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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 국1 (신 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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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천국을 생각할 때 자칫 한가지를 빼어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서는 어떻게 어떻게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국에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러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삶의 방식을 알아야 자신이 세상을 살 때 비춰지는 모습에서 어떤 것이 천국과 반대되는 것인지를 알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신자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만 좋아하지 천국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아픈 것이 없고 눈물이 없다는 것만 좋아할 뿐입니다. 왜 그러한 것이 없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항상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 선물을 준다고 하면 선물의 내용에만 관심을 두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선물만 있으면 되지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천국 자체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좋아하기 전에 그 천국에 넣어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의 근본은 땅입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근본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늘나라에 넣어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장차 우리가 살 나라는 되지만 우리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 나라는 성경대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사들이 살고 있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국에 보내주시겠다고 하니까 마치 자기의 나라가 된 것처럼 설쳐댑니다.

세상에는 세상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고, 하늘 나라에는 하늘나라대로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두 법칙은 서로 상반됩니다. 공존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한쪽은 깨어지고 버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의 법칙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사시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에서의 삶의 방식을 보이신 것입니다. 내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서의 삶의 정신을 눈치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삶을 미리 연습하고 배우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내가 직접 실습하고 배우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힘쓰지 않고 단지 좋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교회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단지 교회가 교회다워짐으로 해서 그 혜택을 누려보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신자들이 참된 신자의 모습으로 살고 사랑을 보임으로서 나타나는 결과를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가 왜 사랑이 없느냐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 사람은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이 다른 신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사랑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좋은 것에 대한 욕망에 불과합니다. 천국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자리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그런 정신이 유지되는 나라이고, 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보이신 천국의 정신을 실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이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섣불리 들여놓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신명기가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호락호락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습니다. 1절에 보면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하세롯과 다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웬 공부를 또 해야 합니까? 가나안 땅 가까이 오게 하셨으면 그냥 들어가게 하시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또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새로운 말씀들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을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봤다면 말씀을 다시 선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들어가게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은석교회를 교회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신자로 보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점이 우리를 긴장되게 만듭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 앞에서 다시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이미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자로서 광야 생활을 했는데 과연 그 말씀에 맞게 살았는가를 고발하기 위해서 다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악한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서 말씀을 듣습니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입장에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설교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설교라면 설교는 매주일 선포될 때마다 새로운 말을 해야 하고 새로운 성경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전달은 새로운 것을 전달될 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을 때는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지식이 아니라 고발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도 이 자리에 모여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모여서 설교를 듣습니다. 왜 또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신명기의 입장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예배당 문을 나설 때는 분명히 말씀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주간 살아가실 때 말씀이 있는 자로 사셨습니까? 말씀이 요구한 삶을 제대로 사셨습니까? 모두 실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말대로 모친의 죄중에서 태어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말씀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또 다시 말씀을 설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이 여러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해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죄악에 파묻혀서 도저히 선의 가능성이 없는 자인가를 깊이 깨달아라고 말씀이 또 선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여호와의 법을 선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잊어버렸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가나안 땅에서 실천해야 할 행동지침을 내려주시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과거를 해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을 받은 자로서 그 삶이 어떠했는가를 다시금 법으로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악한 자이고 말씀에 실패한 자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는 가나안 족속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발 받고 있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1장에서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금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 마귀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실패한 자기들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 자들이나 자기들이나 똑같은 더러운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기의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감사와 겸손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우리는 비록 말씀에 실패한 자들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말씀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저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단강 앞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의 실패를 깨달으십시오. 그 어떤 가능성도 두지 말고 철저하게 실패한 자임을 아십시오. 교회는 하나님께 대하여 말씀에 대하여 실패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말씀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교회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를 찾고 회개를 하고 주님을 의지합니까?

교회가 실패한 자들만 모인다는 것은 크나큰 의미가 있습니다. 성공자가 없기 때문에 잘났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실패자이기 때문에 모두가 욕먹어야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덜 실패했다'고 하면서 고개를 살며시 쳐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실패자로 모이는 교회, 그 교회가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잘난 자 못난 자로서의 차이가 없고 모두가 실패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으로만 나올 때 '나 잘했다'고 고개를 쳐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패를 모른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갈 수 없습니다. 자기 실패를 모른 자가 요단강을 건너가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체제가 흔들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서 각지파에서 두령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모세를 돕는 지도자를 세우게 되는데,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하면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체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을 하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즉 지도자를 통해서 천국으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먼저 지도자는 누가 됩니까? 13절에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 지도자는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로 골라 세웁니다. 이것을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학벌도 높고 경제가 어려울 때 그것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지혜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을 골라서 세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지혜와 지식이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16,17절을 보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로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이것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지도자, 즉 재판장의 할 일입니다. 결국 지혜와 지식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부강한 나라만들고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지식입니다.

재판장으로서 중요한 것은 공평입니다. 세상을 공평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지도자를 통해서 천국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을 공정히 하라는 것은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은 약자가 강자에게 눌렸을 때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억울한 자가 발생하는 것은 옛 애굽의 풍습에 매여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애굽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에게 착취당하고 눌리면서 억울함을 당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 안에서 억울한 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애굽의 풍습이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풍습이 아닌 새로운 천국의 체제를 지도자를 통해서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곧 공정입니다.

천국은 억울한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억울함이 없다는 것은 계급이 없고 힘의 체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공정해야 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모두가 실패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잘났고 못났고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공정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도 애굽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애굽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자신에 의해서 억울한 자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앞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묻습니다. 천국 앞에서 세상을 잊어버리고자 하십니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할 때 여러분은 공정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의 할 일은 공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도자로서, 여러분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 되어서 공정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천국의 체제가 확산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를 돕기 위해서 장로, 권사, 집사를 세웠다는 뜻의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맡지 않은 평신도를 돕기 위해서 목사를 세우고 장로, 권사,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목사란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들에게 천국에서는 해서는 안될 것들을 전하면서 천국의 모습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공정하게 바라보십시오. 즉 모든 자를 공정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힘없는 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고 힘이 있다고 해서 굽실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쳐야 할 것은 세상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로 모여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천국은 힘의 체제가 완전히 사라진 나라입니다. 그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은석교회로 모여서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지도자로서 나오십시오. 목사도 여러분도 똑같이 우리의 지도자이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정신을 드러내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고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고발당하고 나는 실패한 자임을 자각하면서 실패한 나인데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세상은 공정하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실패와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으로 인한 억울한 자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렸을 때 세상에는 여러분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자가 발생하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요단강은 '나는 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포기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땅입니다. 때문에 수시로 땅의 생각과 땅의 체제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몸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생각조차 내 마음대로 안되고 믿음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우리들이 내세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린 다같이 천국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힘을 포기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마음속에 힘을 두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두십시오. 그리고 실패한 자로서 주님께 나오십시오. 그럴 때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넉넉하게 보일 것이고 공정함이 살아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일에 힘쓰는 지도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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