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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규례와 법도 (신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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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례와 법도(신 4:1-8)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말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담이나 하와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도 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뭔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직접 경험한 것이나 목격한 것들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태어나서 기어다니고 걸어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의 감시는 철저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들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접근하게 됩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지게 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가면서 서서히 자신에게 해가 되고 유익이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이 기준이 되어서 가까이 할 것과 멀리 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잘못에 대한 결과로 제시한다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가령 아버지가 아이에게 어떤 지시를 내립니다. '몇 시까지 숙제를 마쳐라 하지 못했을 때는 회초리 10대다'라고 했을 때 그 아이가 아버지의 말대로 정한 시간에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과연 그것이 아버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까? 아니면 자기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는 고통을 피하기 위한 선택과 결정입니까? 후자입니다. 아이들은 매맞는 것에 대한 고통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버지의 말대로 숙제를 마치지 못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질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순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마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단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리 저리 따져보고 자신에게 해롭다고 생각될 때 금지하고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죽으리라'는 것은 인간이 말씀에 순종치 않았을 때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내리실 마지막 결과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불순종의 결과로 제시하신 것은 경험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조심해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가 아까워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지키기 위해서 아담에게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과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 인간이 경험한 것을 불순종의 결과로 제시하셔야 했습니다. 인간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시거나, 만약 두려운 것이 없다면 두려움을 가지도록 먼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래야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악과가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본래의 인간 모습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본래 인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죽음이라는 것을 불순종에 대한 결과, 즉 인간의 마지막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말씀에 순종치 않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벗어버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결과이지 결코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인간으로 남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 그 자체이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알게 하신 후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라고 하셨을 때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서 믿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부가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축복과 저주를 믿음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현재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축복과 저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좋은 것 저주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 아래 축복은 물질의 풍요와 소원 성취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주는 있는 물질도 잃어버리고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축복은 얻고 싶고 저주는 피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때문에 믿으면 축복이 오고 믿지 않으면 저주가 온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축복을 선택하고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가 십일조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때 교인들은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아담 이야기를 해본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단지 선악과를 먹는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본래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계산이나 이유 없이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죽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치 않는 인간의 결과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지 죽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어떤 수단이나 조건도 동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하시는 여러 가지 징벌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지 결코 징벌을 수단으로 삼아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팽개쳐버린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죽음이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음을 안고 태어납니다. 산 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둠으로 가득 채워진 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꿈과 야망에 파묻힌 채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으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어딜 가도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죄요, 죽음의 모습뿐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본래의 인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죽음 속에서 생명을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나라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앞서 말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면 살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본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는 것이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면 결국 본래 인간 모습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현실의 욕망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에만 순종해야 할 인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욕망에 순종해 버릴 때 인간은 자기의 위대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날로 커질 때 그것을 목회 성공이라고 떠들며 자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했더니 되더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술과 재주를 과시하게 됩니다. 교인들은 자기들이 돈 내면서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커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다니는 보람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큰 것을 좋아하고 높아지고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과 연관된 규례와 법도는 죽음에 처한 인간의 모습과 반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이나 그 외 다른 말씀들을 잘 지키면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정도로 이해해 버립니다. 사실 지금의 교인들이 뭔가 말씀대로 산다고 할 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정해준 법칙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현세에서는 축복으로 연결되고 죽어서는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믿음은 믿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담이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뭔가 자기 방어를 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죽음에 처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가 오늘날의 세상을 어둠과 죽음에 갇힌 땅으로 바라보게 될 때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거치적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합니다. 뭔가에 구속당하고 매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법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것이지 좋아서 지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준행한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짐스러워하고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지키지 못했을 때 닥쳐올 수 있는 징계가 두려워서 억지로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할 때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나라 말고 다른 나라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며 사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이 있습니다. 그 상식과 방식을 넘어설 때 그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눈총을 받고 밀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란 세상의 상식을 넘어서고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를 좋게 보고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의 소망에 걸림돌이 되는 규례와 법도라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좋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정말 좋다면 자연히 세상 나라는 싫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맞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것은 규례와 법도에 나온 세부적인 것을 하나하나 지키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하나하나 지켰다고 해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않는 행동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만 순종하는 본래의 인간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로서 지켜야 할 세부 지침을 정해서 가르치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주일 지킴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되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한국교인들은 규칙을 완벽하게 지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 신자가 되려고 합니다. 완벽하게 지켜서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좋지 못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은 은혜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충족됨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수많은 교회들이 믿음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늘에서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규례와 법도에 대한 준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규례와 법도에 준행하는 자는 어떤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규례와 법도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좋아하고 감사하는 인간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3절에'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서 진멸하셨으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민 25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을 더 좋아하고 이방여인과 간음함으로서 모두 죽여버린 사건입니다. 즉 그들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규례를 어겼기 때문에 죽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신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여인과 간음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는 마음에서 나온 행위인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에 처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살지 못하고 인간이 따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살았을 때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반대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좋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6절에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결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말합니다. 지켜 행하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에 대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지혜이고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대로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인간이 욕심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최고로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규례와 법도를 하나하나 실천함으로 욕심대로 살지 않는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만 최고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규례와 법도가 지향하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최고로 믿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이미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이유는 많은 신자들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을 세부적인 항목 하나하나에 대해서 실천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신자는 하늘에서 준비하신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준비한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미 자기를 포기한 낮아진 사람이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름 나는 일,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일을 따로 정하고 그 일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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