 부모가 자녀에게 모범이 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은 교회의 힘이요, 나라의 영광입니다.

끝으로, 축복을 잃은 에서를 보십시다. 에서는 거룩한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장차 올 축복에 대해서도 일체 무관심했습니다. 자기의 활과 칼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오늘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돈 있으면 되지. 공부해서 실력 있고 이만한 자리 차지했으면 되지.” 하고 세상 의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에서는 이 세상도 원하고 다음 세상도 원했습니다. 팥죽도 원하고 장자권도 원했습니다. 그는 블레셋 가문의 아내를 얻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는 축복도 가지려고 했습니다.

요한 번연이 말한 욕심과 인내의 경우와 같습니다. 욕심은 먼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취하는데 인내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맨 나중에 택합니다. 욕심은 자기의 모든 최고의 것을 취한 뒤 그대로 앉아 있는 인내를 보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자기가 지닌 최고의 것을 다 써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인내는 아직도 최고의 것을 나중에 두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 번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심에겐 끝에 가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지만 인내에게 속한 귀한 것들은 영원히 그대로 있더라.”

야곱은 영에 속한 것을 택했기 때문에 영원했지만 에서는 영에 속한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영적인 것에 대해 소리쳐 보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온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되기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식구 때문에 다른 식구가 겪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시다. 사람의 잔꾀가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 것 버리고 하늘의 것을 택하십시다. 세상 것은 잠깐이요, 하늘의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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