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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땅 (신 1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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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자란 말씀을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행동을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이 우선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인간은 두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두고 말씀을 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자기의 노력과 열심히 충족시켜 드리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말씀 하나하나를 자신의 실천 목표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인간은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한 채 말씀을 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요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 없는 악한 기질로 가득한 인간이며 도저히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더러운 자들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실천이라는 자기 가능성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오히려 자신이 더욱 악한자임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행위가 존재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는 먼지 같은 미미한 것임을 알고 자랑 자체를 부끄럽게 여길 뿐입니다. 이들에게 있는 것은 심판 속에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결국 이들은 말씀을 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 마음속에 더욱 크게 부각될 뿐입니다.

여러분, 이 두부류의 인간중 누가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앞세우며 실천을 독려하면서 행동으로 신자됨의 표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오직 살려주시는 주님이 은혜만 바라보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신자라면 뭔가 신자다운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즉 신앙이 주어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신앙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소유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의로운 행동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신앙을 소유화할 때 인간은 신앙의 경쟁을 하게 됩니다. 자기 소유를 남과 비교하면서 경쟁하는 것은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기 신앙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행함에 강도를 더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신앙이겠습니까? 서로 경쟁을 일으키는 것이 신앙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무가치함을 안다는 것은 일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숨어있는 본성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면서 '나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는 고백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마음의 할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행동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행동은 자연스럽게 있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귀하게 볼뿐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타국에 선교사로 간 행동이나 일반 가정생활이나 특별히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교사를 갔다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생계를 위한 것이라면 불신자가 자기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뭔가 특별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사단이 노리는 함정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그만큼 남도 도와주게 되고, 봉사도 헌신도 남다를 것이라는 마음이 스스로를 올무에 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은혜로 산다'라고 고백한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하게 하고 사랑의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함으로서 은혜가 아닌 행위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스스로 세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땅이 바로 애굽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은 애굽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땅을 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애굽 땅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이 두 땅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10-12절을 보면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즉 애굽 땅에서 농사 지을 때는 인간이 물을 모아놓은 후에 그 물을 발로 수차를 돌려 대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농사를 짓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즉 물을 모아놓을 수도 없고 따라서 인간이 발로 수차를 돌려서 물을 댈 수도 없는 땅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세초부터 세말까지라는 것은 일년 내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일년 내내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기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려고 하는 애굽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은혜의 땅이 거부합니다. 여호와의 눈이 항상 지키시고 보살피는 땅이기 때문에 잘되는 못되든 항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잊지 말아야 하는 땅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 '명령을 지킨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후에 2절부터 6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일, 광야에서 행하신 일, 땅을 열어서 다단과 아비람을 삼키신 일 등을 말씀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광야에서 수많은 원망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지키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망각하고 다단과 아비람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땅을 열어서 삼키도록 했습니다. 결국 1절에서 말씀하는 직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보이는 민족으로 부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 성도들이 맡은 직임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 장로 이런 것이 직임이 아니라 직분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야 할 신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여러분의 직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직임을 받은 자가 지켜야 할 것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절이 바로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이 내포하고 있는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8-25절까지가 모두 이러한 의미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13절에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즉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존재케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4,15)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신을 섬기면, 즉 인간의 욕심을 앞세우고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보고자 할 때는 비를 내리지 않고 소산을 내지 않아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하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면 그들이 행할 것은 무엇입니까? 18-20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할 삶의 원칙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신자는 항상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지는 않겠지만 앉았을 대든 행할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성경을 잊지 말고 가까이 하며 항상 성경 읽기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은혜의 땅에서는 삶의 중심이 오직 은혜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무슨 행동을 하든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한다면 그것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삶의 원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 안에서 사는 삶은 오늘날 신자들의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라면 세상에 매어 살던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 되었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 거하는 신자에게 마땅한 삶의 모습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가치도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성령 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이런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목사도 '나는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다'는 입장에서 해야 하고, 장로도 이런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쓸데없는 힘의 경쟁을 하지 않고 설사 수모와 멸시가 있다고 해도 원래 자기 모습에 대비함으로서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에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돌보시고 지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 안의 자기 백성을 이렇게 쉬지 않고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여호와로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고 먹고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을 오늘 신자들도 하나님이 세상 것으로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가나안 땅은 눈에 보이는 땅입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표는 땅에서 나는 소산물의 충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은혜의 땅은 성령 안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배부름은 세상의 소산물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이 있을 뿐입니다. 갈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성령 안에서만 살면 어디에서 살아도 그 자리가 천국이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고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사는 신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되어짐을 잊지 않습니다. 밥먹을 가치도 없고 물 마실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럴 때 혹 주리고 목마른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이것이 원래 나의 모습임을 생각하고 그동안 배부르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이미 배부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인간의 본래 실체임을 안다면 얼마가 주어지든 그것은 모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하늘의 양식임을 알고 먹었을 때는 신령한 양식이지만 단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음식으로 먹을 때는 썩을 양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거나 내일을 위해서 남겨 놓았을 때는 모두 썩어버렸던 것입니다. 은혜가 아닌 인간의 수단과 노력으로 살려고 하는 애굽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먹고 마시면서도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것은 신령한 음식, 신령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그 힘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은혜로 사는 자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산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살든지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신자입니다. 피흘려 여러분을 사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놓지 않고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내가 이래가지고 천국 가겠나?'라고 걱정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관심이 자기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기 행위 때문에 믿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나도 주님이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서는 자랑이 있을 수 없고, 경쟁이 있을 수 없고,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원리만이 흘러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에만 부지런히 할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그 흔적이 보여지는데 열심일 뿐입니다. 이 마음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과 삶으로 이어질 때 성령 안에서 배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애굽의 것으로 배고파함으로 은혜의 배부름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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