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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성민 (신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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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국가는 인간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뭔가 특이성을 지닌 채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탄생의 배경에는 애굽의 심판이 있습니다. 애굽을 치시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의 심판 없이도 얼마든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미리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400년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시고 애굽의 심판을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로 출발하게 하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신 애굽을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를 건설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 참된 생명을 계시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계획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을 보여주는 삶인가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피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감으로서 살아난 사람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피를 경험한 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죽음의 심판 속에서 피를 경험함으로서 살아나는 체험을 하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할 일은 어린양의 피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피를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애당초의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고 400년간 고생하게 하시고 심판을 경험하고 피를 경험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뭔가를 담아서 보여줘야 하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담아야 할 내용들을 미리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과 같이 전도하면서 여기저기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다만 심판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체험을 그대로 몸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신 것은 애굽이라는 국가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애굽의 사고방식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애굽의 사고방식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지시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지시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약속이란, 한 자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에 의해서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흠없는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이 애굽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감으로 함께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을 보여야 했고, 약속을 간직한 삶은 어린양의 피를 의지함으로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신자의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로 부르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릇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담아서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그릇입니다.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신약에 와서는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인간들의 기준이나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되고 구약에서 무엇이 참 이스라엘이었던가를 밝히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애굽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피에 있었던 것만큼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의 구분은 역시 피 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형적인 모습이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담고 있어야 할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늘 십자가를 담고 십자가를 드러내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시켰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과 신자를 구별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를 그냥 '신자' '자녀'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녀' '여호와의 성민' '자기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여호와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은 자가 여호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닫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너무 무디어져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낡고 퇴색되어진 은혜요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더럽고 악한 우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수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진 그런 상태로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무디어져 갑니까? 그 이유는 자신을 선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나는 신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못박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백성으로 삼으신 은혜가 반복될수록 은혜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못박고 하나님께 나오시면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될 자격이나 있습니까? 한 주간의 삶속에서 자녀 됨을 과연 얼마나 보여주며 삽니까? 그런 우리가 어떻게 떳떳하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우린 항상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올 때,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과 은혜로서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닌 자로 나왔다가 자녀가 되어 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 아닌 자가 자녀된 그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 있었던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증명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선물 받을 자로 택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믿음을 이해한 신자는 '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역시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길 때 내가 여호와의 자녀 되고 거룩한 백성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복을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보다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이기 때문에 변함없이 교회로 부르셔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인할 때 그 사랑은 어제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 깨달은 새로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된 채 '나는 자녀다'라는 생각 아래 맹목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돌아가 버린다면 그속에서 새로움이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자녀 됨에 대한 은혜와 사랑이 무디어지고 상실된 신자아닌 신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녀답게 산다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면 분명히 자녀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입니다. 애굽의 심판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행한 심판이었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적 사고방식과 대치된 관계에서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산다는 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거꾸로 살고 세상의 상식과 반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녀의 삶을 자녀 됨에 대한 사랑과 은혜와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 과연 그들이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성민으로 구별되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는 것이나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미는 것은 모두 가나안 민족의 풍습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 풍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산 사람이 뭔가 하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만의 풍습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들은 살을 베지 않고 눈썹 사이의 털은 밀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다거나, 묘를 잘 쓰기 위해서 터를 보는 것이나, 귀신을 달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는 것들이 다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사람이 굳이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그 이유는 죽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있는 자신들의 일이 잘되기를 원해서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헛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은 귀신의 도움을 받으려고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지 말고 털을 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금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인생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 되이 사는 것은 세상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고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마음이 채워지기보다는 헛된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신자아닌 신자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흘리신 사랑으로 내 손잡고 가실 때 그 사랑에 끌려가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세상은 헛되다, 이 땅의 마지막은 죽음 뿐이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평안이고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날마다 먹는 음식에까지 성민의 모습을 담아 놓는 조치를 하십니다. 3-21절까지 보면 음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네발 달린 짐승 중에 새김질 못하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김질 못하는 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이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구별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중에는 비늘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땅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성도에게 있어야 할 구별의 모습을 가리는 것입니다. 새중에서는 땅에 있는 죽은 시체를 즐겨 먹는 새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의 더러운 것을 취한다면 그것은 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곤충 중에서도 땅으로부터 뛰어 오르지 못하는 것은 먹지 말도록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구별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먹으라고 하신 것은 이것과 반대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땅에서 살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살 사람이다. 땅의 것이 힘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우리 힘이다'는 것을 항상 새기면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의 구별된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교회에서만 보지 말고 날마다 집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집에서도 말씀을 대함으로서 '나는 하늘에서 살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에 게으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든 생활 속에서 '나는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성민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는 삶에 모든 힘을 기울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으로 산다면 나에게 돈이 없어도 괜찮고 남이 무시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분이 우리를 '너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힘든 일을 당한다고 해도 굳건하게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말씀을 통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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