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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실수와 에서의 실수 (창 27: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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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7장에서는 실수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믿음의 조상마저도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서 인간은 성장합니다.
실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실수와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실수와 허물은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실수투성이의 사람을 들어서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수를 했지만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고치지도 않고 더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면 그는 비참한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계속되는 거짓말

네사람이 저지른 실수가 27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입니다.

첫번째,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거부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알고 짓는 죄가 있고 모르고 짓는 죄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죄가 순진하게 모르고 짓는 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르는 죄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삭의 후계자로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계획은 야곱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의도적으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리브가와 야곱이 몰래 에서를 축복하려는 계획을 꾸밉니다. 이것이 이삭의 실수와 허물이었습니다. 좋든 싫든, 자기의 감정에 맞든 안맞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두번째, 리브가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아예 거역하려고 했지만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받아들여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랬던 리브가도 그 다음에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거짓과 속임수를 쓴 것이 문제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착각을 합니다.
여러분,수단과 방법이 선하지 않을 때에는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방법이 나쁘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는 법입니다. 리브가와 야곱도 톡톡히 대가를 치룹니다.

세번째, 야곱의 실수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18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사주를 받아서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이삭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에서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에서는 의심을 합니다. 그는 눈이 어둡고 침침해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음성을 모르는 아버지가 어디 있으며 형의 음성과 동생의 음성을 구분 못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이 형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냈기 때문에 이삭은 혼동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낳습니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면 두번째, 세번째 단추는 잘 못 끼워지게 되어있습니다. 단추를 잘 못 끼웠다고 생각하면 그 사실을 숨기면 안됩니다. 사실을 인정하고 첫번째 단추를 고쳐 끼우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야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야곱은 첫 단추를 잘 못 끼웠지 만 거짓말을 계속 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위장해서 에서처럼 꾸밉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의 질문에 야곱은 서슴지 않고 확실한 거짓말을 합니다. 그는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내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에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자기 존재를 부정한 것입니다.
거짓말에는 자기존재의 부인과 고독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이 대역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존이 존재하지 없기 때문에 돈과 명성은 얻었어도 외로운 것입니다.

 

거짓은 고독한 삶을 부르고

야곱의 거짓말은 계속됩니다. 염소새끼를 잡아놓고 산에서 갓 잡아온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남의 물건 가지고 자기 물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하가 했는데 자기가 했다며 공로를 빼앗아 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너무나 빨리 음식을 가져왔기 때문에이삭의 의심은 더 깊어집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빨리 잡게 해주셨다며 하나님의 이름까지 도용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이삭은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만져봐야 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삭의 마음에 확실한 의심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드디어 야곱의 손을 만져봅니다. 그러나 손을 만져보고 나서 갈등은 더 깊어집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뒤에서 사주했던 리브가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염소털을 가지고 야곱의 손과 목에 변장을 시켰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이는 아들은 떳떳하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그래서 이제 축복하려고 마음먹고 다시 한번 야곱에게 질문을 합니다.
24, 25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가 에서라고 말한 그 순간 야곱은 사라져버립니다. 대리인으로서 대리인격이 나타날 뿐입니다. 이삭은 더 이상 질문할 수가 없어서 자기 아들이 만들어 온 음식을 먹고 포도주까지 마십니다. 그래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아들 야곱과 입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의 진짜 목적은 입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입맞추기 위해서 가까이 오는 아들의 냄새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냄새는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6, 27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그러나 이삭은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옷을 입고 그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이것까지도 미리 예측해서 에서의 좋은 옷을 한 벌 훔쳐다가 야곱에게 이미 입혔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거짓말로 자기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특권, 자녀의 특권

이삭은 몇 번 시험을 하였지만 야곱을 끝내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합니다.
28,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먼저 여기서 한 가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특권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자녀를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현대 아버지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아들을 축복하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얼마전 ‘아버지 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쁜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다’ 유명한 아버지치고 자기 자식을 제대로 보살피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바쁘기 때문에 아이들을 돈으로 돌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돈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는 아들을 축복해 주고, 군대에 가고, 결혼하는 아들을 축복해 주는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특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기 자녀를 축복해 주는 아버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자녀들의 문제는 아버지의 축복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출을 합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필요없고 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결혼해서 직장 가지고 살면 되지 부모님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현대의 탕자들입니다.

부모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사람, 어머니의 기도를 받고 자라는 자녀는 복된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이 축복할 때 조심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축복하노라’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삭은 자기 아들에게 세 가지 복을 내려 줍니다.

첫번째, 물질적 복을 내려줍니다. 복은 물질적 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가난도 복일 수 있습니다만 풍요로움도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물질적 복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두번째, 리더십의 복입니다. ‘만인이 너를 섬길 것이며, 열국이 네게 굴복하며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며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할 것이다’라는 축복을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삭은 이런 복을 야곱에게 줍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영향력있는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번째, 영적인 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당신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며 당신을 축복하는 사람은 다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야곱은 복을 받았지만 그의 일생은 불행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사기꾼같은 일생을 살았습니다. 거짓말을 잘 하고 남의 복을 도둑질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일생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집을 떠나 14년 동안 친척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늘 외롭게 살아야 했던 것이 야곱의 일생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선하고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도 선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에서의 실수도 보게 됩니다. 장자권을 빼앗기고 축복권을 빼앗긴 에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30, 31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에서는 열심히 들에 가서 사냥을 해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짐승을 잡아가지고 집으로 막 도착한 순간이 하필이면 야곱이 축복을 받고 집을 빠져 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에서가 들이닥쳤지만 이미 복은 야곱에게 다 가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집에 와서 급하게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 이삭의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내가 사냥해서 별미를 만들어 왔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나를 마음껏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삭의 얼굴은 하얗게 질립니다.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32, 33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삭의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서 ‘심히 떨었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정말로 충격을 받은 까닭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몰래 에서에게 축복해 주려고 했는데 결과는 야곱에게 축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수통해 쓰임받는 종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기도했는데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원망하다가 결국‘하나님 당신이 맞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자기 편한대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입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어보십시오’라고 말하며 자기가 한 모든 것을 전부 합리화 시킵니다.
‘나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가 아니라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랑은 속임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실입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나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에서는 이런 사실을 늦게 발견하고 대성통곡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서가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에게는 장자권과 축복권이 있었지만 자기의 복을 우습고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복이 주어져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 구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별 것도 아닌 집, 자동차, 취직, 명예 이런 것들을 황금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축복과 장자권의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쉽게 팔아버리고 그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곳에는 가지 않고 덜 중요한 곳에는 자주 갑니다. 필요한 것은 안 사고 안 사도 되는 것은 열심히 삽니다. 안 만나도 되는 사람을 그렇게 열심히 시간내서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에서의 실수인 셈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진짜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말년이 외로운 것입니다. 저는 에서를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생각납니다. 그들도 후회를 했지만 문 밖에 쫓겨나서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37, 38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39, 40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에서에게 줄 수 있는 이삭의 말은 이것입니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겠고 너의 동생을 섬기는 운명을 갖게 되었다’
이때라도 에서가 마음을 바꿔 먹고 회개하며 자신을 돌이 켰으면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 에서는 마음을 더 독하게 먹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에서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다 빼앗아간 동생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라고 마음 먹습니다. 이것이 에서가 져지른 또 하나의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삶은 더욱더 비참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이 더욱더 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실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하여 절망의 늪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복되는 실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수는 한번으로 족합니다.
실수하고 무너지고 실패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새롭게 지음받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런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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