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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무 (신 0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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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 가정에서 자식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 중의 하나가 공부 문제입니다. 부모 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데 마음 태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식이 공부하라는 부모님 말 한마디에 순순히 공부할 자식도 없습니다.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고 매를 들어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 할뿐입니다. 그러나 그 머리 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떠돌면서 공부하고는 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자식들의 현실이고, 또 부모들도 예전에 다 체험했던 일들이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공부 안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기도 참으로 난감하고 앞일도 걱정되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야단이라도 치면 '누가 공부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줄 알아요! 해도 안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나도 답답해 미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반발합니다. 이런 자식과의 싸움에서 '저 웬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이, 신자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부해라해도 공부에는 전혀 마음 두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유행가에 팝송에 정신 팔려 있는 아이들처럼,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공부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대하고 있는 자식들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눈에 자식이 그렇게 보이듯 하나님의 눈에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사실 공부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야단 맞고 매맞을까봐서 억지로 책상에 앉아 책 펴놓고 A. B. C는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귀에는 카세트 이어폰을 꽂아 놓고 유행가 가락에 발장난 치고 있는 자식과 같은 그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란 억지로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어른들의 교육방법은 공부를 못하게 하는 요소를 찾아서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행가를 듣지 못하도록 카세트를 빼앗아 버린다든지, 전자 오락실을 가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감시한다든지, 연예인들에게서 유행하는 옷이나 머리 모양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뭐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요소는 모조리 아이들로부터 떼어놓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재를 가한다고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생각입니다. 카세트를 빼앗아 버린다고 해서 유행가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락실을 가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오락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오락실을 가서 공부를 못하나, 오락실엔 가지 못했지만 그것 생각한다고 공부 못하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지금껏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금지하고 막아왔지만 결국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가 신앙생활의 방해꾼인양 술 먹지 말라 담배 피지 말라고 외쳐왔지만 술안먹고 담배 안 피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억제하고 죄를 없애려고 해봐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없애지도 못하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려지는 결론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신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아무리 신자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해도 인간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식이 부모의 말대로 그대로 움직이고 순종한다면 성공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행가 듣지 말라하면 듣지 않고, 오락실 가지 말라하면 안가고, 공부해라 하면 다른데 신경 안쓰고 공부만 한다면 분명히 성공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2-16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13-16절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조건은 12절의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네게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법도대로 실천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한 땅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이유가 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까?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차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안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이 좋으면 나중에 자기 인생에 크게 득이 되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또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은 공부가 하기 싫고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기 싫고 왜 안되는 것입니까?

성공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우선 눈에 보이고 하고 싶은 것은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것입니다. 지금 부모들은 이런 시절을 지내지 않았습니까? 공부하면 성공한다는 것을 몰라서 공부를 안했습니까? 다 알면서도 게을리 하다가 어른이 되어서 실력이 필요한 세계를 접했을 때 비로소 후회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 나오고 성경 펴놓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나오고 성경책을 펴놓고 찬송을 불러도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고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오히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생각은 여러분을 붙들고 괴롭힐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한계를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어라' '하루에 몇 분 기도해라' '성경을 손을 직접 써라'는 등의 행위적 규례들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신자들이 성경을 보기 싫어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복이 되는 길인가를 알고 있지만 자기 뜻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겨우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기사 잔소리 듣기 싫다고 뛰쳐 나가버린 사람도 많은데 앉아있는 것만도 대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앉았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정상적인 신자가 되어가고자 이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25절에 보면 '올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올무라는 것은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은 덫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거나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면 그것이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올무로 인해서 복을 받지 못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올무에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올무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그들을 괴롭힙니다. 말씀을 지켜야 할 줄을 알면서도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올무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올무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성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이스라엘이 성민된 것은 7,8절의 말씀대로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연고로, 여호와께서 다만 사랑하심을 인하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성민 되게 하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성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성민 되게 하신 방식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효를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수효를 보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사랑하셔서 성민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에만 감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심으로 성민 되었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고 이렇게 살아갈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귀의 올무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성민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17절에 보면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 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의 수효를 보고 두려워 할 것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있을 때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18,19절) 라고 말씀하시면서 수효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국 수효를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들의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에 대한 믿음보다는 내 앞에서 나를 가로막는 자들의 힘을 더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올무입니다. 마귀는 신자들이 약속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약속이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힘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효력이 없고 실현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탐을 보냈을 때 가나안 민족이 장대 같다는 말만 듣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을 가진 것이 아닙니까? 이 올무로 인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효를 보고 두려워하고,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약속에 대해서 희미하고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올무라면 이 올무는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마귀는 노회 총회라는 세력을 앞세워서 목사를 두려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노회 총회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았다가는 목사라는 직에서 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일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약화시키게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올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권력과 수효가 두려워서 복음을 복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마귀의 계책이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직장에서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믿음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할 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핀잔과 반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위의 눈총이 두렵거나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서 믿음의 모습을 감추고자 할 때 마귀가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수효를 보고 두려워 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앞에 두려움의 대상이 있을 때, 굴복해 버리면서 '내가 힘을 길러서 저 두려움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힘을 길러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힘으로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나 위에 군림하는 자가 없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결국 아무리 힘을 길렀다고 해도 또 다른 힘있는 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을 물리치고 그들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을 많은 수효와 힘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힘을 준다해도 또 다른 힘센 민족 앞에서는 다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전혀 쓰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고, 오늘날 우리들을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올무를 벗어버리는 길입니다.

올무란 그것을 벗기 위해서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자신을 조여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스스로 올무를 벗기 위해서 힘을 쓴다는 것은 결국 더욱 더 올무에 조여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은, 우리가 힘쓸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있으니 너희는 다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심하라는 것이 말씀이고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공부는 나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고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포부를 버리고 가만히 하나님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참으로 힘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자꾸 우리에게 뭔가 해볼 것을 부추깁니다. 해보면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으로 유혹합니다. 말씀대로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같은 의심이 들게 합니다. 손해가 될 것같은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손짓에 끌려가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닌 것이 우리들의 삶의 실체이지 않습니까? 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살아오시면서 수없이 많은 두려운 일들을 겪고 또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나온 자리에서 과거의 두려움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왜 그때 그토록 두려워했고 근심 걱정에 빠졌던가?'라고 하면서 뭔가 후회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린 항상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했던 것이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 깨닫지 마시고 두려움이 있는 현장에서 깨닫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두려움이 될만한 일들로 우리를 가로막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이 곧 올무에 매이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질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아이가 빵점을 받아왔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남편이 애를 먹일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비하면 시시한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그런 깨달음이 있음으로서 세상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하고 일이 잘 안된다고 짜증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리에 잊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완전하게 지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모든 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으면 잘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약속된 복은 눈에 보인 약속의 땅에서 실현될 것들입니다. 즉 약속이 눈에 보인 땅인 만큼 눈에 보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약속의 땅은 보이지 않는 땅입니다. 따라서 복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이는 땅, 보이는 복은 보이지 않는 복을 약속하는 그림자였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무에 매이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에게 참된 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분임을 알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누가 뭐래도 복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임을 알 때 세상의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좋은 것이 없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내 비록 나쁜 것이라고 해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용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좋은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만이 내 여호와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건강하게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병들게 하셔도 믿습니다. 사업 잘되게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셔도 믿습니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는 속에도 인간의 낮고 얕은 생각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한 뜻'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내가 생각하는 좋고 나쁘다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고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올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올무란 내 쪽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복으로 안 순간 세상의 좋고 나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신자의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무에 매여서 두려움에 빠져 살지 마시고 참된 복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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