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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 국2 (신 01: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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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날 때부터 생명에 대한 집착력을 소유하고 태어납니다. 생명에 대한 집착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행동을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은 자기의 생명과 연관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불안해하고 생명의 안전에 보장을 받으면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싹트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왜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겠습니까? 그것이 곧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성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은 내 생명의 보호자'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보호자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내 생명이 보호되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세상이 자기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뭔가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하는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가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결국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웃지 못할 일이 소위 교회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그 사람의 소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업에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사업이 잘돼야 자기 생명이 안전한 보장을 받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모든 소원을 사업에 두고 있습니다. 대학에 합격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들어가는 것이 자기에 대한 보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마음을 지닌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이 좋은 나라라고 하기 때문에 가고 싶은 것이지 천국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자기 생명의 연장을 꾀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믿음이 있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깨끗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과연 믿음이 있는 자가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만큼 깨끗한 자가 있습니까?

천국은 인간에게는 봉쇄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창 3: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천국으로 가는 길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철저하게 봉쇄되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교회 나오듯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깨끗한 나라에 더러움만 가득 안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때문에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제대로 알고 또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신자라면 '천국 간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에 대해서 부정을 해야 합니다. 흔히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 행위를 근거 삼아서 천국의 여부를 판단하곤 합니다.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것으로 여기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가지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어떤 열심 가지고도 깨끗한 나라에 갈 수 있는 근거는 못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실패감을 느끼고 좌절을 해야 합니다. 천국은 내 노력과는 무관하고 내 행위와도 무관하고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천국은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사실 죄인인 인간들은 천국에 보내줘도 살지 못합니다. 자기의 본성과 반대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착한 모습을 보여도 칭찬 듣고 존경받았는데 천국에서는 그런 것으로는 입도 벙긋 못하는 곳입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깨끗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 조금 한 것으로 자랑할 수 있고, 내 양심을 내세울 수 있는 곳은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두가 죄인들만 모여 사는 곳이고 나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의 착함과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죄인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죄인들끼리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이 좀 더 나아 보인 사람 같고, 나아 보이기 때문에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서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해 보이는 행동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더 나아 보여도 '나는 못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 할수록 헌금하면 할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이것 가지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나는 안된다, 나는 못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내가 가는 나라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 때 나를 붙잡고 계신 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도 뭔가 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가능성 없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닫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죄안짓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죄인이고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재인식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인간의 가능성 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탐꾼을 보낸 사건입니다.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아보겠다고 정탐꾼을 보낸 것은 선한 일입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말에 대해서 모세는 선히 여겼다고 23절에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탐꾼을 보낸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고 했으면 그냥 들어가면 되지 왜 정탐꾼을 보내는가? 그것이 불순종이다'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정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장대 같은 민족들, 힘이 센 아낙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낙심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힘이 센 민족을 발견하고 불안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공포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는 필연코 공포와 불안감이 몰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대응책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부터 피해버리거나 아니면 타협하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는 상대에 비해서 자신의 약함을 의식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보다 자기의 힘이 월등함을 발견했을 때 불안과 공포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강한 존재가 자기를 가로막을 때 인간은 타협 내지는 피함이라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힘이 센 장대 같은 아낙 자손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을 많이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미리 힘센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이 편안히 들어가서 그 땅에 거하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9-31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또 하나님이 안아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갓난아이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 큰 아이를 안아서 인도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기 때문에 안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고 안아주셔야 겨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안고 계시는 분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떤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가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도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의 것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안으셔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하시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아낙 자손을 바라보지 말고 너를 안고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있는 분도 아닌데 어떻게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곳까지 온 것이 내 힘이 아니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덕분이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을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장대 같은 인간이 가로막든 누가 가로막든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불안해하고 낙심합니까? 갓난아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서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는 불안도 없고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인도할 것이고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줄 것을 믿기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어려워진다고 해도 아이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조금만 어려워도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누구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어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고 시련이 오는 것은 세상은 나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안고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나를 안고 있는 분이 충분히 이 시련을 이길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시련 속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약속의 땅을 막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안겨 있는 자기를 발견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 안겨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 삶을 이 땅에서부터 보여줘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설교는 우리의 현실과 직결됩니다. 현실과 상관없이 설교는 설교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설교는 여러분께 어떤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안겨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바른 삶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불안과 염려와 근심 걱정은 하나님께 안겨 있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으면 되는데,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공포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자꾸 죄와 타협하면서 죄와 더불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하나님께 안겨서 들어가는 나라라면 이 땅에서부터 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은 여러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안아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을 그렇게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께 안겨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장대 같은 아낙자손이 보일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불안해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낙 자손 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을 왜 잊어버리고 사십니까?

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사는 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다하려고 하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생명을 지키며 세상을 살아가고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부르되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어떤 일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립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일이 잘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생명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되고 영생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육신의 편한 길을 약속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그것이 영생의 길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기면 영생의 길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고 내 생명이 보장되고 육신이 편한 길만 찾아갈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안아서 영생의 길로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가는 길에는 필연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은 단 일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뭐가 불안하고 뭐가 걱정이 됩니까? 왜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합니까? 그래봐야 나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굴복이고 죄와의 타협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십시오. 하나님께 안겨서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죄와 타협하면서 발버둥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온통 머리 속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내 생명을 지킬 수 있는가?'로만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이 교회가 내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도움이 안되는가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천국갈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신 분입니다. 나는 더러운 자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이지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넉넉하게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 된 것입니다. 신자가 자랑할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참된 자아입니다. 참된 자아를 발견할 때 나 같은 것을 붙들어서 천국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예수님만 커지고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는 길을 가려고 하지 말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길로 가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안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넉넉히 이기는 천국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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