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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피성 (신 1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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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세력 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인간의 몸속에서 암덩어리가 확장되어서 온 몸을 점령해 버리는 것 같이, 이 세상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차근차근 점령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마을, 농촌 구석까지 십자가가 세워진 예배당을 세움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겠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소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대의 임무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두고 생각할 때마다 저의 머리에 맴도는 것은 '현대 교회는 성경을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을 말한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실려 있는 말씀 그대로의 성경이 아니라 온통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말'일 뿐입니다. 천국이나 부활 등은 교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소원이며 관심입니까? 목사가 교회를 찾아온 교인에게 '예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관심인 사람은 이 교회에서 나가주세요'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듣기에는 아주 귀에 거슬리는 말이고 '목사로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서 많은 안타까움을 가집니다. 듣기에는 극단적인 말이 될 수 있는 이런 말까지 해서라도 교회가 무엇이며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소위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며,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피흘리시며 죽으신 주님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신자로서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적인 일들이 마치 주님의 뜻인 양 오해된 채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탐욕 속에서 벌어지는 종교적인 일들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도 모두가 인간의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세력 확장이란 인간의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보면서 더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내 교회를 확장시키고자하는 탐욕이고, 내 교단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탐욕이며 나아가서는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 탐욕인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착각으로 빠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세력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인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단체의 세력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피아의 대부입니까? 예수님이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입니까? 마피아나 폭력조직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조직과 죽고 죽이는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식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고 교회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 확장'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교회가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확장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장이란 세력이 넓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하나 찾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결코 인간에게 맡겨진 사명도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린 단지 주님께 부름을 입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며 주님의 마음에 복종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신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되어지는 것,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저는 은석교회가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자가 늘어가기를 원하는 것이지 결코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도 아니고 주님의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주님을 따르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마음이 퍼져있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되고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과연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장차 선지자 하나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장차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 그분이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앞으로 그분에 의해서 인도함 받을 이스라엘이 지향하고 나타내야 할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모습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선지자에 의해서 인도함 받는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다'라는 것을 여러 정황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도피성'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됨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오늘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은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 마련한 하나의 제도가 아닙니다.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도피성'을 통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며, 신자가 모이는 그 모임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우연히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 때문에 사형을 당하면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없게 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면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 실수로 살인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당연합니다.

본문에서도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예를 말합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빠져서 옆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도록 하시고, 또 다시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 안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있게 하셔서 그 사람을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뭔가를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단체를 결성할 때면 필연코 등장하는 것은 법과 규칙입니다. 법과 규칙은 단체 보호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체를 보호함으로서 단체 안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는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은 국가의 존속을 위하고 국가의 유익을 위한 법입니다. 국가에 유익 되고 국가가 발전함으로서 국가에 소속된 백성들에게 유익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 보호가 법과 규칙의 목적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과 규칙을 잘 지키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가라는 것은 법과 규칙을 통해서 백성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다수의 유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법과 규칙이라는 울타리 안에 매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도 법이 있습니까?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도 분명히 기준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신자를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신자의 자유가 법에 의해서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기준 되는 것은 있지만, 그 기준에 통제 받는 것이 아니고 기준을 지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준은 있지만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지켜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이란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기준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자와 실수로 죽이게 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보수자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오직 도피성 한 곳 뿐입니다. 그곳에서만큼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가족도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경우에만큼은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보수자가 자기 가족의 복수를 앞세워서 말씀도 무시해 버린다면 도피성으로 쳐들어가서 살인자를 죽여서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성으로 피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제사장이 거하고 있는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은혜와 보호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의 가족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사장의 은혜 아래 있는 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함으로서 모두가 제사장의 은혜라는 방식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원칙과 기준 아래 살아가야 할 나라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 아래 굴복하는 자가 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 19:8-10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항상 그 길로만 행할 때에 도피성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명령대로 행할 때, 즉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피성의 정신이 세상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 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 인해서 도피성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피성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는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를 얻어서 세상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없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죄없는 자로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긍휼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그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미움과 복수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하심에 사로잡혀서 용서라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용서하라'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되신 주님 안에서 배우게 된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 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난 긍휼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수 없이 살 수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일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라고 주신 땅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온 땅은 죄에서 용서받은 자만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땅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살아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를 잊지 말라고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발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땅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사회는 은혜와 긍휼이 기준이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석교회는 과연 은혜와 긍휼이 기준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나타나는 교회입니까?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나는 일이라면 내 개인의 유익쯤은 포기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원한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긍휼과 용서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게 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긍휼과 용서의 모습이 마음껏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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