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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 기 (신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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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기(신 16:1-8)

지난 시간에 자유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유자란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초월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자유자로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이란 우리들의 힘으로 초월하고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본질과 교통되고 있는 세상에 매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세상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다스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언제나 나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운명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주님을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리고 있음을 내 마음속에 분명히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 아래 세상과 동화되어서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에 자신도 맞추고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세상에 붙들려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해 보십시오. 과연 독자적인 행동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행동은 비록 스스로는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의 옳고 그름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되어지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때 그 동기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 아래 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남들은 다 보내는데 내 아이만 보내지 않을 때 뒤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아이들에게 왜 대학가기를 요구합니까? 아이가 공부에 취미가 있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대학에 가고자 한다면 부모로서 보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부모인 우리들은 다른 아이들이 다 가니까 보내려고 하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현 사회가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안해주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사람취급 받기 위해서 대학가고 대학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우리의 행동이란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하는 행동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을 모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인생은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 아래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주변 환경과 사회 구조, 그리고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고 남들이 안하니까 나도 안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TV 드라마나 여러 프로그램을 봐도 자기 것이 상실된 채 모두가 모방된 것 투성이입니다. 저것이 인기가 있다 싶으면 금방 그것을 모방해서 방송합니다. 자기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 역시 자유함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모방된 삶에 붙들려 행동되어질 때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별점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모방함으로서 신자의 독특성, 교회의 구별성이 사라진 채 세상과 하나되어진 모습만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독특성 구별성이 사라진 채 다만 남의 것을 모방하기에만 바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어느 교회가 이런 것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늘었다더라는 것에 더 관심을 둡니다. 물론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데 무슨 잘못이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나에게 득이 되고 교회에 득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인들이 좋아하고 교회의 인기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효과가 있는 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교회 성장에 하등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될 수 없으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방이라는 시각 속에서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16장에서 말하고 있는 소위 절기라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지금 은석교회는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절 등 어떤 절기를 지킨다는 개념 없이 모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가 다 하고 있는 것을 안한다는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뭔가 허전한 느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안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일어났을 때 과연 그 불만이 무엇을 바탕으로 해서 발생하고 있느냐를 분석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적인 이유 속에서 싹튼 불만이라면 언제든지 저에게 그 불만을 얘기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만 개인적인 종교적 재미가 충족되지 못하는데 따른 불만이거나 한국교회라는 단체가 행하고 있는 것을 거부하는데 따른 불만이라면, 저는 그 불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단지 인간의 종교적 열망의 불충족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절기를 지키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절기가 어떤 정신을 담고서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헌금을 거둬들이고 종교적 재미를 위한 행사에 치중한 절기라면 신앙에 아무 득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 성경의 모든 절기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신자에게는 매일이 맥추절이고 추수절이고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교회가 다 하는데 우리도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저는 그것을 자기 것이 없는 모방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다른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그것이 은석교회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교회가 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를 따라가는 것이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고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것을 모방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십시오. 성령의 자유함에서 나오는 기쁨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남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하는 충동적인 것이 될 때는 도중 포기와 후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기쁨에 의해서가 아닌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충동에서 헌금을 약속했을 때 결국 후회함 속에서 사도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과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옳은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라면 다른 눈치를 보지 마시고 그대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그 행동을 비난하고 욕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셨으면 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안하고에 우리의 운명이 걸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방이 아닌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현 교회들의 절기에 대한 태도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기 폐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절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릴 뿐입니다. 절기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았을 때 절기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인식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6장에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불리우는 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이 나옵니다. 이 세 절기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정신이 계속 이어지는 절기이기 때문에 유월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절에 보면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이라는 것은 유월절의 주인은 여호와다는 뜻입니다. 즉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어떤 여호와를 보여줍니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기 위해서 희생하신 여호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서 자신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희생하신 여호와를 기억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유월절에 먹어야 했던 떡은 고난의 떡이었습니다. 3절에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 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유교병이란 누룩을 넣어서 만든 맛있는 떡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밀가루만으로 만들었기 딱딱하고 맛없는 떡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고난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떡을 먹으라는 것은 무교병은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의미를 담고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진 떡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무교병을 먹었다고 해서 그 자체가 고난이 아니라 무교병을 먹음으로서 자신들이 약속의 땅이라는 복안에 살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주어졌음을 잊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키라 하고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세부적으로 지켜야 할 규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의 기간 동안에는 사경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첫날 해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는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유월절 제사는 반드시 자신들의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하고(5,6절), 제사 드리는 시간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6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아침으로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7절). 그리고 육 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 일에는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말아야 하는 것이(8절) 이스라엘의 유월절입니다.

이러한 유월절의 규례를 보면 아주 복잡한 듯 보이고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의식과 방법으로 제시되어 있는 듯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들이 지켜지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담겨서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이 알고 그 마음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삼을 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한가지 마음입니다. 즉 유월절을 지키는 규례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마음이 규례 하나하나에 담겨져 반복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돌아서 버리지만, 그러나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하나님 편에서 어떤 수고와 힘씀과 고난과 희생이 뒤따라야 했는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월절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구원받고 약속의 땅에 오기까지 하나님 편에서 어떤 수고와 고난과 희생이 있어야 했던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유월절이며 유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세부적인 규례들은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수고와 고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복안에 살고 있다면 복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다만 복을 누리는 것에 치우쳐 버리는 것으로 그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이 주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어야 했던가를 앎으로서 이스라엘 자신도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의 형편은 앞일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가운데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고 느긋하게 애굽인의 환영을 받으면서도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3절의 말씀대로 급속히 나왔습니다. 그것도 밤에 나왔던 것입니다. 애굽인이 제발 빨리 나가달라고 재촉하는 가운데 평소 같으면 잠잘 시간에 급하게 빠져나온 것입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발교되지 못한 떡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고 고기는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고 제사는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런 의식 하나하나를 통해서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때를 다시금 상기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뭉그적거리고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빨리 빠져나와야 하는 사람들이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무교병을 먹는 것이나 고기를 아침까지 두지 않는 것이나 제사를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는 이 모두가 '이스라엘 자신들이 어디에서부터 빠져나온 특이한 종족들이며, 그들의 행동과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는 인생이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 기대를 걸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심히만 하면 뭔가 될 것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지 못한 모방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일년에 한차례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급속하게 빠져나오게 하신 그 마음과 똑같아야 했습니다. 그 마음이 곧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마음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은 악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고난의 떡을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칠칠절, 즉 맥추절이고 초막절 즉 추수절이라면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 감사하자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칠칠절의 규례를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10,11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초막절 역시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말씀합니다. 이 규례들은 단지 주어진 소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들고 나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복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가를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네 힘과 네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과 수고를 통해서 주어지는 복임을 잊지 말라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하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는 제사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바로 이 자리에 복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즉 복이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든 소출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내가 수고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정신으로 드리는 칠칠절이고 초막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게 된 이것이 주님의 희생과 수고 덕분으로 주어진 복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칠칠절이고 초막절입니다. 즉 맥추절이고 추수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좋은 것이 주어졌다고 해서 감사하는 것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주어졌을 때 감사하는 것은 시키지 않아도 잘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절기란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영원한 복안에 거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라는 것인데 지금 절기는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잘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인간의 절기로 전락돼 버린 것입니다. 이런 절기를 남들이 한다고 해서 우리도 해야 하겠습니까? 절기를 지키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한 교회 아니냐, 혹 이단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매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매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난의 떡을 먹는 유월절 정신은 '나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희생과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모든 힘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수고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기 때문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정신 가운데서 드려지는 칠칠절과 초막절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소산물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찾아갈 때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즉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이 있는 그 자리더라는 것을 깨닫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의 출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에 있음을 잊지 않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날마다 감사함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에 눈 돌리지 아니할 때 그것이 이미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날짜를 정해서 절기를 지키고 헌금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 덕분에 살고 있는 자신을 잊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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