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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 (신 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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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 15:12-23)

교회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굳이 몸이라고 표현한 것은 개인이 아니면서도 조직이 아닌 이상한 관계가 곧 교회이며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아니면서도 조직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개인이 아니다'는 말은 교회에서는 '나'를 주장하거나 '나'가 중심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 개인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원 역시 나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교회의 구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개인을 거부하는 것은 조직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교회가 개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명백히 판단하면 이미 한국교회는 조직화된 교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은 철저하게 개인을 용납하지 않고 조직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하기를 요구합니다. 오직 조직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가 곧 개인입니다. 때문에 개인이 조직에 해로움을 끼칠 때 그 조직은 그 개인을 징벌하고 축출합니다. 따라서 개인은 철저하게 조직에 매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조직의 대다수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자기 주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조직 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직은 조직을 지키고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칙과 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규칙과 법에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누구든 조직이 제정한 법과 규칙을 위배할 때 조직의 이름으로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조직은 개인을 거부하기 때문에 개개인이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을 대표할 한 인물을 조직의 중심으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대표자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고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조직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간의 모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으로 발전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조직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조직화된 교회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조직화된 교회는 자연히 그 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는 목사 중심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의 사회적 위치와 능력에 따라 직분이라는 것을 부여받습니다. 말로는 봉사 직분이라고 하지만 은연중 직분의 구별이 발생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좀더 높은 지위, 좀 더 강한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과 싸움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개인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는 나를 주장해서도 안되고 누군가에게 매어서도 안되고 교회라는 조직을 위해서 살아서도 안되고 오직 몸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그 누구의 종도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에 매이지도 말고, 목사라는 한 인간에게 매이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로서 자유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면제'라는 규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말씀도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이름으로 주어질 때 우리로서는 뭔가 불만이 싹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을 깨뜨리는 이 특이한 나라를 하나님은 자기의 나라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싫든 좋든 그 나라 방식을 나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밀쳐냄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지향하고 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삶이 무엇이고, 저주를 받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 14:29절 마지막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약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자기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배부르게 하는 것이 복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또 15: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도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한 말씀을 보면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할 복된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자 역시 이 삶을 지향하고 살아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 나라의 삶의 방식과 천국을 지행하고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확실한 차이점을 발견하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종에 대한 규례입니다. 12절에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 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동족이 가난 때문에 종으로 팔린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 육 년을 섬기고 제 칠 년이 되면 자유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냥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14절에 보면 종에게 후히 줘서 내어 보내라고 합니다. 돈을 주고 종으로 살때에는 6년을 계약하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자기 것으로 산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되거든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포기하라고 할 때 순순히 순종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빚진 자를 면제하라는 말씀이나 종을 7년이 되거든 자유하게 하라는 말씀이나 똑같이 재산권의 포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왜 7년이 되거든 재산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셨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애굽으로부터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려먹었습니다. 힘으로 지배하고 압제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세상 힘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자유함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단지 행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힘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앞서 인간 조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사람들은 자유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조직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직을 무서워하고 조직에 지배를 받으면서 조직에서 밀려날 것이 두려워서 할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유인이 아닌 여전히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유자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7년이 되거든 모든 종을 자유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종을 산 주인으로 하여금 종을 자유하게 하심으로서 종으로 있던 사람이나 주인으로 있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유의 하나님이다. 우린 모두 종으로 있던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린 누가 누구를 지배할 수 없는 관계이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그 교회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로 모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성도가 자유자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목사에게도 매이지 않고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모든 성도가 동일한 자유자로 모일 때 비로소 그 교회는 은혜 안에 모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사람은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뛰어나고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난 목사라고 할지라도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사라는 직분, 장로라는 직분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며, 봉사나 헌금이라는 행위들이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하등에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들에 매이는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자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피 아닌 다른 것에 매이고 그것들의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짓밟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만 그리스도의 피를 내세우는 위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무엇에 매어 살아가는가가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 할 때 목사는 교인들에게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회의 눈치를 보고 총회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한몸 지키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사는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집단에 불과한 교단의 종입니까? 교단의 종으로서 교단에 충성하고 열심히 봉사하면 교단으로부터는 유능한 목사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는 용기는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창출되는 용기일 것입니다. 이런 용기 있는 신자가 진심으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 직분 하나 얻어보겠다고 목사 눈치를 보는 것이나, 나에게 복이 될까 해서 교회에 봉사하고 목사에게 잘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유자가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쌍두마차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결국 세상에서 죽지 않고 위대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자연히 나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 종속되고 그 지배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에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마시고 여러분의 자유로 행동하십시오. 목사가 싫어할까 봐서 못하고, 다른 교인들이 나를 믿음 없는 사람으로 볼까봐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은 결국 '나는 사람의 종이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여러분 마음껏 자유로 행동하되 그 자유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자의 신분까지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즉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이 목사 때문도 아니고 내 체면 때문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이 예배에 빠지고 나서 목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종을 자유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나, 면제년에 빚진 자의 빚을 면제해 줄 수 있다는 것은 돈에 매이지 않은 자에게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돈보다 더 큰 것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15절에 보면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였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9-23절의 말씀에서 이 대속을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린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 피흘림을 기억하면서 먹는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즉 날마다 대속의 큰 은혜를 기억하며 그 피로서 살아가는 신자는 이미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큰 것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돈에 매이거나 사람에 매이지 않고 자유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7년째에 종에게 자유함을 주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도 너와 동일하게 종으로 살던 자인데 여호와께서 나를 속하므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대속의 큰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큰 것을 얻은 자로서 그 부유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빚을 면제함으로 종을 자유하게 함으로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이러한 부유함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회에 매이지 않고 사람에 매이지 않고 누구의 종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만 살아가신다면 그 역시 대속의 부유함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크게 보이지 않고 세상 것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에 매이고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6,17절에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함으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인이 종을 자유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종이 주인의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동해서 영원토록 주인의 사랑에 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고자 할 때 주인은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었다는 표시로 송곳으로 귀를 뚫으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주인과 종의 사이는 돈이 개입된 주인과 종이 아니라 사랑이 개입된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맺어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종으로 자유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고자 하는 종을 받아줌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삼아서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는 자유자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종에서 자유자로 속하여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자는 사랑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자를 의지하는 것이지 뭔가에 매어서 억지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친구가 있어서 나오는 것입니까? 부모님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내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은 주님에게 매인 자가 아니라 사람에게 매이고 교회에 매인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시는 것은 주님을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뭔가 은석교회가 마음에 안들고 싫지만 이왕 다니던 교회니까 할 수 없이 계속 다닌다거나, 은석교회에서 집사 되었으니까 다닌다면 그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은혜 때문에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결국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은 억지가 될 수밖에 없고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고 해도 그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랑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봉사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은석교회에는 주님의 대속만 크게 보이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원하시는 분만 남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인 여러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매이지 말고 우리를 대속해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뭔가에 매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뭐든지 여러분 쪽에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나를 높이기 위한 자발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행동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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