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피와 교회 (신 12:15-28)

첨부 1



피와 교회(신 12:15-28)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말할 때 '여자란 참으로 복잡한 인간이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아마도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쉽게 마음이 변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좋은 것 같다가도 금방 싫어하고 싫어하는 것 같다가도 금방 좋아하는 여자의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복잡하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따져볼 때 여자만 복잡한 인간이 아닙니다. 여자의 감정과 마음이 쉽게 변하고 쉽게 흔들리는 것은 여자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린 마음이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지 유독 여자만 복잡한 인간이어서가 아닙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구조가 복잡하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감각하고 보고 듣고 평가하는 모든 것들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앎과 삶이 하나되어 나타나는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령 길을 가는데 불량배 여럿 명이 한 사람을 폭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목격을 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앎은 어떻게 작용을 합니까? 앎은 인간의 속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삶은 앎이 외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또 다른 내 속의 외침이 앎의 외침을 눌러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을 외면해 버리고 못본척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 사람은 도와주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됩니다. 앎의 외침을 외면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은 지극히 윤리적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스승을 판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역시 신앙과 관계없이 윤리적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도와주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역시 가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이라는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볼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합리화입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었다. 한 놈만 있었어도 내가 뛰어 들어서 도와주었을 텐데 이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양심의 짐을 벗고자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앎이 요구하는 대로 삶이 움직이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서 외치는 여러 가지의 목소리에 의해서 삶이 움직이는 아주 복잡한 구조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복잡한 얘기이지만 이런 얘기를 굳이 드리는 것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세상으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인간이 복잡하게 살아가게 된 이유도 죄 때문이고, 이런 복잡한 얘기를 여러분께 해야 하는 것도 역시 죄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의 삶은 결코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자기 탐욕에 갇히게 되었을 때부터 복잡한 존재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젠 앎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이 개입되어서 수없이 교차되는 생각과 계산 속에서 '나에게 득이 된다. 해가 되지 않는다'는 답이 산출될 때 행동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앎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한 채 자기 사랑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런 굴레 속에서 살기 때문에 비록 좋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어렵기 때문에 도와준다고 할 때 친한 관계일수록 쉽게 돕지를 못하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최대한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돕게 됩니다. 결국 죄가 남을 돕는 것조차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이란 죄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죄의 산물이 형제의 사랑까지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는 것은 이 복잡한 구조로 얽혀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과 탐욕이 얽히고 설킨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복잡한 삶이 아니라 단 하나, 주님의 사랑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주님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내 사랑, 내 탐욕, 내 목표, 내 계획, 내 자존심, 내 인생, 내 교회, 이런 것들은 다 사라지고 주님의 사랑이 내 속에서 외치는 그 목소리에만 순종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맛보면서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소망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 항상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흔적이 스며있는 교회로 모여지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연히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 사랑과 탐욕을 덮어 버리기에 충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눈이 뜨일 때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내 마음에 자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흔적이 스며있는 교회로 모여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랑의 흔적이 스며있는 교회의 모습을 옛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규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 산다는 것은 자기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 사랑이라든가, 자기 자랑이라든가, 자기 욕망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신자가 서로 모일 때 그 모임, 즉 그 교회는 형제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초점이 제물을 먹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28절까지 계속해서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물을 먹는 일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단을 중심으로 되어져야 하는 일임을 언급합니다. 17,18절을 보면 제물을 각 성에서 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먹으라고 합니다. 다만 각 성에서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21절)의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결국 택하신 곳이라는 것은 장소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장소가 중요하다면 아무리 멀어도 그 장소까지 오라고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단 중심이란 소위 고정된 교회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신자들을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신앙을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고정된 교회, 즉 예배당 중심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곳에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는 제물의 피를 쏟아내고 고기를 태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반복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은혜의 땅의 삶의 법칙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애굽은 떡으로 살지만 가나안 땅은 말씀으로 삽니다. 그러나 애굽의 삶의 방식에 길들어져 있는 이스라엘은 말씀으로 사는 은혜의 방식에 쉽게 수긍하고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단에서 피가 뿌려지고 고기가 태워지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심으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규례와 법도를 실천하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들을 택하신 곳에 세워진 제단에서 벌어지는 피의 사건으로 인도해 갑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복이 강림하는 자리이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하나가 고기를 서로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정한 자, 부정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없습니다. 제물을 바치지 않은 레위인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즉 세상의 복잡한 인간 관계가 다 사라지고 오직 피에 의해서 죄를 용서받고 즐거워하는 백성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즐거움을 누리고 그 피를 중심으로 화목의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여져야 할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요 6:53)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단 중심으로 살지 아니하면 생명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예수' 하면서 왜 자꾸 죽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사느냐는 책망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벌어지는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사건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는 현장입니다. 제물의 죽음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의 종결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는 삶의 새로운 시작을 담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시작이 곧 제단 중심의 삶이고 이 삶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갈 것 같으면 교회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제물이 죽는 것만이 아닙니다. 피 흘린 제물의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은 고기가 아까워서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로 정해진 일입니다. 즉 제물이 희생하는 것으로 제사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나누어 먹음으로 제사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신자의 문제점은 나누는 것에 대해서 너무 무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주일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일 예배가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고난과 박해가 있던 시절에는 모이라는 강요를 하지 않아도 날마다 숨어 모이면서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면서 주님을 소망하는 신앙으로 고난을 견뎌나갔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박해가 사라지면서 점차 모임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없는 것을 좋아하지만 결국 마귀는 고난이 없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지 예배 참석에 힘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 중심으로 사는지 제단 중심으로 사는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는 나혼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사하며 이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기를 소원하는 형제들이 함께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제단에서는 제사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고기를 나눠 먹는 일로 계속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형제와 형제가 서로 나누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랑과 희생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었다면 분명히 사랑과 희생은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향해 움직이겠습니까? 나와 함께 제단에 나와서 주님의 희생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형제들을 향해서 그 흔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어야 할 화목의 생활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신도 날마다 죽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세워 놓고 살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복잡성은 내가 살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계산하고 머리 굴리면서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윤리와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윤리와 양심도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베풀어지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윤리적 인간, 양심적 인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윤리이고 자기를 위한 양심이지 형제를 위한 윤리와 양심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 그대로 교회로 모이기 때문에 이름은 교회라고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나를 위한 신앙, 나를 위한 구원, 나를 위한 교회, 나를 위한 예수뿐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은석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분에게 신앙의 자유를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에도 매이지 마시고, 목사에게도 매이지 마시고, 오직 진리에 매인 자로서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실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분명히 나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한 자유로 발전되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염려스러운 것은 목사가 어떤 규칙과 법적인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자기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목사가 어떤 행동 수칙을 정해서 강요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지 목사의 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하라 해서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니며 신앙도 아니고 십자가의 정신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 전혀 강요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어떤 것인가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희생의 정신에 의해서 살 것을 말씀 드렸지만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고자 힘쓰는 모습보다는 목사의 강요가 없는 자유를 즐거워하고 누리는 모습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모임에 대한 자유가 좀 더 모이기를 힘쓰는 쪽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폐하는 쪽으로 발전되고. 헌금에 대한 자유가 좀 더 나누기 위해서 힘쓰는 쪽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내것을 아끼는 쪽으로 활용되고, 봉사에 대한 자유가 즐거움으로 형제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일을 찾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함과 형제에 대한 외면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서로 모여 고기를 나누어 먹으라는 말씀 속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란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며 그 삶에는 형제와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신앙 생활은 제단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고 죽기 위해서 살고 있다면 세상은 결코 방해물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포기가 없고 아직까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잡다한 일들이 계속해서 방해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바쁘게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쁜 일들을 중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쁜 일이 중심이 되어서 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바쁜 일 다음의 문제가 되버립니다. 바쁘니까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고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욕심을 이루는데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쁘게 하신 것이 돈 벌어서 헌금 많이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바쁜 가운데도 제단 중심,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를 묻기 위해서 바쁘게 하신 것으로는 왜 생각하지 못합니까? 신자는 바쁠 때일수록 기도하면서 내가 지금 바쁘다는 것 때문에 제단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면서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들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주님의 피를 떠나면 생명과 상관없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아신다면, 나의 전부를 버린다고 해도 생명만은 포기할 수 없음을 아신다면 세상을 복잡하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때그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형편 속에서 주님의 피를 즐거워하며 그 즐거움으로 형제를 위해 봉사하고 나누면서 자유함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세상에 미련을 벗어버리지 못한 우리의 죄와 탐욕을 깨닫고 이런 나 때문에 피 흘리시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즐거움으로 함께 모인 형제들에게 사랑의 흔적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신자의 인생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