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땅 (신 02:16-25)

첨부 1



땅(신 2:16-25)

결혼한 부부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이 집장만이라고 합니다. 5년 계획, 10년 계획 등 철저한 계획 아래서 저축하고, 맞벌이하고, 이 계획을 위해서는 아이를 낳는 것까지 뒤로 미루면서 내 집을 갖는 것에 모든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비둘기집 같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하게 되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집에 집착을 할까요? 세상에는 좋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단지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집에 대한 집착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집만이 아닙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집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집을 땅에서의 자신의 안식처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어갈 집이 있고, 쉴 수 있는 나만의 집이 있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셋방살이하던 사람이 집을 장만했을 때 그 집에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할지라도 내집이라는 것 때문에 그 집에서 푸근한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조금 지나면 그것도 사라지고 좀 더 나은 집에 대한 집착에 빠져 살아가게 되지만 어쨌든 처음 집을 샀을 때는 집으로부터 안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땅, 또는 집을 갖고자 하는 것은 땅에서의 안식처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땅, 내 집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것입니다. 떠돌아다니지 않고 확고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것이 곧 든든한 안식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주부들이 집을 가꾸는 것을 보면 셋방이나 전세, 즉 남의 집에서 살 때보다는 내집에서 살 때 더 많은 정성을 들여서 가꾸고 치장을 합니다. 물론 내집이라는 애착심도 있겠지만 그 속내면에는 확고한 내 안식처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안식하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보려는 마음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전쟁입니다. 고통과 복잡함과 어지러움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나만의 공간, 나만의 안식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이는 것입니다. 그 안식처가 일차적으로 내집이며, 집에서 안식을 얻지 못할 때는 결국 다른 안식처를 찾아서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TV에 보면 갈곳이 없어서 공원을 배회하는 노인분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분들은 세상에 자기의 안식처가 없는 분들입니다. 집이 없어서 공원에서 배회하시겠습니까? 집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집이 안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집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이 있는데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 집이 아니라 자식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큰소리칠 권리가 사라지고 집주인인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집에 대한 권리가 바뀌는 순간 나타납니다. 부모는 집에 대한 권리를 잃은 자로서 아들은 내 집, 내 안식처를 확보한 자로서 위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제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안식처를 제공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때문에 자식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누구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 잃어버린 안식을 찾기 위해 공원을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장소를 찾아서 안식처가 없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지나간 인생을 후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살이는 물레방아 돌 듯 돌고 도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인간만이 겪는 인생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겪게 되는 물레방아 인생입니다.

지금껏 개인이 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개인을 지나서 어떤 단체, 회사, 국가로까지 나아가도 동일합니다. 땅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 있는 곳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회사도 많은 땅을 확보하려고 하고, 국가도 많은 땅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옛날부터 있어 왔던 전쟁은 모두 땅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한국이 조그만 섬에 불과한 독도를 놓고 다투는 이유도 결국 바다라는 땅을 좀더 많이,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국가가 좀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땅이 많을수록 존재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서 땅을 확보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산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내 집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땅에 애착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내 집은커녕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모두 세상에 머리 둘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우리들과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차이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다리 밑에서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람이 집을 장만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머리 둘 곳을 확보함으로서 마음의 쉼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를 향해서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집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집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도 안식을 누리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사셨기에 땅에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도 안식을 누리고 평안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신 것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시면 못하실 것이 없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이 무슨 가난의 본을 보이고 청빈의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더러운 곳으로 보신다는 폭로입니다. 그만큼 더러운 곳이기 때문에 땅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땅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처음에 땅을 창조하실 때는 온 땅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하기를 원해서입니다. 창 1:27,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통해서 온 땅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함으로서 땅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한 곳은 하나도 없고 죄로 더러워진 땅이 되고 만것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더러운 곳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결코 세상을 더러운 곳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과 같이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살아가면서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악가운데 태어나고 살면서 더러움에 물들었기 때문에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땅은 의가 되시는 주님을 용납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의를 용납하지 않는 땅, 그 땅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사라질 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땅에서 즐기지 못해서 안달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믿는 신자의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명기 2장의 주된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만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지 않은 땅이 나옵니다. 4절에 에서의 자손의 지경을 지날 때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는 한발자국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절에는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 모압을 괴롭게 하지 말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역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절에서 암몬 족속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미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수많은 민족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거할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자기 땅을 가지고 정착해서 잘살아 가는데 이스라엘은 땅없이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세상은 우리가 머물 수 없는 곳임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외에 다른 땅에서 자리 잡아서는 안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땅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더러운 땅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다투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땅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 자리를 확보해서 안식을 누린다고 해도 조금 지나면 확보한 자리를 좀 더 늘이고 싶어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다투는 삶이 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땅을 지나면서 '저 땅은 내 땅이 아니야'라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들이 살 땅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땅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내가 살 땅이 아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더러움과 악함을 발견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땅에 들어갈 사람이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다투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금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이 땅에 확고한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다투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모들도 이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내 자리를 확고하게 하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에서의 자기 자리를 위해서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위해서 싸워야 할 자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사실 여러분은 어떤 싸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까? 아마 전자의 싸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우리가 싸우고 다툰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소유하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싸우고 다툼으로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자기 힘으로 양식을 구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 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이 있는 삶은 피곤함이 있을 뿐입니다. 뺏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다퉈야 하는 것이 땅의 인생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연속인 삶속에서 어찌 피곤함이 없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피곤을 자신이 싸움으로 뺏은 전리품을 바라보면서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계속되어지는 싸움과 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피곤과 고통 속에서 안식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자의 삶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땅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의 땅을 탐내고 산다면 그도 역시 피곤함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싸우고 다투지 않아도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릴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즉 양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 외에 다른 땅에 애착을 두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얼마든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족이란 많아서 풍족이 아니라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풍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나그네 인생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앞서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이스라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 자리 만들어서 정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정착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싸움과 다툼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땅을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나그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을 배우라고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신자의 땅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죄가 가득한 땅에 머리 두고 살아라고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땅에 내 자리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타협하고 아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을 속이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을 배워라고 여러분을 직장으로 보내시고 가정으로 보내시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24절에 보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땅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네 손에 붙였다고 합니다. 붙였다는 것은 이 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싸워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이 하는 독특한 싸움입니다. 상식적인 싸움은 힘겨루기입니다. 힘을 겨루어서 그 결과에 따라서 승자 패자가 가려지는 것이지 미리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어 놓고 싸우라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싸움의 결과로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싸워놓고도 그것을 자기들의 승리로 보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내 힘으로 싸우고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여러분의 힘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여러분께 붙여주신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만약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노력이 들어갔는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신자가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와서도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을 사람을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진멸하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멸해 버리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존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혼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나 시혼이나 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특별한 사랑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시혼을 치면서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시혼이 진멸당할 때 우리가 바로 진멸당해야 할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려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본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살지 마십시오. 아무리 든든한 자리를 만들어도 그 안에 안식과 평안은 없습니다.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땅은 이런 사람이 차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곧 온유한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모르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시고 마지막까지 새땅에 들어 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