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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의 할 일 (신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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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할 일(신 13:1-11)

'예수 믿고 나서 신자의 할 일이 뭔가?' 라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고 사회에서 좋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자로서 교회에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좋은 일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점을 잊어버린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신자의 할 일은 뭔가?'라고 질문했을 때 여기에 타당한 대답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믿고 있는데 주님을 믿는 것이 신자의 할 일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믿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점입니다.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그 믿음을 더욱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의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봉사로 이어지고 사회적인 좋은 일로 이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만 하지 주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믿음은 이미 자신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 교인들이 이해하는 믿음은 '믿음 없는 인간이 믿음을 소유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내가 어찌어찌 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지는 느낌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씨가 내 속에 심겨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할 일은 부지런히 믿음의 씨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믿음의 씨를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교회에 봉사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성경도 봐야하고 좋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스스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분위기를 통해서, 또는 교회에서의 가르침에 의해서 배우게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자라온 교인들이 '예수 믿은 후에 할 일'에 대해서 물을 때 '믿는 것'이라고 대답하면 이해를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지금 믿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들에게 '믿은 후에 할 일은 믿음이 자라는 것'이라고 말하면 '맞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분량을 의미하는데 믿음에 분량이라는 뜻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를 하게 된 것은, 믿음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믿는 자로 교회에 오지 말 것을 강조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는 자로 오게 되면 자기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이 없는 자로 교회로 오시고 믿음 없는 자로 성경을 볼 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라면 신자의 할 일이 '믿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믿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생각에는 착하게 살고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신자다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분명 세상 적으로 보면 좋은 생각입니다. 착하게 살아보겠다는 데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좋아하신다는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착하게 사는 것은 인간의 염원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인간에게 착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착함을 기대할 수 없는 인간에게 '착하게 사는 것'을 신자의 할 일, 즉 신자의 사명으로 주셨다면 그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착함을 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착함이지 인간에 대한 착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인간관계에서의 착함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윤리적 인간의 윤리적 생각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착함은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날마다 해야 할 신자의 일, 즉 사명입니다.

사명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명이란 목사 장로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가고 성가대에서 일하고 교사로 일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노래를 조금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은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달란트라고도 얘기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는 교회에서도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일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래를 잘 부르든 요리를 잘하든 손재주가 있든 그것은 재능이고 재주이지 사명은 아닙니다. 성가대는 단지 노래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노래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래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들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해야 할 일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은혜의 땅이라는 점도 잊지 말고 본문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안에서 사는 신자의 삶이라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는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처리법이 죽이는 것입니다. 5절에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고, 9절에도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라고 말하고, 10절에서도 '너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고, 14,15절에서도 죽이라, 진멸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사람은 은혜의 땅에서 살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1절에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라는 말씀을 보면 선지자, 꿈꾸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이고, 꿈꾸는 자는 신비한 체험과 경험을 계시로 내세우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을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죽어야 할 자입니까? 2절 말씀에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거짓 선지자와 꿈꾸는 자들은 이적과 기사를 내세우면서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이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유혹의 중점은 나를 위한 이적과 기사이고 나를 위한 신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신앙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사적인 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것이며 은혜의 땅에서 용납될 수 없는 악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이적과 기사에 약합니다. 눈으로 직접 신기한 일을 목격했을 때 그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버립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거짓 신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적과 기사를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신기한 이적과 기사에 마음을 두고 있을 때 결국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신기한 이적과 기사로 나타나서 꾀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들이 기도원에 가서 신기한 체험을 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고 방언을 하게 되고 병고침을 받았다고 하니까 자신도 기도원에 가서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바로 다른 신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체험, 개인적인 문제 등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라고 하는 모래알보다 작은 문제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의 일이라고 하는 엄청난 큰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신은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욕심을 드러내게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땅에서 잘라져야 할 모습이기 때문에 신자를 꾀이는 다른 신을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문제 해결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다른 힘이 곧 꿈꾸는 자고 무당이고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분명히 신자들의 개인적인 문제에 하나님을 연관 시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개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볼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죽을병이 들었다가 기도원가서 나았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내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죽을병이 들었다가 나은 것에는 온 교회가 놀라고 신기해하고 평생을 잊어버리지 않을 듯이 자랑하고 떠들고 간증하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죽을 죄인이 살아나고, 멸망의 자리에 있던 자가 생명의 자리로 옮김 바가 되고, 심판 속에서 건짐 받게 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놀라워하지도 낳고 신기해하지도 않고 시큰둥하게만 여겨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결국 다른 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보다는 내 문제가 더 관심거리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자를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5절에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속량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노력과 자기 힘으로 사는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땅으로 옮긴바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까지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하는 염원이 잔재해 있습니다. 그런 염원을 부추기고 다시금 자기 노력으로 살도록 꾀이는 존재가 거짓선지자이고 꿈꾸는 자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신은 다른 신, 즉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내 문제를 위해서 내 스스로 노력하고 힘쓰고자 하는 애굽 방식에 더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할 일은 날마다 다른 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이러한 할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돌아가는 신자가 많습니다. 신자로서 할 일은 주일에 교회 와주는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은 내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채 내 즐거움과 내 개인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현 신자들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껍데기만 신자 모양을 하고 내용은 세상사람과 동일한 사명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명 있는 신자로 살아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날마다 다른 신을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다른 신을 섬기도록 꾀이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사는 것입니다. 설령 형제요 자녀요 아내요 친구라고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다른 신입니다. 6절에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라고 말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8,9절)라고 합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할지라도 애석히 여기지 말고 죽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단호한 말씀입니다.

다른 신은 신자를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 개인 문제를 위해 살도록 꾀입니다.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인간에게 돌아가도록 합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잘라버리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정신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할 일이 뭐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만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다른 것이 은혜를 가장해서 접근할 때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다른 신은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 사업에, 심지어 내 자신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항상 자기 개인 문제, 즉 자신이 잘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아도 개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찾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은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개인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을 죽여야 하고 부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5절에 끝에 보면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은 무엇입니까? 악은 절에 가고 부처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개인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자기 의 이익을 위한 믿음으로, 봉사도 자기 이익을 위한 봉사로,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와 연관짓는 것을 악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애굽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주식을 샀는데 주식 값이 올라서 돈을 벌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을 자기 개인을 돕는 분으로 연결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애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주식이 올랐을 때 하나님은 주식 값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시는 분임을 바라본다면 주식 값이 올라서 돈을 벌든 내려서 손해를 보든 여전히 그 마음속에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신자가 이런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기 포부와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국 다른 신으로 빠지는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내 힘으로 살아보려는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은혜로는 부족하다 더 달라'고 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 포부와 욕망을 옹호하는 다른 신의 접근을 쉽게 용납하며 다른 신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알고 감사하며 삽시다'라는 말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린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시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라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용납하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9절에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고 합니다. 죽일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나도 너와 똑같이 죽을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죽임을 당한 자를 나와 같은 자로 인정함으로서 나도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악한 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신은 내 손으로 부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신이나 나나 한통속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수된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이 교회를 찾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당당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항상 다른 신의 꾀임을 용납하면서 자기 개인의 문제에 빠져 살아갑니다. 다른 신은 내 안에 있음을 알고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마음에 자리할 때 오직 그 은혜만 높이고자 힘쓰십시오. 내 개인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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