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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판과 하나님 (신 0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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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판과 하나님(신 4:15-24)

때는 21세기를 코앞에 바라보는 1998년 새 봄의 어느 날. 이른 아침 모 대학 캠퍼스 한쪽 구석에 한 무더기의 대학생들이 모여 있다. 그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입을 연다.

리더:'자, 여러분이 미치도록 기다리던 큐티 시간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창세기 12장 10절부터 20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도중에 애굽에 내려갔던 때의 이야기죠? 조용히 묵상하시고, 함께 은혜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리더:'각자가 묵상하신 내용을 서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짓궂게 웃으며) 자, 오늘 아주 오랜만에 나오신 태지 자매부터 시작해 볼까요?'

태지:'(겸연쩍어 하며) 예, 그동안 아침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큐티 모임을 못 나왔는데요, 갈수록 말씨도 거칠어지고 하루가 개운하지 않아서 다시 나오게 되었어요.

리더:'그래요, 우리는 날마다 큐티를 하고, 그날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먹고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Q.T.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친구들의 삶은 거칠어지고 삭막하게 변할 수밖에 없답니다. (태지 자매 쪽을 보고) 태지 자매님, 앞으로는 절대 빠지지 마시고요, 계속 말씀해 보세요'

태지:'네, 저는 오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느꼈어요. (성경을 펴서 짚으며)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하셨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배웠고, 저도 이제부터는 어려움이 닥칠 때 실망하지 않고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노력하겠어요. (옆자리 미지를 바라보며) 이상입니다.'

미지:'저는 아브라함의 지혜를 배웠어요. 기근이 들자 그는 곧바로 나일강이 있는 기름진 애굽으로 내려갔고, 결과적으로 큰 재산 을 얻게 되었거든요. 게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함으로써 혹시 생길지 모를 위험을 예방했다는 점은 아브라함의 놀라운 처세술이었다고 봐요. 크리스천들 중에 외골수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데, 그것은 여기 아브라함의 교훈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죠.'

성지:'(따지듯이) 잠깐만요. 아브라함이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않은 불신앙이었다고 알고 있는 걸요? 바로에게 아내를 첩으로 주고 양과 소와 노비 등을 얻은 것은 결국 자기 아내를 판 행위나 마찬가지잖아요? 저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신앙에서 떠나면 이렇게까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신앙을 더욱 굳게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리더:'아, 예, 후지 자매님 생각도 좋은 생각이네요. (엄숙하게) 하지만 성경 말씀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거예요. 그 다양함 속에서 각자가 나름대로 은혜를 받는 것이랍니다. 성경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거든요. 미지 자매님 계속 하세요.'

미지:'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어요. 어제가 주일이었잖아요? 교회를 가려고 막 나서는데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제가 토요일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마무리 부분을 조금 수정하면 A+를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직접 지도해 주신다면서 학교에 나오라는 거예요. 교수님과 이야기한 뒤 저녁 예배에 참석했죠. (감격에 찬 눈빛으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은혜 주실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너무 감사해요.'

리더:'그렇습니다. 물론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겠지만, 미지 자매님의 경우 교수님을 찾아간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왔잖아요?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특별히 '융통성'이라는 것이 부족하기 쉽죠. 그것을 조심해야죠. 그럼, 이제 영지 형제님 차례이군요.'

영지:'저는 성경에 대해 새삼 놀랬어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간적 연약함까지도 숨김없이 적고 있다는 것이죠. 저는 성경이 다른 신화책들과는 달리 정말 솔직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더 신뢰가 가네요.'

성지:'저도 그래요. 조금 덧붙이자면,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연약한 모습을 통해 모든 인간이 결국은 연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실패하는 것을 보아라, 인간은 그런 존재란다, 하고 말이죠. 그리고 또 저는 거짓말을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제 저녁 열우씨랑 영화를 보고 늦게 들어갔는데, 어머니께는 버스가 안 와서 늦었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근데 기분이 계속해서 찝찝하더라구요. 성경에서도 아브라함이 솔직하게 아내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누이라고 속여서 바로에게 책망 받게 되잖아요.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리더:'네,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후지 자매님은요?'

후지:'(시무룩하게)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큐티 교재를 들여다보며) 그냥, 여기 교재에 나와 있는 예화가 제 가슴에 와 닿아요. 참 뭉클한 이야기잖아요. 하나님께서 오늘은 저에게 이런 방식으로 은혜를 주시는가 봐요.'

리더:'저는 조금 특이하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순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같으면 남편이 다른 남자에게 첩으로 가라고 했을 때 화를 내고 이혼하자고 했을 텐데,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순종해서 바로에게 갔어요. 정말 대단한 순종이 아닐 수 없죠. 사래의 순종처럼, 나에게 참으로 힘든 것이 요구될 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 묵상하신 말씀을 하루 동안 생활에 적용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흩어졌다. 몇몇은 수업을 받으러, 몇몇은 도서관으로. 큐티 시간에 묵상한 말씀을 하루 동안 생활에 적용하며 살기 위해서….

위의 글은 인터넷 기독잡지인 THE VOICE라는 월간지에 '큐티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십니까? 대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큐티를 하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위의 글들이 비록 실화가 아니라 가상적인 내용이라고 하지마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한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교단과 저 교단의 하나님이 다르고, 이 교회와 저 교회의 하나님이 다르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의 하나님이 다릅니다. 각기 제 마음에 맞는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다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이 하나님쪽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들의 생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 나름대로 접근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생존 문제는 각기 다릅니다. 위의 글에서 본바와 같이 학점이 문제인 사람은 아브라함이 사래를 아내라고 속인 것을 가지고 융통성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그 학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융통성을 인정하시고, 그 융통성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교수를 찾아가서 높은 학점을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존을 초점으로 해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묵상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만 그모습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크나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서 일하시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룩을 위해서 우리의 생존도 포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 머리 속에는 오직 나 자신의 생존문제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을 포기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의 눈에 '포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보인다면 살기 위해서 땀흘리고 애쓰는 자신의 열정을 가상히 여겨서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만 보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고, 탐욕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골 3:5).

하나님은 열심 있는 신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를 잘하고 큐티를 잘하면서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숙해져 가는 신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인간이 아니라 '흠없는 어린양의 형상'입니다. 신자는 이 어린양의 형상이 담겨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형상의 흔적이 있는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를 규례와 법도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지난 시간에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은 문자화 된 법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정신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것은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떡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인생은 장자의 재앙에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듯이 죽어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사는 인생은 세상의 떡이 결코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믿고 떡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떡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떡이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에 매이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희생의 형상이 담겨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발견하셨을 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떡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떡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선교사로 나간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돈이 없어서 선교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선교는 돈이 한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이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교만에 찬 인간의 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 8:2,3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고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떡을 의지하고 떡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교만을 낮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떡과 무관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행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규례와 법도를 주신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화염 중에서 말씀하셨는데 음성뿐이어서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 돌판을 주십니다. 돌판에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돌판에 기록된 규례와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렙 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깊이 삼가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16절부터 나오는 대로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보이지 않으셨고 이스라엘은 말씀만 들었을 뿐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상이 없는 분을 대체할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다른 하나님을 제조해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 자기 힘으로 삼을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권력을 발판으로 삼고 돈을 발판으로 삼아서 세상을 살고자 합니다. 자신에게 권력도 돈도 없으면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들을 발판 삼아서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그 마음에는 말씀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소멸 당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24절에 '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로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형상도 인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소멸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고, 모든 것이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이 최고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기쁨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말씀에서 벗어났습니다. 어디에서도 말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소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소멸 속에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규례와 법도입니다. 그리고 규례와 법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순종하는 사람은 새로운 창조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삼아서도 안되고 발판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규례와 법도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소유를 해봐야 지식으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신학을 배운 목사들, 또는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신앙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학을 배우고 연구한다고 해서 신자되고 구원받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신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으로 채워져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규례와 법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죄악 속에 파묻혀 있는 인간의 본질을 낱낱이 드러내고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신자답게 보일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다운 행동과 신자답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규칙을 세우게 됩니다. 술 담배 안하기, 말을 부드럽고 상냥하게 하기,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기, 등등 여러 가지 규칙을 정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신자다워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죄악된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본성인가 하면 자기 성취와 자기 만족이라는 본성입니다. 신자다운 행동을 하나하나 실천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럴 때 마음 뿌듯함을 느끼는 자기 성취와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하면서 점차 못난 인간에서부터 벗어나고 잘난 인간으로 발전해 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발전이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괜찮은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못난 인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못난 인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못난 인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신명기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는 설교라고 했습니다. 왜 가나안을 앞에 둔 시점에서 설교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말씀에 실패한 시점에서 다시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을 점검함으로서 죄인으로서 못난 인간으로서 들어가야 할 나라가 가나안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못난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는 우리 쪽에서는 말씀을 못 지킨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말씀을 대충 지키며 살면 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기존교회의 생각이지만 그것은 다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대충 지키면 되는 실천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못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 규례와 법도, 즉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는 애당초 틀린 일이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주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킴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루신 그 분을 바라고 믿어야 한 것입니다. 그 어떤 세상 적인 발판도 다 제거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발판임을 알고 주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말씀 안에 있는 신자의 모습이고, 흠없는 어린양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주님을 발판으로 여기고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인간편에서 뭔가 들고 나와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고 천국 가는데 협조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린 은혜라는 말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인간입니다. 인간이란 그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성하셔서 주신 것을 감지덕지하며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 완벽하게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방해를 받는다고 중간에 중지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도운다고 해서 더 빨리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해봐야 하나님의 일을 방해만 할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 자비가 10가지의 규례로 등장하는 것이 십계명이고 그것을 한마디로 줄인 것이 사랑입니다. 롬 13:10에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한 말씀대로 사랑은 모든 율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도덕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상대방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방 쪽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준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나같이 못나고 죽어야 할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분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계속해서 못난 인간, 즉 약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사는 것이며 어린양의 흔적을 담고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자랑할 뿐이고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사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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