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간의 의 (신 09:1-8)

첨부 1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함을 연결시키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즉 자신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선한 행동의 대가로서 주어진 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있으면 자연히 혹 내가 잘못한 일이 있지는 않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상선벌악'(賞善罰惡)의 하나님입니다. 즉 상을 받을만해서 받았고 벌을 받을만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지식을 가진 인간들은 좋은 일은 모두 상으로, 나쁜 일은 벌로 연관짓게 됩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한 자신의 행위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고 하면서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착한 일을 했는데 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있게 하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인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간증하기를 '제가 십일조를 철저하게 잘했더니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복을 주셨습니다'라고 할 때,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하는 모든 교인들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인은 십일조를 잘하는데도 항상 일이 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십일조를 잘했더니 복을 주셨다'는 말을 들으면 과연 그 말을 인정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평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때문에 기도하면 복이 주어지고, 주일성수하면 복이 주어지고, 십일조하면 만배로 갚아주신다고 하는 말들은 하나님을 팔아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장사치들의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정해 버리는 자들입니다. 구원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구원을 받을만한 의의 자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말한다면 결국 구원 = 긍휼이란 방식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구원을 받고 믿음이 주어지고 거듭나면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라고 할 때도 성령을 받으면 없던 신비한 능력이 생기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한꺼번에 생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성령의 강약에 따라서 그 자질의 정도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거듭남 = 성령 충만 = 선한 행동, 이러한 방식에 빠져 있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처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현대교인들의 신앙생활은 구약 이스라엘의 경로를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한 것을 자신들은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기사 이스라엘은 하지 못했던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고, 자기 민족밖에 모르던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까지 구제를 한다고 열심을 내고 있으니 옛날의 이스라엘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는 선교를 하지 않고 자기나라 밖에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자기에게 의의 근거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죄란 자기에게서 의의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즉 내가 구원받을만 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상을 받을만해서 받고 복을 받을만해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수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되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은혜가 주어지고 주님이 나를 도우시는 근거를 자기 자신의 행동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은혜가 주어지는 것도 뭔가 은혜를 받을만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위장한 자기 의입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은혜'를 말함으로서 자기의 의를 더욱 상승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악입니다. 자기에게 도취된 채 자기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자기에게 도취되고, 열심히 구제하고 선교하는 자신에게 도취되고, 열심히 주일성수하는 자신에게 도취된 채 좋은 일만 있으면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하면서 결국 자기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종교인들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 도취로부터, 자기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주님의 의만 사모한다면 자기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철저하게 부정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 좋은 일속에서는 겸손할 수 있고, 나쁜 일 속에서는 그것을 당연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신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인간의 선과 의를 모두 심판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알고 거듭나고 성령을 받은 신자라면 선을 행하려고 힘쓰는 쪽이 아니라 자신에게 전혀 어떤 기대도 걸지 않는 쪽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말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 편을 들어주지 않고 인간 편에 서 있지 않은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고자 하는 분발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열심까지 무너뜨리는 말이라고 배척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의 모습이고, 이런 인간의 모습이 옛날 이스라엘에게서 또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그래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옛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그 백성은 제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크고 강대한 나라와 부딪힐 것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어떤 어려움에 처할 것인가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힘으로 쫓아 낼 수 없는 강한 민족을 이스라엘 앞에 두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이것이 강한 민족을 이스라엘 앞에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과 같은 일을 당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편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령 공부는 못하지만 교회를 다닌 학생과 공부는 잘하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학생이 같은 학교에 시험을 봤을 때 교회 다닌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데도 합격을 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은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데도 불합격을 했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겠습니까? 틀림없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행동을 의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비록 은혜를 말하지만 의의 근거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잘 나온 학생과 잘 나오지 않은 학생이 있을 때 교회 잘나온 학생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틀림없이 주일을 잘 지키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대한 아낙 자손을 물리치실 때 그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 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워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택한 백성이어서,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십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그들을 복주기 위해서 아낙자손을 물리친 것이라면 결국 아낙자손들은 이스라엘 때문에 공연한 피해를 입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낙자손을 물리친 것은 이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쫓아내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자기 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아낙 자손과 똑같이 악한 인간이고 멸망 받을 존재들인데 이렇게 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찾으시는 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엉뚱한 것만 의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인데, 자신의 행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나 아낙 자손이나 똑같이 악한 인간으로 보신다면 무엇 때문에 아낙 자손의 악만 보시고 그들을 쫓아내시며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지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안다면 절대로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착함이나 의로움을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런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신자가 된 것은 우리의 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면 안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악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자답다는 것을 자기 의로움과 착함을 통해서 인정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를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악한 죄의 모습입니다.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선언합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굽힐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으로서의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악한 인간이고 멸망을 받아야 할 인간임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조금만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원망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린 이것을 광야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원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전혀 호의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선한 행동을 보이고 착하게 살고 의로운 행동을 나타낸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호의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죄인으로만 보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서는 안되고, 성경을 보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주일 성수라는 것을 한다면 그것을 하면서도 '나는 죄인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왜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선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에 선한 것이 있다면 인간은 구원은 굳이 예수님의 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곧은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제일 잘하는 것입니다. 7절에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일은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거역하던 일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는 것이 2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은석교회,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온통 여호와를 격노케 하는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조금만 잘한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내심 마음에 담아두면서 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죄인이다'는 것을 거듭 외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의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의로움에 빠져 버린다면 우리를 대신해 의로 오신 분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은혜를 외친다고 해도 자기 의를 내세운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를 외친들 무엇합니까? 그 마음속에 자기 의가 살아있다면 십자가의 피는 한낱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2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죄악을 행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등장합니다. 죄의 해결은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멸망이었지만 그 멸망을 모세가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마시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기도함으로 심판을 면한 것입니다(9, 18, 25).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서 모세가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이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의 의가 아니라 모세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서 죄어진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천국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되어진 일 때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잊는다면 우린 결국 자신의 의를 내세우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곧 목이 곧은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보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신 것은 이 땅에 약속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말씀을 받고 있을 때 산밑의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세는 40일 동안 떡과 물을 먹지 않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긍휼속에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목이 곧은 백성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의 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기의 착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신자는 다만 그리스도의 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