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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기쁨 (신 03: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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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쁨(신 3:23-29)

인간들의 세계에는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작게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크게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순간부터 역사는 이미 시작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역사입니다. 개인의 역사는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의 삶 전체입니다. 한 가문의 역사는 그 가문이 형성되었을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입니다. 또 국가의 역사 역시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부터 종말될때까지 존재하였던 것 자체가 역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역사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의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말하는 인간의 역사란 세상에 남길만한 크고 가치 있는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자서전, 또는 회고록이라는 것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평범한 삶이 아니라 인생 속에서 뭔가 남길만 하고 드러낼 만한 크고 위대한 일들을 나열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낼 만한 것들을 역사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나머지는 역사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가문이나 국가의 역사에서도 동일합니다. 아니 모든 역사가 이와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것은 작은 것의 희생입니다. 가치 없이 보이는 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희생되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영웅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로서의 가치 있는 것을 내세우다보면 결국 등장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과 그 일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 인물을 중심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시대의 국가는 왕을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됩니다. 백성이 있어야 왕의 존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왕의 역사는 백성들을 희생시켜 버립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얼마후면 월드컵 경기가 벌어집니다. 월드컵은 세계적인 축구시합입니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 나라는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됩니다. 따라서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경기 후에 영웅이 되는 사람은 골을 넣은 한 두명에 불과합니다. 그 외 나머지는 영웅이 된 사람의 뒤에 가려집니다. 90분을 땀흘리며 뛰었지만 결국 한 두 사람을 영웅 만들기 위해서 땀흘린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 혼자 힘으로 골을 넣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점수를 올렸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의 노고와 땀이 한 사람에게로 모두 집중시켜 버립니다. 마치 다른 사람은 승리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던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물론 실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두사람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선수들은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됩니다. 경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내가 영웅 되기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남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개인 플레이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를 위한 경기가 아닌 나 개인이 영웅 되기 위한 경기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역사란 영웅을 중심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 의해서 가려지는 존재가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국가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할지라도 국가가 왕이나 대통령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란 백성으로 인해서 형성됩니다. 왕없는 국가란 있을 수 있어도 백성 없는 국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백성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가령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그 순간에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는 백성이 있습니다. 엄밀히 그도 국가의 역사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영웅 중심으로 나아갈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웅적인 것이 아닌 행위는 무가치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대로 세상이 골을 넣은 선수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들만 영웅 대접을 할 때 자연히 골을 넣지 못하고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 선수로서는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수 있고 90분간의 자신의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인생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영웅 중심이지만 하나님은 영웅 중심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크고 가치 있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위대한 영웅으로 부각합니다. 한 인간이 영웅으로 부각되어지기 위해서는 그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고 희생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큰 것만이 성공이고 작은 것은 성공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히 무엇에 관심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크고 높아지는 성공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인생의 목적도 여기에 두게 됩니다. 작은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뒤에 가려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크게 되어지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지 작게 되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곰곰이 돌이켜 보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고, 무엇이 되어지기 위한 인생이었는가를 곰곰이 되짚어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실된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인생은 분명히 기쁨과 즐거움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면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잘못된 인생의 방향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드릴 것은 모세의 기도입니다. 우린 모세의 기도 내용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순탄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로 인해서 고생을 하며 나왔습니다. 그리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오직 목적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백성들로부터 좋은 호응만 받은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모든 원망과 불평을 홀로 다 감당하면서 요단강까지 온 모세로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25절에 보면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이것이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기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기도도 역시 거의 모세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민 20:12절에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것은 단지 가나안 땅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라기 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는 일에 쏟아 부은 모세로서 막상 가나안을 앞에 두고 저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인생을 살아온 자신에 대해서 실패감을 느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성취입니다. 인생의 목적이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 모세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십 년을 오직 가나안 땅이라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이 막상 가나안 땅을 바로 코앞에 두고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었던 것을 자기 손으로 성취하고 싶어서 가나안 땅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신자들의 기도가 모세의 기도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 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 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만 해도 족하다는 것은 요단강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온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는 뜻입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 성취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 뒤에 자신이 가려지는 것을 거부하게 되고 자신이 앞에 부각되어지기 위해서 힘쓰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어갈 사람으로 여호수아를 세웁니다. 여호수아가 할 일은 모세가 하지 못한 일을 계속 하여 성취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의 일은 모세의 일이 계속 이어진 것이지 모세와 별개의 일을 부여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여호수아의 일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일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기 사명의 성취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비록 자기의 손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지만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일을 미리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호수아의 일을 자기의 일과 별개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 일이 중지되지 않고 다시 여호수아로 이어진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지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큰 실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일로 여기면 안됩니다. 자기 일로 여기면 결국 자기 성취에 목적을 두게 됩니다. 신자가 모든 일을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성취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 성취로 끌어 당겨버리면 결국 그 일은 자기 손으로 해야 한다는 욕망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일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일의 공로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참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영웅의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웅의 인생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위대하고 유명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는 영웅의 인생이란 뒤에 있는 것보다는 앞에 있으려고 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자기 성취를 위한 인생을 말합니다. 내 손으로 뭔가 이룸으로서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뭔가 했다는 것에 가치를 두면 안됩니다. 신자는 언제나 뒤에서 남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작은 것으로 여기며 무시하고 관심 두지 않는 일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앞세우기 위해서 내가 희생되어지는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일이 성취되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다시 축구 경기를 예로 들면 월드컵에서 승리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고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골을 넣지 못해서 유명해지지 못하고 단지 뒤에서 다른 선수를 도와주는 역할만 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위해서 봉사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국가대표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도 내 손으로 이루고 성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신자들의 봉사를 보면 자기 성취를 위한 봉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영웅이 되고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어지고 자기 보람을 위해서 하는 봉사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위대해 보이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작아 보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런 일은 나보다 못한 자들이 맡아서 할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은 좀더 위대하고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희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은 희생이 자기 성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예수님을 영웅중의 영웅으로 대우합니다. 위대한 성자, 위대한 위인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예수님의 본질을 알았다고 해도 계속 영웅으로 위인으로 대우하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지금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바리새인들 앞에 나타나셨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틀림없이 영웅으로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바로 세상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예수는 영웅이 아니라 자기들의 적이었습니다. 믿고 따르고 순종할 만한 가치 있는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신자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웅이 되거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무시당했으면 나도 무시당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욕을 받았으면 나도 욕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으면 나도 미움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생하는 것, 작은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어떻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가 말하는 주는 성경의 주가 아니라 자기가 상상한 주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위대해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작은 것의 가치를 상실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의 만족은 찾지를 못할 것입니다. 작은 것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큰것에만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작은 것으로 넘치는 인생에서 만족을 누리겠습니까? 내가 작아지는 것,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 남들이 나를 몰라주는 것, 여기에 마음두지 마시고 다만 남을 위해서 봉사했고, 희생했고, 도움이 된 것으로 족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은 일을 해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가지지 마십시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분량 속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요단강까지가 모세의 분량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면 됩니다. 요단강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동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으로 족한 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취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실패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모세의 수고와 봉사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희생이 없이는 여호수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수고하고 희생한 것이 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누구의 손으로 거두게 되든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내 손으로 일한 것이기 때문에 내 손으로 직접 열매를 거두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크고 위대한 것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작고 가치 없이 보이는 것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자는 아무도 가치 없이 여기는 봉사와 희생 속에서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했으니까 내가 칭찬을 받아야 하고 내가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은 언제나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자책하면서 스스로 큰 구덩이에 빠지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 주부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집안 일 하는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일로 여기고, 스스로 아무 능력도 없는 자로 여기고, 인생의 실패자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인생의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집안 일도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봉사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가정 주부를 하게 하신 것은 가정에서 봉사하라고 하신 사명임을 왜 모르십니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따지지 말고 다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 일인지만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씨뿌리는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는 것까지 여러분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말없이 뒤에서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항상 작은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신자가 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진리 안에서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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