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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 야 (신 0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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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떡이 사람을 살리는가, 말씀이 사람을 살리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젖과 꿀이 있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는 땅입니다. 오히려 비록 종으로 살았지만 애굽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부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애굽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광야라는 장소가 왜 필요했습니까?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낮은 자리로 고통의 자리로 이끌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서, 좋은 것이 풍부하고, 평안이 지속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거부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욥 1:9절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말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욥의 집과 소유를 감싸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반발한 것입니다. 사단은 욥이 아무리 의롭고 진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의로움은 까닭 없는 의로움이 아니요,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욥을 복되게 해주셨고 보호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 것이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고 주어지는 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사단의 욥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말을 보면 사단은 인간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면 만면에 미소를 띄면서 접근하고, 그렇지 못하면 태도가 돌변되는 인간 내면의 속성을 사단은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욥의 친구들과 그 부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친구들은 복을 받는데에도 까닭이 있듯이 징벌을 받는데도 필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의식 수준입니다. 그들은 소위 '의로운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애굽에서 구출 받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들인데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고난이 왜 주어졌는지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속에 사단이 끼여들게 되고 시험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까닭과 이유를 없애 보는 시험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욥의 소유를 쳐보라고 합니다. 소유한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받은 축복을 빼앗겨도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지 않는지 흔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흔드시는 것입니다. 은혜가운데서 허락하신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시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고통의 자리로 집어넣기도 하십니다.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거나 신실한 믿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이 시험 속에서 믿음의 여부가 밝혀질 것입니다.

신자는 광야를 피해서 천국으로 갈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건너뛸 수 있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교회를 옴으로서 광야를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반드시 광야를 거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의 시험을 거치셨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될 것들을 제공하는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떡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경배의 대상은 세상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듯,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시듯, 우리 역시 광야로 인도함 받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우리들이 과연 무엇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증명될 것이고 바로 그것을 찾아서 버려야 하는 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은 애굽의 삶의 방식이고, 말씀으로 사는 것은 천국의 삶의 방식입니다. 애굽은 떡이 생명으로 되어 있는 나라이지만, 천국은 말씀이 생명으로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서로가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광야를 통해서 애굽의 삶의 방식을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소망하고 산다는 것은 단순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떡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떡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한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생명 되는 것이 떡 아닌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에 떡에 눈 돌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떡이 없어도 염려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살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매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인간 수준에 머물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인간 수준에 머물러 버리면 짐승과 똑같이 자기 욕심에 붙들려서 본성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았습니다. 자기들이 손수 손으로 만들어 먹거나 일을 해서 수확한 것을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먹던 것을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생전 보지도 못한 만나를 내려주신 것도 애굽의 음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의복도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릍지 않았던 것도 '너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애굽의 삶의 방식이 버려지기를 요구받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광야가 싫고 없었으면 좋겠다는 불평보다는 광야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신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광야란 애굽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애굽의 것을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애굽의 것을 포기한 가운데 나오는 자연스러운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 애굽의 것을 자기 소유로 굳건히 세우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포기가 아니라 더욱 깊은 집착과 미련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보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여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들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는 누구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은 자리를 쳐서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십니다. 그리고 '그래도 내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살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높은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자라면 낮은 자리에서 '그래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갈래?'라고 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쳤던 광야에 내가 지금 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된 나라로 인도하시는 과정임을 깨닫고 낮은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말씀만이 자신의 생명 됨을 고백할 때 그것이 곧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광야란 우리를 높이는 곳이 아니라 낮추는 곳입니다. 때문에 광야를 살면서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고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가지는 갈등과 방황이 모두 이런 문제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낮아지기를 싫어하는 것 때문에 갈등과 방황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이스라엘을 낮추어서 말씀으로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확인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에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짜 삶은 가나안에서의 삶입니다. 광야는 다만 약속의 땅을 위한 준비된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이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단지 우리를 천국에서 천국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천국에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버리라고 살게 하시는데 오히려 가지고 모으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어떻게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1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라고 합니다. 7-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아름다운 땅, 살기 좋은 땅, 모든 것이 풍성한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축복, 즉 높아진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인하여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스라엘이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의 출처를 여호와로 인정한 가운데 하나님만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낮추어진 자리에서도 감사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고 17절에서도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림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교만은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이 모든 소유를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천국에서 용납될 수 없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셔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낮아진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높아진 자리가 아니라 낮아지는 자리를 더욱 사모할 것이고,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 바라보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교인을 높은 자리로 인도하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부터가 낮아진 자리를 외면하고 높아지는 자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 속에 과연 죄인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이 계시겠습니까? 죄인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은 교회 스스로 쫓아 내버리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하고 위대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 거짓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실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높은 자리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낮아진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지신 분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과연 낮아진 자리에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낮아진 자리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 때 내가 과연 그 낮은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높은 자리를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높아지는 자리가 내 마음을 비우고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를 사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의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이 지금 광야를 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광야로 보지 않고 단지 천국 가기 전에 육신을 가지고 사는 장소로만 봐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교회생활 충실히 잘하고 착한 일도 대강 하면 천국 간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신자들을 천국과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시험입니다.

여러분, 광야를 고생의 장소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광야를 고생의 장소로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광야는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광야가 고생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것은 세상을 떡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자에게만 이해될 것입니다.

천국은 천국이 아닌 사고방식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여러분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사단의 사고방식을 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이 은총과 사랑이 이해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광야가 이해되어진다면, 그리고 광야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백성입니다.

5절에서도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시고, 아들이기 때문에 광야로 인도하셔서 마음을 낮추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고생스럽다거나 피할 길이 없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가운데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질 때의 기쁨은 아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대로 실천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어서 세상에서 잘살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말씀을 이용해서 높아지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상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창조된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창조의 원칙이 있는 자리로 되돌려 놓고자 하십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왔습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얻으며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높아진 것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인 양 생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실 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얻은 것을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내것이 아니라면 내 손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빼앗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내손에 잠시 맡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이런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이 기도이고 묵상입니다. 엉뚱한 것 때문에 마음 쓰고 힘들어하면서 다른 기도, 다른 묵상을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그런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모든 힘을 쓰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운 목표와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지 마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에 순종되기 위해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높아지는 나의 목표를 바라보고 나오지 마시고 낮은 자리로 이끌어서 세상 사고방식을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나오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을 낮아지게 한 그 자리 그 사건은 여러분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은총과 사랑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신다면 교회는 여러분의 낮아짐이 실천되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와 같습니다. 다른 점은 신자는 그 주어진 범위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주어진 범위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벗어나고자 힘씁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실망이고 실패입니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 사는 것, 이것이 낮아진 마음입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배우라고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광야에서 살게 하십니다. 자기를 보지 말고 낮은 자리에 처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덕분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광야에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셨다면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게 됨을 당연하게 여기십시오. 광야에 정착하려고 하지 말고 약속의 땅, 천국에 정착하는 날을 소망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여러분을 세상에서 복된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되게 하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광야에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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