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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과 사랑 (신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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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과 사랑(신 6:1-9)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정작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에 대해서 기준도 없이 그냥 입에서 나온 대로 내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면 다 신자냐? 신자다워야 신자지'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도 역시 '신자답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적인 기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자기 생각으로 내뱉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신자다운 것은 어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신자답다, 또는 신자답지 못하다고 판단하셨습니까?

'답다'라는 말은 어떤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말입니다. 가령 누군가를 보고 '여자답다'라고 할 때는 여자다운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말이 됩니다. 여자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기준도 없으면서 '여자답다'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그 사람이 여자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답다'라고 할 때도 역시 인간다운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먼저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준에 비추어서 인간답다, 인간답지 못하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세상의 시각과 성경적인 시각이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세상이 보는 인간다운 기준은 인격과 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의 인간다운 기준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인간답다, 인간답지 못하다라는 말을 할 때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린 모두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예수님을 기준으로 두고 볼 때 세상에 그 누구도 인간다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인간다운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다워야 한다'라는 말속에는 인간다운 그 분을 지향하고 그분 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꾸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맛을 우리가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맛을 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사는 맛'보다는 '세상을 사는 멋'에 치중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맛있게 살아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상을 멋있게 살아볼까?'에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 더욱 더 인간답지 못한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지켜서 인간다워지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인간다운 모습에서 얼마나 거리가 멀어져 있는가'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다워 질 수 없습니다. 인간다운 모습이 제시되고, 기준이 세워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고, 잘난체 하고 큰소리 치다가도 예수님만 생각하면 입이 다물어지고 고개가 숙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신자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도를 주신 목적에 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신자다운 모습을 하나님의 법도의 실천 여부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도를 실천하면 할수록 신자다워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실천' 또는 '행함'이라는 짐에 눌린 채 신앙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세상사는 맛과 멋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생활 역시 멋있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폼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맛을 아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멋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폼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맛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멋있게 하고 폼나게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자꾸 이것저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게 되고 자기의 헛점을 가리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짐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 짐으로 인해서 신앙생활의 맛을 잃어버리고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신경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아직 신앙의 맛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자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둬버리면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부담을 안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 이런 상태에서 과연 신앙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요한1서 2: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받은 신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율법의 가르침이 없다고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좀 애매하게 들릴 것입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신다는 것이 뭔가?'하는 의문이 들것입니다. '계시를 받아라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쳐주신다는 것을 신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가르쳐주신다는 것은 신자가 진리인 말씀 안에 거하고 살아갈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쓸데없는 것으로 고민하기보다는 날마다 말씀 안에 거하면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따르고자 하는 애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신앙의 맛도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율법의 문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모두 해결되어집니다. 때문에 율법적인 문제로 인해서 아직 혼란을 겪고 있는 신자가 있다면 그분은 아직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적인 여러 문제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고자 하는데서 출발한 것이라면 주님의 사랑을 깊숙이 알게 됨으로서 그 문제도 모두 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은 5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에 관심 두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맡겨진 실천적인 문제로 보시면 안됩니다. 즉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보려고 애쓴다면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신앙에 낙심하고 지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쓰다보니까 해도해도 끝이 없게 되고 결국 낙심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함께 하실만하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씀에 거하지 못하고,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보지 못하고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그 결과를 가지고 기쁨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되고 금방 기뻤다가도 금방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들을 누리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 자꾸 뭔가를 하려고 애쓰십니까? 우리가 뭔가 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신자이고, 이런 감사로 사는 것이 신앙의 맛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일조를 잘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함께 하시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함께 하지 않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기도를 못하고 헌금을 못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조건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될 때 '감사'라는 말이 나오고 뭔가 부족하고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감사'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전 5:18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감사는 모든 일에서, 어떤 경우에서라도, 다시 말해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가운데서도 감사는 사라져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알 때 감사는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겠다고 애쓴다고 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때 저절로 감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사랑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러면 이제부터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살면 되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하라 하지 말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기에 힘쓰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냐?'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뭔가 자기 마음의 홀가분함과 자기 편함을 찾으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세우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내세워서 마음놓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런 잘못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기준으로 한 가운데 그런 잘못된 신앙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나는 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도 '지옥 가기 때문에'가 아니고 '징계를 받을까봐'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이고, 인생의 참된 맛을 알고 신앙의 맛을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율법이 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에 대한 문제도 법적인 차원, 즉 기도를 해야 신자답다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면 기도를 많이 했을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데 하지 못했을 때는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좇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저절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문제가 이와 같습니다.

로마서 13:9,10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구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모든 계명은 사랑에 다 들어있다고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간음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붙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습니다(롬 6:14).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킬 것인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을까에만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9절의 말씀인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법적인 위치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애써야 하고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말씀을 강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법적인 차원에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안하겠다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은 행동은 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입니다.

1절에서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은 어떤 규칙이나 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며 앉았을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걸어갈 때든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대신 이루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율법의 영향을 받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역사 하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순탄하게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순간 되어졌다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으라' '지켜라'는 권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님께만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날마다 진리 위에 굳게 서있기를 권면하는 말입니다.

사단은 항상 신자에게 찾아와서 유혹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벗어나서 자기를 바라보게 함으로 자신이 마치 신자가 아닌 것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신자가 되어보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서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고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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