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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지자 (신 18: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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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잃어버린 에덴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에덴은 곧 낙원이며 낙원은 평화와 안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잃어버린 평화와 안정을 찾아서 한평생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평화와 안정이 외부적인 요인들에 인해서 방해를 받거나 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혼자서 가만히 누워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홀로 가만히 누워있다고 해도 인간의 상상과 환상은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상상과 환상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그 순간 이미 평화와 안정을 잃어버리고 불안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상상 속에 만들어진 미래의 불행에 대해서 염려하게 되고, 그 해결책으로 신의 힘을 빌리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간이나 신의 힘을 빌어서 미래에 일어날 불행에 대해서 미리 간파하고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함으로 불행은 모두 피해 가고 행복만 고스란히 취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이 욕망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 바로 무당, 복술자, 점치는 자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죄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그렇구나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었구나'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자기 사랑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무당일 수밖에 없고, 복술자고 점치는 하나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흠도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 하는가는 이미 말씀 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스스로 신을 찾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신을 찾기에 효과가 있고 또 신이 좋아할 만한 방법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법적화 함으로서 또 하나의 성경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에서 소위 헌법이라고 말하는 예배 모범이 아닙니까? 신자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서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인간이라면 자기 것을 다 버려둔 채 오직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에서 말씀하지도 않은 것을 인간이 제멋대로 상상해서 예배 모범이라 이름하고 법적화해서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장로교 예배모범이라는 법의 이름으로 이단운운 한다면 그것을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방법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존재는 사단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사단이 배후에서 인간의 방법을 옹호하고 거들어 주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들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방법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철저하게 인간의 방법을 죽이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인간의 법을 죽여야 하고 인간의 교리를 죽여야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교리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방법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장로교의 헌법이고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인정한 교리라고 해서 그것을 성경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지 교리나 헌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성경을 먼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법과 교리를 먼저로 한 결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들도 제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적이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교리를 지키는 단체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단체입니다. 교리를 지키는 단체는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에 급급한 인간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내던져 버리고 교리만 붙들고 있으면 기독교 되는 줄로 착각하는 종교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란 성경을 통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결코 교회 헌법이나 교리를 통해서 발견되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갈등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박탈해 버린 채 교회에서 제공하는 정답만을 받아들이고 그 정답만 따라오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성경은 알고 행동은 있지만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실천적 무신론자'들만 양산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교리를 인정하고 교회 법에 순종하면 신실한 신자로 인정해 주는 것은, 신자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라는 자기 단체에 귀속된 충성된 신하로 묶어두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한 신자가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을 위한 신자로 전락시켜 버리고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가는 저주받을 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은 도외시한 채 인간의 방법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은 광범위한데 인간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라고 반박합니다. 이러한 반박이 바로 평소에 성경에 대해서 포기한 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통해서 나타납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말씀 하나하나가, 사건 하나하나들이, 인물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서 등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는 반문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무당, 복술자, 점치는 자 등을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상상하고 연구한 방법을 가지고 신을 섬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가 바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통해서입니다.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당시에는 모세가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모세 역시 완벽한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16절의 말씀과 출애굽기의 말씀을 연결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여호와께 선지자를 구했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출 20:18-19절에 보면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의 말씀을 들을 때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봅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면서 모세에게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아닌 다른 선지자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 더러 '당신이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청대로 지금모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일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종합해 보면 결국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설 선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7,18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자하는 선지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겠다고 합니다. 모세와 같다는 것은 모세가 하는 일,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세우시겠다는 것이고, 하나를 세우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참된 선지자는 오직 한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장차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고, 구약에 나타난 다른 선지자들 역시 장차 나타날 한분 선지자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요구한 것은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깨달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때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결코 대신 말씀을 전할 사람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중보자를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중보자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죽어야 할 인간임을 아는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중보자를 바라보고 진심으로 중보자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교인들을 다그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말씀은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함과 자기 사랑만 잔뜩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 아닌 말씀 속에서 과연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 과연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겠습니까? 주님만이 나를 살린다는 간절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가나안 민족과 같이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찾는 거짓된 신앙일 뿐입니다.

교회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민중들이 거부하고 반대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민중들이 말씀을 반대할 때는 말씀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까지 함께 반대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민중들로 거부 받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계까지 위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민중들이 거부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을 말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민중들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에 결국 다른 복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볼 때 어느 한사람도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전하여 준 말씀만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민중들의 반대를 받고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말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하나님의 뜻이 너무 광범위해서 그 뜻은 다 알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밖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법을 준수하고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기대를 거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에 어떤 다른 것을 추가하지 마십시오. 선교한다거나, 구제한다거나,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거나, 예배당을 짓는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인들을 끌어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교안하고 구제안하고 예배당 안짓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밖에 있다는 결론이 되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보자를 내세워서 대신 전하게 하는 것은 죄인된 인간이 말씀을 직접 듣게 되면 죽어야 하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말 그대로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란 어떤 것입니까? 과연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복을 빌어주고 위로나 해주고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말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선지자의 말에는 그런 말씀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을 외치고 평안을 외쳤던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복이나 평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하게 된 말씀은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대언할 말씀도 십계명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십계명의 정신을 완벽하게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신다고 할 때 그 선지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완성자로 오셨고,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말씀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말씀이라고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선지자로 계십니다. 예수님이 따로 다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벽하게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 1:1-2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은 아들로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며 또 다른 계시가 존재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죽어야 할 우리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말씀 앞에서도 죽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20절의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한다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말씀이나 계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서 일하거나 교단을 위해서 일하는 것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종교를 옹호하지도 않고 인간의 교단을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단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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