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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물의 축복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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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물의 축복(출 15:22-27)

지난주에 우리들은 '광야의 삶은 축복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광야는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기막히게 아름답고 상상할 수 없는 축복과 기적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지난주에는 네가지 관점을 가지고 '광야의 삶은 축복이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첫번째로 광야의 삶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두번째, 광야의 삶이 축복인 이유는 광야는 사느냐 죽느냐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곳이지만 그 곳을 통과하면서 겸손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광야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 갈 곳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광야는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으면 죽을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네번째, 광야의 삶이 축복인 이유는 양육을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양육을 받는 사람은 변화를 받고 열매를 맺습니다. 광야는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겸손해질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법을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아름답고 신나고 축복된 곳입니다.
하나님은 보물찾기를 하듯이 광야같은 세상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복들을 심어 놓아 주셨습니다.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복이 내 앞에 굴러 들어와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다 보내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자기것으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하나님이 숨겨놓은 광야의 복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복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과정이다

가끔 큰 산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처녀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 속에 숨어있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기막힌 안식처가, 푸른 초장이, 잔잔한 시냇가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설교를 통하여 여러분이 이 축복을 발견해서 눈물대신에 기쁨이, 불만과 불평대신에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오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 축복이 여기에 있다'고 소리지르며 간증하기를 바랍니다.
첫번째 축복은 단물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지만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광야로 먼저 인도했습니다. 광야에서 삼일동안 헤맸지만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하나님이 숨겨놓은 물을 발견했습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홍해가 갈라진 것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고 광야로 갔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잠깐 있어야 할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우리는 성실하게 통과해야 합니다.
처음에 그들이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먹을 물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아무리 큰 기적을 보았다 하더라도 현실의 작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 사람들은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별것도 아닌 문제로 우리는 늘 고민합니다. 광야에서 3일을 지낸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딘가 무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라고 기대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많습니다. 기대를 했는데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럴리가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럴리가 없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샘물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뛰어가서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그 물은 먹을 물이 아니라 쓴물이었습니다. 오히려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물을 먹고 배탈난 사람도 있었고 병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속으로 '하나님은 뭐 하시는 거냐'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일전의 기적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배신감과 3일 동안 목마른 갈등앞에서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직접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지만 사실 그 원망은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어떻게 불평을 했는지 23, 24절을 보겠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의 광야의 현실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기적 다음에는 고통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상식적으로 기적이나 축복 다음에는 역시 기적이나 축복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홍해의 기적이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고통이 올 수 있습니다.
고통을 겪을 때는 영원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입니다.
기적 뒤에는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과 고난이라는 두 양면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합니다. 복만 계속 주면 우리는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십니다.
목마름, 기다림, 부족함, 육체적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기도하는 지도자

두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사실은 사람은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감사와 찬송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지난주에도 설교했지만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깊이 생각해보거나 기다려보거나 다시 한번 검증을 해보고 말하지 않고, 그저 느끼는대로 생각나는대로 말하기가 쉽습니다.
부족함이란 채워짐을 위한 기다림이고 기다림이란 만남을 위한 것입니다. 고통이란 축복을 위하여 예비된 것입니다. 밤이 깊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왔다는 말인것처럼, 고난이 깊다는 말은 축복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이 광야생활을 인내하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여러분에게 상상할 수 없는 복의 물줄기들이 쏟아질 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복을 앞에 두고 뒤돌아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참된 지도자는 비판과 원망과 불평을 듣습니다. 이것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비난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나가셨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과 원망과 불평을 들을때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25절을 보면 모세는 원망을 들을때 여호와 앞에 나가 부르짖었습니다. 엉뚱한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논쟁해서라도 따지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참된 리더십이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40세 때 혈기의 사람이었습니다.'혈기 부린다'는 소리는 동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이 애굽사람에게 구박을 받고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대개 애국자들은 혈기가 많습니다. 투쟁을 많이 하고 순교까지 합니다.
모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애국심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본 모세는 싸우지 말라고 간섭을 했다가 동족들로 하여금 공격을 받습니다.
혈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모습으로 40년 동안 광야에 쫓겨나가 기가 막힌 세월을 보냅니다. 광야의 40년은 약속도, 하나님의 음성도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비참한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꿈이 있는 사람은 눈이 빛납니다. 미래가 없는 삶은 동물의 삶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세는 이런 세월을 지내면서 겸손한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는 혈기 부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살 때 결코 화를 내거나 혈기부리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광야는 장미꽃같이 변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기적은 여러분의 손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상식을 뛰어넘어

모세가 이렇게 부르짖었더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자 편에 서십니다. 생각을 하면 사람이 움직이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많이 공부한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보라 그리고 그 나무를 꺾어서 물에 던지라'라는 응답을 하십니다.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뱀에 물려 사람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산다고 합니다. 역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해독제를 준다거나 쓴물에 무슨 약을 타라고 하면 우리는 기분좋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를 던지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까?
모세는 애굽의 왕가의 교육을 다 받은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40년 동안의 연단을 통해 혈기도 없어지고 인간적 생각도 없어진 그는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한번 해보십시오. 광야는 축복이 됩니다.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과 경험을 따라가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것이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죽은 그 사람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믿지 않는 사람이 들으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바다에다 배를 짓지 않고 산에다 배를 짓는 노아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조소를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산 위에다 배를 짓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식 이하의 일을 하지 말고 상식을 뛰어넘어 믿음의 도전을 하십시오.

저는 온누리교회를 보면서'이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이 드는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2천/1만 비전'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한 교회가 2천명의 선교사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동대학의 일로 2년동안 공격을 받았지만 온누리교회도, 한동대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건축되는 선교센타를 보면 이것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나무를 꺾어서 쓴물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었습니다. 구리뱀을 본 사람들은 살아 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과 경험은 이 사실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것이 광야에 숨겨놓은 보물입니다.

사막에서 살 때 두려운 것은 쓴물이나 사막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이나 죽음이나 절망때문도 아닙니다.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서도 얼마든지 기쁘게 지낼 수 있고 굶어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뱀이 물고 주변에 많은 독들이 있지만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쓴물이 단물이 되며 죽음이 변하여 부활이 되는 이런 기적이 광야안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나무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인생, 병든 인생,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신 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나무를 던졌을 때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주님께서 그에게 풍성하고 놀라운 기적들을 무한정으로 베풀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단물'의 의미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가성의 여인은 단물을 먹어 본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인생이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다섯번이나 바꾸어도 목이 말랐습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물을 길러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서 고독과 외로움과 허무를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인생은 목마릅니다. 돈이 있어도 성공해도 목마릅니다. 인간안에 있는 근본적인 허무함과 목마름은 메꿀길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 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물을 먹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을 나도 먹게 도와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여러분도 하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로 내 인생을 채워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단물이라고 하는 것은 세가지 의미를 찾아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광야에서 발견되는 단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단물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을 보면 좀더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 생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시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세력들은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4,55절 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오늘 여러분들이 보혈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단물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은 성령입니다. 보혈 안에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단물을 먹으면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였던 성령이 오늘 여러분에게 임하게 됩니다.

넘치는 '생수의 강'

2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제 그들은 사막길을 건너서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경험을 하고 엘림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샘물이 12개가 있고 종려나무가 70개가 있는 곳에 그들은 거처를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바로 이런 곳에 영혼의 안식처로 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길가운데 흐르는데 좌우편에는 생명나무가 12가지 실과를 맺혔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수가 있는 곳에는 12가지 과실이 있게 되고 그 잎사귀들은 만물을 소성케 하는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 살면서 쓴물을 많이 봅니다. 이 쓴물은 선악과와 같고 단물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계속 먹는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지만 생명나무를 계속 먹는 사람은 복받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너무 많이 먹는 사람들은 옳고 그른것만 따지고 생명나무를 먹는 사람들은 은혜와 용서와 축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사람의 건강이 결정됩니다. 여러분도 매일 영적으로 무슨 양식을 먹고 사십니까? 선악과를 먹지말고 생명나무를 먹고, 쓴물을 먹지 말고 단물을 먹으시기 바랍니다. 하루아침에 건강이 회복되지 않지만 오랜시간을 통해 모세와 같이 신앙이 변하고 성품이 변하여 혈기의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을 믿습니다. 전에는 불평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불평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얻게 되는 우리의 축복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 말은 참으로 복된 말입니다. 애굽에 내렸던 재앙이나 애굽에 임하였던 병을 하나라도 임하지 않게 되는 복이 여러분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과 불행이 여러분에게 하나라도 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광야에서 사는 축복입니다. 광야는 아름답고 기적이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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