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율법의 축복 (출 19:1-9)

첨부 1



율법의 축복(출애굽기 19:1-9)

매일매일 잘 먹고 잘입고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는 살다가 가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따뜻하면 행복한 법입니다. 그것은 행복의 첫걸음이요 기초입니다. 그것을 빼고 어떤 형태로든지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십시오. 고깃국에 쌀밥 먹을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더 깊은 의미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정말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데서 산다고 행복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라파나 미국이나 일본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 나라의 자살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살만한 나라일 수록 자살율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먹을 것이 없거나 환경이 나쁠까요?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부유층이나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 중에 허무주의자가 많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나 행복이 물질적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데 있으며 영적인 데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행복은 시작되지만 정신적, 나아가 영적인데서 그 행복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물론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어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문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충족되었다고 광야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이틀이 아닌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목마를 때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없었을 때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떼가 먹을 것이 되고, 바위에서 샘물이 나고, 원수가 공격했을 때 그 원수를 물리친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버틸수 있었던 더 중요한 버팀목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인데 그 분을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대한 비밀스런, 그러나 기초적인 축복을 주셨지만 진정한 축복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닌 말씀인 하나님과 동행하는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았던 가장 핵심적인 축복은 율법과 성막입니다.
오늘은 율법의 축복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자신의 율법,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아야 할 원칙, 지침서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 먹고 그 말씀과 동행하여 삶으로써 광야같은 세상에서 40년을 아무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쓰라린 고통이 변하여 축복이 되는 것을 맛보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세상을 사는 비결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만약 여러분에게 있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 속에 있고, 율법과 동행하며 산다면 분명히 이 광야같은 세상은 천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19장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애굽을 떠나서 삼개월이 되던 때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이 있던 니산월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삼월이 되었고 고대하던 시내산이 있는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은 모래가 있는 광야가 아니었고 시내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왜 시내산으로 가야만 했을까요? 시내산에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언제든지 시험이 들면 은혜받았던 처음의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 장소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회복이 됩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았던 그 자리입니다. 바로와의 열번의 투쟁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물없는 곳에서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떨어진 곳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던 사막길을 건너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내렸던 시내산으로 삼개월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드디어 시내산 앞 광야에 온 백성이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당시는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약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을 받고 사는지 모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았던 휘장을 찢어지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을 만나고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벼랑끝에 서서 커튼뒤가 아닌 정면에서 모세 만난 하나님

이것은 아주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때 그의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과 좌절의 끝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벼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벼랑끝에 한번씩은 서보게 됩니다. 그럴때 인간은 정직해 집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소망없이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양떼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소망없이 양떼를 몰고 시내산 한 기슭을 걷고 있었을 때 떨기나무를 본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불꽃이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는데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입니다. 보통 불은 전부 다 타고 말지만 하나님의 불은 타는데 타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모세는 거기 서 있는 불꽃에 빨려 들어갑니다. 불에 가까이 접근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을 커튼 뒤에서 만났습니다.
40년동안 분명히 하나님은 계시는데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 분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이 수면에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모세의 삶을 인도하고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만나야 했는데 그 하나님을 여기서 만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려 하노라'
하나님이 자기 꿈을 모세에게 이야기 합니다.
'애굽의 간역자들의 손에서 4백년 동안 매일 고통을 겪으며 고생하는 내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그들을 건져 내겠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꿈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아! 나는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너희를 통해 내가 21세기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너희 민족의 통일을 이뤄주고 싶고 전세계의 모든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는 일에 너희 교회를 사용하고 싶다',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해야 겠다'는 하나님의 꿈이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명령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40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광야에 홀로 버려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능할 때 하나님은 유능해집니다. 여러분이 포기할 때 하나님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모세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할 수 없다, 불가능 하다, 나는 입이 둔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모세!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가야 한다.'
아마 오늘 이런 명령을 여러분에게도 내리실지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권력의 화신인 바로와 대면하러 애굽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바로와 싸울 때 모세는 데모하지 않았고 여러 사람의 힘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영적싸움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열번의 무서운 영적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싸움에는 장자가 모두 죽는 끔찍한 일들까지 생깁니다.
그러나 그 싸움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홍해 앞에 그들이 섰을 때 그들은 절망이라는 이름 앞에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와의 싸움보다 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가 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원수들이 자기들을 공격하는 핍박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광야의 고난을 통과하여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주었던 그 명령을 의지하여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이 명령을 내렸던 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은 너희가 한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

그 이야기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4절을 보시겠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은'너희가 한 것'이 아니고'내가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번의 싸움과 홍해를 가른 것은 모세가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하용조목사나 장로님들이나 부목사님들이 다 일으켜 세운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헌금과 은사와 노역을 사용하셨을 뿐이지 실제로 행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하게 한 것은 바로'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려운 천신만고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난 것은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안은 것 같이'내가 너희를 날개로 보호해서 여기까지 인도해 낸 것'이라고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여러분의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항상 숨어계시지만은 않고 수면에 부상하듯 나타나셔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해서 독수리 날개로 업듯이 그들을 보호했는가? 그 험한 광야생활과 그 어려운 싸움에서 투쟁하게 하면서까지 여기로 오게 했는가?
그것은 하나의 약속, 축복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5, 6절에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간역자의 손에서 건져내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그 험한 광야를 통과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내 백성을 삼기 위함'입니다.
' 너는 내백성이다. 너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를 구속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양자로 삼기 위하여, 내 자식을 삼기위하여, 내 상속자를 만들기 위하여, 내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버려진 사람이었고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마귀자식으로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건져내기 위하여, 내가 너를 축복하고 내가 너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너를 건졌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그 댓가를 치루면서도 우리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러분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루어도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너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내 소유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내꺼야'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싫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좋지 않겠지만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꺼야! 너는 내 소유물이야! 내 백성이야'
이렇게 소유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순종하고 내말을 지키면 이런 축복을 주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의 계약이 더 잘 나타난 신약 '너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시내산에서 주신 이 언약의 내용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조금 더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내산의 계약이 신약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를 애굽땅에서 내가 불러 내었고 광야의 그 험한 골짜기를 건너서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왕같은 제사장입니까? 택하신 족속입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백성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이것이 설교의 모범입니다. 설교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선포하면 백성들이 '아멘'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당신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이 축복들이 다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선포했더니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말로 응답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멘'입니다. 설교들을 때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어떻게 이 약속이 우리에게 올 것인가?'입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한 것은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여러분을 낮추시고 시험하여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은 '순종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순종과 헌신'이 중요합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과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모세가 다시 한번 시내산에 올라가는데 굉장히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입니다. 불꽃나무 가까이 모세가 다가왔을 때 '모세야! 모세야! 가까이 하지 말라 너 있는 곳은 성결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라고 막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축복의 산으로 올라가는 비결의 첫째는 순종이요. 그러나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순결과 거룩, 즉 성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요구한 것은 능력이 아니고 순결입니다.
순종과 성결앞에 하나님은 기가 막힌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8절을 보십시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절에서는 나팔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20절에 이르러 연기가 자욱한 시내산 꼭대기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시고, 그 곳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름 속에서 천둥과 번개 속에서, 나팔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한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가득 찼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서 이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감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있는 사람이 들어오자 마자 꼬꾸라지고 귀신이 떠나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내산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꽉 찼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소리지르고 싸우고 방자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곳을 어찌 성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은 시장바닥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장식하여도 그 속에서 서로 싸우고 소리지르고 세상의 방법이 모두 묻어난다면 이곳은 시장바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있는 곳입니다.
그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첫째는 &51365;너는 내 것이라, 내 백성이다, 너는 제사장이고 내가 너를 축복해 주겠다&51366;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 다음 그 연기와 나팔 소리와 번개와 천둥과 불속에서 모세를 부릅니다. 왜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20장 1,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지침서들이 선포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말라'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받는 것만큼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의롭습니다. 율법은 축복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