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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 (신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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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신 17:14-20)

하나님은 깨끗한 것, 완전한 것만 원하십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것은 거부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흠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죄를 씻어주는 기능을 가지신 분을 두신 것입니다. 죄를 씻어주는 기능을 가진 분을 죄인인 우리들에게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때문에 인간은 죄를 씻어주는 분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깨끗한척하고 신자인 척하는 인위적인 행동이나 방법을 통해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선포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한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를 하기에 바쁘고 거룩한 척하고 깨끗한척하는 이중성만 잔뜩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했던 선한 행동들이 머리 속에 맴돌고 있기 때문에 죄는 발각 당하지 않고 자기 행위 속에 깊숙이 감춰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돋보이고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평상시 살아갈 때 선한 행동을 하고 자신을 신자답게 만들려고 애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과 비교해서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추고 위장하려고 하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며 사는 것이 살아 계신 주님을 의지하는 신자의 믿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마음이 타인에게 발각 당하다 것을 두려워합니다. 속에는 가시를 품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친절히 대하는 것도 결국에 자신의 악한 마음이 발각 당하다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경받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그 조건 가운데 하나가 악한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선한 것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선이고 위장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인간관계란 서로서로가 이런 위장과 위선에 속고 속이는 관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상대방의 악함이 발각되었을 때 '속았다'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의 악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고백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자신의 악함이 발각 당하다 것을 두려워합니까? 남들이 나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알아채는 것을 왜 싫어합니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아직까지 자신이 포기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삽니다. 그래서 체면, 위신, 명예 등에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가꾸어 보려는 욕망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악함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의 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원하고 순종이 아닌 지배욕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왕이란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권력이든 돈이든 힘이 될만한 것을 소유하고 있어야 그 힘을 무기 삼아서 약자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이런 욕망이 있습니다. 사극에서 왕이 등장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세상의 모든 일이 왕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왕이었으면'하는 환상을 품게 됩니다. 내가 왕만 된다면 뭐든지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것도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왕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누군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혹 순종한다고 해도 순종함으로서 주어질 이익 때문에 순종하는 척할 뿐입니다. 결국 굴욕감 속에 순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이란 주어질 이익에 대한 기대도 없이, 억지가 아닌 자발적으로, 굴욕감이 아니라 기쁨의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인간이 누구에게 이런 순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순종이 아닌 소유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는 순종이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께 나왔을 때 자기의 본성대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어떤 믿음이 보여지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하는 잘못된 믿음만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말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하나님 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편 주기만을 고대합니다. 이것이 자기의 소유욕을 버리지 못한 인간의 악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삶을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짓기 전의 단계입니다. 이때 인간은 악을 모르고 선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구제를 했습니까? 십일조를 했습니까? 아니면 착한 일을 했습니까? 아담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살았을 뿐입니다. 결국 선은 행동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며 크든 작든 많든 적든 관계없이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상태는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는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악을 행한 자로서 악에게 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인간의 상태입니다.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속에서의 본성이 착함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득을 따라 살도록 붙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마음은 착함과 선함을 따라 살고 싶은데 현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핑계를 댑니다. 결국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앎과 행동을 달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미 악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삶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간 에녹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에녹은 우리에게 죽음에 처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세상과는 결별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은 심판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에녹은 장차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판을 알았기 때문에 경건치 않음을 좇아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단계에서 살아갑니까? 첫 번째 단계는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두 번째 단계로 사느냐 아니면 세 번째 단계로 사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즉 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살고 있습니까? 라는 물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왕을 세울 때 지켜야 할 법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왕이라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땅에도 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왕은 모든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는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대신 왕의 책임은 나라를 부강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만 부강되고 경제가 발전해서 잘살게만 된다면 국민은 그것으로 대만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왕을 원합니까? 자기들을 잘살게 해줄 왕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민중들이 원하는 대통령은 잘살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해도 나 배부르게 해주고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것으로 최고의 대통령인 것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행 사건으로 떠들썩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클린턴 대통령의 인기는 별로 하락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선거때 조그만 도덕적 흠만 드러나도 인기가 떨어지고 스스로 후보를 사퇴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비서를 성추행 했다는 사건 속에서도 인기가 변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경제가 많이 부흥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를 잘살게 해주는 대통령이라면 도덕적인 흠도 얼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기 소유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과연 어떤 왕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나라 당의 총재가 된 이회창 씨는 도덕성을 자신의 무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자신이 배고프고 어렵게 되면 도덕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하게 정치를 한다고 해도 민중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면 그는 비판을 받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왕을 통해서 자신의 소유를 더욱 확고하게 하고 늘려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시겠다고 하는 왕은 전혀 다른 모습의 왕입니다. 먼저 15절에 보면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 이방 나라같이 왕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거든 너희들 마음대로 왕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에만 순종하며 살면 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이방나라를 바라보고 그들처럼 왕을 세워서 우리도 잘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나갈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왕을 세우려면 이렇게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을 세우되 끝까지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원한다면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를 우두머리로 세워서 자기들도 이방 나라처럼 잘살아보자는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왕을 원하겠습니까? 소위 지도력 있고,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왕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를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왕이 되어야만 이스라엘이 끝까지 선민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굳이 왕을 세워서 그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겠다면 내 마음을 잘 알고 내 뜻을 너희에게 잘 전할 수 있는 그런 자를 세워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왕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잘 이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왕을 하나님이 세우셨을 때 그 왕을 환영할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에서 잘살고 땅의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환영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장차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로 구분되게 됩니다. 그 왕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세상에 오신 왕을 환영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참 백성이고, 밀쳐내는 자는 백성이 아닌 것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6,17절을 보면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왕은 세상에 대해서는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힘이고 국력입니다. 국력이 없으면 나라를 지탱하고 보호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말을 많이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힘은 여호와이고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왕이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도 세상의 쾌락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위해서 은금을 많이 쌓아두지 말라고 하는 것도 돈을 힘으로 삼고 돈으로 살아가는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런 왕으로 인해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잘못될 때 이스라엘 전체는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왕 한사람이 잘함으로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왕 한사람이 잘못함으로서 이스라엘 전체가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에 세움 받을 왕은 참으로 특이한 왕입니다. 세상 왕과 전혀 반대입니다. 세상 왕은 자기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힘을 기릅니다. 그것이 군사력이고 군사력은 말을 많이 가짐으로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있어야 발전될 수 있고 경제가 발전한 나라의 왕이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서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도 세상 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한 왕입니다. 세상 나라의 왕은 인간의 능력과 힘에 의해서 국가의 유지되고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된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 자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왕의 자격이 있습니다. 나라를 부강시키는데에는 관심 없고 오직 백성들의 죄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의 길로 가지 않도록 그 앞에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것은 포기하고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18,19절에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 요소, 즉 세상 것은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율법책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안된다는 믿음만 고집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은 그 왕을 보고 왕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만 따르는 민족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이 세상 것을 포기하고 국가의 부강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에만 관심 두고 사는 왕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으로 결국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임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속에 세상 것이 포기되지 않고 왕을 통해서 잘살아보고 싶은 욕망으로 산다면 세상 것을 포기한 왕은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어떤 왕을 원하느냐가 지금 이스라엘이 무엇을 바라고 사느냐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왕을 원하십니까?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참된 왕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세상 것을 포기한 채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에 배척했습니다. 왕다운 강한 힘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당신 같은 왕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교회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난무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 왕에게만 순종하고 따르는 참된 예수님의 백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 것을 포기하고 오신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세상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선행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려고 하고, 거대한 건물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려고 합니다.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고 왕을 따르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강한 힘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존경받을만한 조건이 전혀 없습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왕이라고 내세울만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바로 이러한 분이고, 우리가 왕이라고 따르는 분이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인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우리들의 죄에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왕으로 영접하고 따르는 그분의 백성이라면 어떤 길을 가야 마땅하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왕과 함께 세상 것을 포기하는 길로 나가야 하고, 힘을 포기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 부흥이나 내가 잘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 두지 않은 채 오직 내 죄를 위해서 오신 나의 왕되신 주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는 예수님으로만 삽니다'라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우리의 왕이신 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왕은 세상 것은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왕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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