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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민 (신 0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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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항상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보고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야 할 사람이고,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멸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놓고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후자의 사람되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고, 신자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이 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세상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정작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르는 자들을 저주하고 아예 사람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라고 저주를 퍼붓고 벌레 취급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얼굴에 어떤 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사람같이 세상을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만도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웃으면서 잘 살아가는 것을 보고 성경이 그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웃을 만나면서 과연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멸망 받을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 뒤에 드리워져 있는 멸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지 그 몸에 치렁치렁 걸치고 있는 세상의 것만 눈에 보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마에라도 멸망 받을 자의 표가 찍혀져 있으면 그것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 받을 자다'는 생각을 가지겠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순간순간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믿으나 안믿으나 다른 것이 하나 없고 마찬가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덮어버리고 세상을 볼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을 보면서 '나와 별다를 바 없이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과 나를 비교할 때 나는 교회 다니고 저 사람은 절에 다니는 것 빼놓고는 전혀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 즉 성민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외모나 환경적인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의 차이점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과연 성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려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고, 내 하는 일들이 잘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민의 모습은 누가 모방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인기가 있으면 금방 그것과 비슷한 것을 모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법으로 똑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법이 없었다면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방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회사까지도 모방해 냅니다.

'이러이러한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라고 하니까 좋은 부모 소리 듣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금요일이 스승의 날이었지만, 이런 스승이 좋은 스승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좋은 스승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방입니다. 원래 자기 모습을 스스로 자제하거나 감추고 다른 모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모방입니다. 이 모방에는 종교적인 것도 한몫 끼고 있습니다. 즉 좋은 교회, 좋은 목사 등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들이 좋은 목사 되기 위해서 얼마나 모방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기 것을 감추고 좋은 목사라고 생각되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좋은 목사로 일컬음 받는 것이 자신의 자리를 굳게 세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사가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좋다는 것을 다 끌어들여서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기를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시 좋은 교회 되어야 좋은 소문이 날 것이고 좋은 소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란 모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시 모방할 수 없습니다.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고 어렵다기 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모방을 하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 합니다. 모방을 함으로서 오히려 손해가 온다면 아무도 모방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 됨이 바로 그렇습니다. 교회 됨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방을 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서 찾아봐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좋은 성격을 찾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복 받은 삶을 찾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신자됨의 증거를 찾으라고 한다면 결국 인격 좋고 돈많은 사람이 신자라고 일컬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인격이 좋고 돈이 많은 사람과 어떻게 신자됨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혼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민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결코 신자된 우리 자신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보면서 살아가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편치 못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 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말씀을 보면 '아무리 하나님을 안믿는 이방인이지만 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고, 진멸하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방인에게 이토록 잔인할 정도로 엄하시고 전혀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우린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엄청난 차별 대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이 한쪽에 의해서 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잘되게 하고 이방인은 아예 남겨 놓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얘기들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의심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는 허황된 이런 얘기들은 빼버리고 허황되지 않은 말을 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고, 이해가 되고, 좋아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성경은 세상을 둘로 본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진멸 당할 자와 진멸시키는 자입니다. 진멸 당할 자는 악한 족속이고, 진멸시키는 자는 의로운 족속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서로 그 어떤 연결점이나 타협점이 없습니다. 완전한 단절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하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혼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꽃밭에 벌레가 들어와서 아름답게 가꾼 꽃을 상하게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벌레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꽃밭을 지키기 위해서 벌레를 잡아서 없애버릴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도 우리를 위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복주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잘 지키면 복주고 못 지키면 벌주기 위한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껏 교회 상식은 잘하고 못하고에 상벌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잘해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복이란 은혜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상벌 차원이 아닙니다. 5절의 명령도 그와 같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시고 우상은 철저하게 짓밟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뜨리십니까? 우상은 인간의 자기 사랑의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줄 능력자를 찾습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곧 우상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신입니다.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신입니다. 다만 인간이 생각한대로 움직여 줘야 하고, 인간이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신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깨뜨리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상이 아님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멸하고,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것은 단지 가나안 민족을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약속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는 결코 이방인과 같은 삶의 모습이 있어서는 안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멸망을 보고 어떤 것이 멸망의 모습인가를 마음에 새기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진멸하면서 재미있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이방인을 진멸하면서 '내가 저들과 같이 산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이다'는 것을 가슴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깨뜨리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을 진멸 당하고 불사름을 당할 멸망의 장소로 보지 않고 오히려 축복의 장소로 여기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민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6,7절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택하심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수효가 적은 민족, 가장 힘이 약한 민족을 택하셔서 성민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과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우상은 적은 수효가 아니라 많은 수효를 기뻐합니다. 힘이 주어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반대입니다. 수효가 적은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고 힘이 약한 것을 기뻐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나님은 수가 많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교회 부흥을 외치고 숫자를 늘이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결국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임을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자체에 선택할 만한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가장 적은 민족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조상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택하시고 바로의 손에서 끄집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합니다. 성민된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일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대까지 하나님께서 인애를 베푸시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민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셨음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뭔가 남들처럼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남들처럼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 받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모습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은 자기를 보고 자신이 한 것만큼 당당한 태도로 신을 찾고, 신이 자기를 사랑할 조건을 미리 갖추고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는 것이고, 그 때문에 진멸을 당해야 한 것입니다.

신자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민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만 크게 보이고 하나님은 크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민은 하나님이 언약을 이행하심으로 성민 되었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하는 것은 한번 하신 언약은 파기하지 않으시고 지키고야 마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고야 마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를 성민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곧 성민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언약을 이루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민된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 보이게 되고 그리스도만 자랑할 뿐입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을 주목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런 성민의 모습을 누가 모방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의 크고 작은 것에 매여서 살아가겠습니까? 가장 적은 수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이방인과 똑같이 크고 많은 것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신을 찾고자 하겠습니까? 때문에 성민은 자기를 보지 않고 사는 자이며, 은혜로만 즐거워하는 자이며, 비록 작은데서라도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성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애는 이런 성민에게서는 끊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들에게 과연 이런 성민의 모습이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신자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민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민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귀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방 사람이 더 좋아 보일 때 그들은 이방인과 혼인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도 단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무조건 성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조건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귀하게 보이는 사람이 성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민은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쪽은 멸망당할 자이고 한쪽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입니다. 따라서 성민은 세상을 똑같이 보지 않습니다. 둘로 구분하여 봅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크고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적은 것을 소유하고 약하고 힘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성민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민답게 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은 것에 실망하지 않으며,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바라보고, 언약이 이루어진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영생의 나라는 성민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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