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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일조 (신 14: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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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떠벌리는 것들을 보면 그 순서가 뒤바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욕심을 앞세우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자기 일에 끌어 모아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설령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자기 일이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주님의 정신에 대한 순종을 배우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아무리 선한 일을 한들 그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말썽을 부리고, 봉사를 많이 한 사람들이 그 헌신을 자기 공적처럼 내세우는 이유도 결국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가 이 도리를 가르치는데 게을리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들의 열심을 자극해서 헌신과 봉사를 하게 함으로서 교회를 빨리 부흥시켜야 한다는데만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행위만 강조했지 마음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행위가 있으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강조했고, 아무리 마음이 있다해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틀린 것이고 신앙이 아닌 것으로 질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했지만 교인들의 심성은 참으로 심각할 정도로 강퍅해 졌습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이 본질을 뒤바꾸고 말았습니다. 마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신자를 부르신 것처럼 교회가 교인들을 일의 종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일을 많이 할수록 큰 일군으로 칭찬 받는 현실 속에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워 간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버렸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교회의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위한 신자로 나오는 것을 염려했고, 시켜서 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을 기르는데는 미흡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고 스스로 원해서 하고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어서 하는 일들이 되어져야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5: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독단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하는 일을 보고 일하셨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예수님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일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곧 아버지의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일하신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10:30)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교회는 이 순서를 무시해 버린 채 제멋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또 해보겠다고 날뛰고 있는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한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붙드시고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신다면 결국 우리도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일조'에 대한 규례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 드리기 앞서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 것은 십일조, 즉 우리가 생각하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종교단체이든 그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돈'이 필요합니다. 돈없이 유지되는 단체는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어떤 명목으로든 돈을 거두게 되고, 그 돈으로 자기 단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돈많은 단체가 강하고 힘있는 단체로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에는 '거룩'의 의미를 붙입니다. 신에게 돈을 바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는 거룩한 헌물이며 신은 그 헌물을 바치는 자를 기억하여 복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신에 대한 헌신을 돈으로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돈을 바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돈을 바치는 것이 헌신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의 십일조는 돈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고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배우셔서 과연 나 자신이 십일조의 정신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성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존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별이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인데, 독특한 사고방식이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주신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과 전혀 다른 세계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 두 나라는 사고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애굽적 방식은 버리고 새로운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나라의 삶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가 '십일조'인 것입니다. 결국 십일조에는 새로운 세계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지 돈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느냐?'는 고민은 아직까지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매어있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럼 십일조를 하지 말란 말이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이러한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사들이나 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들로서는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야기를 했을 때 두려운 것은 당연히 교회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돈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또한 신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큰 신앙으로 여기고 하나님도 역시 그러한 자기를 어여삐 봐주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반발을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하나님께는 관심 없고 자기에게만 관심 있었다는 것을 '십일조를 하지 말란 말이냐?'는 말로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란 없습니다'라는 말을 흐뭇하게 여기는 것도 그 속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평소에 돈이 아까워서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껄끄러웠는데 '십일조란 없다'라는 목사의 말이 마음의 부담을 해소시켜주는 것 때문에 그 말을 반가이 여기고 흐뭇해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게 매어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는 '과연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란 무엇인가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십일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십일조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 되기를 원하셨느냐는 질문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라는 규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십일조란 무엇이냐?'를 배워가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함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고 인간을 위해서 일이 있듯이 인간을 위해서 십일조의 규례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우선 십일조는 내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십일조란 바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하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하십니다. 결국 십일조의 규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바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권속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배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쳤느냐? 얼마나 바쳤느냐? 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24-26절에 보면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너무 멀어서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 돈으로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사서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십일조를 바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로 모여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2절에 보면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우린 보통 십일조를 내면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친 것으로 신자로서 해야 할 감사와 의무는 다 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돈에 대한 권리를 자신이 차지합니다. 즉 십일조를 십분의 구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규례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토지 소산의 십분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너희들을 은혜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이 소산물을 얻게 된 것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소산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서로 나누고 기뻐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즐거움은 단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기뻐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삼는 것은 삶과 소득을 구별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란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리고 일이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 전체가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소득이란 삶에서 주어진 자그마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속에 소득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결코 삶과 소득을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란 소득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겨난 삶입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의미로 말하자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 전체가 주님의 희생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 다니고 학교 다니고 가정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동일합니다. 믿은 후에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를 가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되는 그런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된 자의 처음 열심이고 열성이지 믿음의 삶이란 그런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 인생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지금까지 내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자신을 주님의 세계로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든 못다니든, 돈이 많든 적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그 모든 것은 은혜의 세계안에서 주어지는 조그만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직장을 못다녀도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공부를 못해도 역시 은혜 안에 있으며, 돈이 없어도 은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십일조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로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모두가 같은 신세였습니다.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덕분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는 처음 신분 그대로입니다. 강자 약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자 약자가 구분되어서 약자가 제외되고 따돌림당하는 것은 이미 은혜의 세계가 깨뜨려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27절에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없는 자라고 저버리지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복안에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나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복안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할 때 그것이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이런 마음으로 자원해서 기쁨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내가 지금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에 헌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 없는 자기 수준을 보여 주는 솔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은혜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십일조라는 행위 하나 때문에 믿음 없음을 믿음 있음으로 착각해 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오히려 해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더불어 사는 인생이고 누군가가 살려주는 인생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면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곧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먹고 즐거워 할 수 있고, 우리 가운데 어렵고 힘든 자가 있을 때 그들과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가 다시 이스라엘로 주어져서 그것으로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된 상태에서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내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은석교회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하며 모입니까?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한다면 염려하고 불안하고 걱정하는 인생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하는 규례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현장이 되어야 하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현장입니다. 이런 마음이 29절과 같이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것으로 먹고사는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것이란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살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십일조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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