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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의 하나님 (신 06: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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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의 하나님(신 6:20-25)

오늘날 교인들이나 종교단체, 또는 교파들은 종교라고 하는 깊은 수렁 속에 빠진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믿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둔 채 신을 찾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데, 아예 처음부터 말씀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지적과 책망을 받게 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지적을 발견하고 말씀 안에서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놀라운 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교회를 바라볼 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신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관심 없이 자기에게 소중한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나에게 소중하고 내 교회에 소중한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생각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쓰레기로 여겨버리십니다.

가령 선교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교회들은 선교를 소중히 여깁니다. 교회가 해야 할 귀한 일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게으른 교회고 교회다운 교회가 아닌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과연 선교를 소중하게 생각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교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편에서 선교는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연히 선교를 좋아하실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거부감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마음보다는 거부감과 반발부터 앞서는 것은 내 생각과 상식이 앞서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과 상식 속에 하나님을 가둬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과 생각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생각과 상식에 가둬두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업적을 쌓아가고 그것을 지키는 일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그것이 자신의 종교업적을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사상이라면 철저하게 거부하고 맙니다. 진짜 복음은 자신의 종교업적을 칭찬해주고 옹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탐욕 속에서 제조되어진 것을 스스로 복음이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끼리 힘을 모아서 자기 단체를 잘 운영해 가는 종교조직을 찾으시는 것도 아니고, 전통과 역사가 있는 단체를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고 찾으시는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도 '어린양의 흔적'이 있는 국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신자라면 항상 '흠없는 어린양'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닫고 자신에게서도 어린양의 흔적을 찾아가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특이한 국가입니다. 떡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국가가 아니라 이제는 말씀으로 유지되는 국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사람들만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홍해가 갈라지고 그 속을 건너서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물과 양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드러낸 것입니다.

만약 애굽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와 똑같이 물과 양식으로 생존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과연 애굽과 구별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독 이스라엘만이 홍해에서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나야 할 근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만 살리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살리실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주어진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의 약속 때문에 그들을 살리신 것이지 이스라엘이란 민족성 때문에, 또는 그들이 예뻐서 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보여야 합니까? 그것은 가장 먼저 '생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물과 양식이 필요했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양식과 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서 또는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하실지에 대해서 자기들 멋대로 상상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선교를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다른 종교보다도 교세가 커지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을 정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종교성과 상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우상이며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거짓된 신입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의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우상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 무엇이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20절에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증거, 말씀, 규례, 법도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서로 각각 구별되고 독립된 4종류의 명령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증거가 있고, 또 다른 말씀이 있고, 또 다른 규례가 있고, 또 다른 법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을 4가지의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가르칠 때 아들의 입장에서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규례대로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은 자기 좋을 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자기 기쁨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고, 반발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질문을 할 때 이렇게 대답하라는 해답을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답이 21-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 할 이유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 그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지킴으로서 주어지는 복이나 대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말씀을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나오라'는 말 한마디로 되어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2절에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기 위해서 애굽과 바로에게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잘 아는 10가지 재앙입니다.

10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등장하심으로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될 때, 이스라엘은 애굽의 농산물로 연장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며 또 다른 생명이 있음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 10번째 재앙인 장자의 재앙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죽음 속에서 살아난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보호받은 집단'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집단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0재앙은 단지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한 애굽에 대한 공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것이 10재앙입니다. 즉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개입된 집단, 즉 이스라엘은 산 자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희생의 피가 개입되지 않은 집단, 즉 애굽은 죽은 자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산 자된 이스라엘이 예전의 이스라엘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이스라엘은 애굽과 똑같이 농산물로 생명을 연장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죽은 자라는 것에는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속에서 희생의 피로서 보호받고 살아난 산 자된 자들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면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점이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데,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이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반복되어짐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취급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것도 희생의 피안에서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행도 어린양의 희생의 피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 자체와의 동행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자는 결국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도 역시 하나님은 희생의 피가 반복되지 않는 것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것도 인간이 기도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계속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피를 반복할 때 그 피속에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는 어린양의 피의 흔적은 관심도 없이 다만 십자가만 내걸고 하나님을 불러대고 예배를 드리고 여러 가지 종교사업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해주시는 교회가 되는 줄로 알고 있으니 이것이 곧 '여호와를 모르는 바로'와 같은 것이고 멸망당할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는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주어진 참된 생명을 모르고 오직 자기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해보고자 하는 세력들과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죄없으신 분의 희생을 통해서 죄있는 자들을 구출해내는 자비의 정신을 보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자비의 정신을 모른다면 여호와의 원수된 자요, 여호와를 모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과 명령과 규례를 주신 것은 바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아라'는 의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죄인된 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죄없으신 분이 희생하신 그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아느냐는 것이 곧 말씀이고 규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말씀과 규례와 법도에 대해서 물을 때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정말 교회다운 교회들이 많이 보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소말리아 난민을 위해서 식량을 보내고, 식량을 보내기 위해서 한끼 굶는 운동을 벌이고, 굶주리는 북한을 위해서 쌀 보내기 운동에 앞장서고, 하나님을 찾고 예수를 찾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면 교회가 되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차원 높은 도덕과 윤리로 치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개입되어야 교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희생의 피의 흔적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다운 교회는 모든 관심이 희생의 피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피의 흔적보다는 자신의 종교사업을 확장하고 번성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결과로 그치고 말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홍해사건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홍해 사건은 어린양이 피가 개입된 이스라엘은 산 자요, 피가 개입되지 않은 애굽은 죽은 자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애굽 군사는 홍해에서 죽고 이스라엘은 살아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살아날 만한 어떤 귀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 귀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이스라엘에게 개입되어 있는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자 속에서 산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인간의 힘과 노력에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스스로의 노력과 희생과 은혜와 자비로서 모든 일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그러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뭔가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안심하고 살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결국 오늘날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목표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종교성과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절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희생과 사랑과 자비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이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의 흔적을 지니고 산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하나님은 선교를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은 선교하고 구제하고 예배하는 인간의 행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피의 흔적입니다. 선교를 하든 구제를 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피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 흔적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말씀을 실제 현재 신자들의 삶에 적용시키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희생의 피가 개입된 집단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서 보여져야 할 삶의 모습은 첫째는, 애굽에서와 같이 농산물로 목숨을 유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말씀으로 유지되는 생명이 나타나야 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를 위하고 자기에게만 관심 두고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의 삶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힘으로 애굽을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힘으로 세상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기사와 이적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게 된 신자들은 이제부터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자기의 무가치함과 죄임 됨을 고백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이고, 옛날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끊이지 않음으로 출애굽이 계속되어져야 했던 것처럼 오늘 신자들도 계속되어지는 출애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에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의로움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신자의 의로움은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와 자비를 안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자로 선택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인간은 먹고사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십시오. 인간의 본성은 먹고사는 것, 내 몸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셔서 내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세상에서 성공한 자식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자식이 되게 해달라고, 만약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이 때려서라도 신자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피의 흔적을 지닌 채 날마다 출애굽하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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