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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증한 행위 (신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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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과학과 문명 문화와 전혀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미개인'이라고 부릅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옷도 입지 않고 자동차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행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큰 나무 잎으로 대강 엮어서 만든 천막 같은 집에서 발전도 없이 다만 하루 먹고살기 위해서 짐승이나 사냥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소위 문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야만인, 미개인이라고 하면서 무시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극도의 원시인, 또는 미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오늘날의 인간을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미개인의 모습과 문명인의 모습에서는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차이점이라고 해봐야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다니며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고 지하철을 이용할 줄 아는 등의 과학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혜택을 입고 있을 뿐이지 과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워서 이용하는 것이지, 실제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어떤 원리로 어떤 부품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움직이는지 그 원리도 모르면서 다만 자동차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운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문명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자동차를 운전할 줄 모르면 미개인이 되는 것입니까?

인간을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과학을 기준으로 해서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까? 과학이 발달한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볼 때 한국은 미개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문명과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우월에서 등장한 낱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문명과 야만을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구분하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을 놓고 그 행동을 비교해 본다면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어온 일이지만 한국 사람이 보신탕을 즐기는 것 때문에 유럽 쪽의 나라들로부터 야만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를 한 식구처럼 여기는 그들의 문화적 시각에서 나온 판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럽 쪽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을 식용으로 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회적인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문화가 기준이 되어서 야만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소위 문명인과 야만인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본질적인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옛날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그 인간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문화를 배우고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워왔던 오늘날의 인간과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그 차이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배우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문화란 시대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오늘의 문명이 내일에는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컴퓨터를 처음 구입할 때는 소위 286이라고 불리는 기종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286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286 컴퓨터를 쓰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286은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기종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286만이 아니라 386, 486도 퇴보하고 이제는 586도 점점 퇴보해 가는 추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발달하는 과학은 어제의 문명을 오늘에는 야만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과 문화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면 결국 영원한 문명도 야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명과 야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과 문화가 전혀 없었던 몇 천년 전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오늘의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명은 쉬지 않고 발전하고 진화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혀 진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화된 것은 문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전혀 진화되지 않은 채 에덴동산에서의 죄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의 인간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로 인간 세계에서는 많은 윤리학자들과 도덕군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공자 맹자 장자 등 수많은 학자들이 등장해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혀 변화하거나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 인간의 죄의 모습과 오늘 우리들의 죄의 모습에서 전혀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과학의 혜택 속에서 문명인으로 산다고 해서 소위 미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동일합니다. 모두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로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9절)라고 말씀합니다. 본받지 말라는 가증한 행위란 앞서 말씀드린 그런 자들을 가까이 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지금은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하면서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고 점을 치는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무당을 물러서 굿도 하지 않고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점을 치지도 않았다'라고 해서 나 자신은 오늘 본문 앞에서는 깨끗한 인간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그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절에 보면 아들과 딸을 불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이방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성행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10절의 말과 오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식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식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십일조가 자식의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의 봉사가 자식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복술자란 점을 치면서 인간의 복을 예언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은 하지 말아라는 식으로 인간을 화를 피하고 복으로 유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화를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복술자와 똑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오늘날의 교회가 복술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는 대신 교회 와서 점쟁이를 찾고 있는 것에 자나지 않습니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날자와 시간을 따지면서 미래의 길흉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사할 때 소위 손없는 날을 택한 것이나 결혼 날짜를 따지는 것들을 말합니다.

요술하는 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을 뜻하고, 무당 역시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언자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계시를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계시 운운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접자란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귀신을 불러내어서 귀신으로부터 미래의 길흉을 미리 듣고 그것은 말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킵니다. 초혼자란 죽은 귀신의 영을 마음대로 초청할 수 있다는 사람입니다. 죽은 영을 불러내어서 그 힘으로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언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서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용납하지 말라는 말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 앞에서 쉽게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난 아니야'라는 당당한 마음으로 앉아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무당 등 이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들이 무엇이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화는 피하고 복은 끌어들이자는 속셈에서 복술자를 찾고 길흉을 말하는 자를 찾고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화와 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세상을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은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일이 잘 안될 때는 점치는 자를 찾아서 화에서 벗어나서 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물어보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인정하신다면 과연 그러한 본질적인 욕망이 교회에서 보여지지 않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교회란 인간의 욕망으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은혜로 사는 신자에게 화, 복의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라고 생각하는 좋지 않은 일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되면 복이고 못되면 저주라는 개념에서 살아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 붙들린 채 천국을 향해 끌려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만 복으로 알고 그 복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무당을 찾고 복술자를 찾고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식을 바치는 일들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세상의 복과 화의 기준을 그대로 끌어 들여서 복술자 점쟁이 무당 등과 똑같이 화를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푸닥거리를 서슴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부흥회, 안수기도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의 복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에게 복이 된다고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무당으로 복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과 연관시키지 마십시오. 안좋은 일이 있으면 '내가 주일을 안지켰더니' '십일조를 안했더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내가 잘하면 복을 주고 못하면 화를 내리는 분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일하십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해서 복을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가 행동을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겠네요'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그 질문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해보려고 했던 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발각 되버립니다.

제가 신자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하지도 못한 사람이 잘하려고 발버둥칠 때 그 사람은 제풀에 쓰러지고 맙니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십시오. 인간은 애당초 하나님 앞에서 잘할 존재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나는 잘했다'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더러운 자고 악한 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잘남을 보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서 작으면 작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미래의 길흉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무당이나 박수를 찾아서 그 힘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얻고 싶은 마음을 갖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못가지고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남들보다 못가졌다면 못가진 속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면 되는 것이고, 많이 가졌다고 해도 교만하지 않고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믿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욥기서에서 사단이 하나님에게 욥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세상적인 많은 것을 줬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이 그런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 사단에게 욥을 치도록 허락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것은 세상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보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세상 것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그 자가 진실된 하나님의 신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신자에게는 세상 것을 가지고 못가지고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화와 복에 대해서 이미 초월해 버렸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물리치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복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하라는 세상의 말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지 무당을 찾지 말고 복술자를 가까이 하지 말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란 인간의 힘으로 화와 복을 조절해 보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무당을 찾고 점을 치고 궁합을 보고 결혼이나 이사를 할 때 날자와 시간을 따지는 것입니까? 인위적으로 화를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것은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법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은 철저하게 은혜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땅이기 때문에 그 은혜의 땅에서 가증한 것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당 복술자 등의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미개인이든 문명인이든 인간이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행복과 자기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채 살아가는 인간의 죄가 아담의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서 내려지는 결론입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세상을 희망적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심판의 장소이고 망할 장소로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지 않습니다. 노력만 하면 자기의 꿈을 키울 수가 있고 자기 소원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장소로 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한 인간이 자신에게는 자기의 꿈을 이룰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뭔가 조언을 얻고 힘을 얻기 위해서 무당을 찾고 점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그 행위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포기 없이 희망을 가지고 교회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세상일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예배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1-8절까지 말씀하고 있는 '레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레위인은 특별한 족속입니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세상 기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족속들입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생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족속이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일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을 가지고 먹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관심 속에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다면 자연히 레위인도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삶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도구로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레위인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으로 바로 산다면 레위인 되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고, 신앙으로 바로 살지 못한다면 자연히 예수님께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 당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추구하는 것은 복이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 없이 복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무당 집단이 되고 말 것이 자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헛됩니다. 헛된 세상에서 헛된 것을 붙들기 위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고 헛되지 않은 예수님만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 때 헛되지 않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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