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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웃 (신 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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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웃(신 19:11-21)

교회는 세상과 다른 사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통용되어서는 안되는 특이한 단체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통용되고 보여진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에서 이탈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상의 사고방식이 보여진다면 그 이유는 스스로 신자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교회로 모이면서도 '왜 교회로 모여야 하는지'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고 시간이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가야 하는 날로 생각하고 나왔을 뿐입니다. 종교적 무의식이 여러분을 교회로 나가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둔 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닌 이상 여러분에게서는 세상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성경에서 계시되어진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는지, 아니면 단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결코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믿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예수님을 안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문제라는 말은 하겠지만 '안믿는다'는 말은 안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판단할 때 '너희들이 나를 믿기는 하지만 그 믿음이 약해서 문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믿음은 있는데 그 믿음이 약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틀림없이 주님을 믿고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느낌이고 감정이며 자기 행동을 근거한 판단이었을 뿐이지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 역시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맡기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내가 내 마음을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의심하지도 않고 그 나라에 가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분명 하나님 나라를 믿고 있으며 소원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런 나에게 '너는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벌컥 화를 내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어온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무시이며 독선이라고 따질 것입니다.

목사에게 가장 모독적인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믿음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목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적어도 평신도인 우리들보다는 믿음도 좋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고 소원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좋기 때문에 신학교 가고 목사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목사 스스로도 '나는 목사다'는 것 때문에 전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교회일 하는 것을 '최고의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고의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목사가 '믿음이 없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목사처럼 탐욕으로 뭉쳐져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 탐욕이 교회라는 것에 의해서 감춰져 있을 뿐이고 하나님 일이라는 명목으로 위장되어서 정당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 건물에 수천 명의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제공되어지는 월급과 자가용, 멋있는 사택이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천국을 소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에게 '당신은 천국에 관심이 없다'라고 하면 화를 냅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목사라고 하는 자신의 직위를 무시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라는 직위가 한 인간의 믿음과 구원을 보증해 버리는 현실이 목사들을 대단한 착각으로 빠뜨려 버린 것입니다.

저는 지금 목사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라는 인간을 예로 들어서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는 장로대로 착각에 빠질 수가 있고, 권사는 권사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믿음의 착각에 빠져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장로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권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집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에게 속지 않는 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직책과 연륜을 버리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 믿음을 점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심으로 그 나라를 소원하는 흔적인지를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는 인간이 멋대로 상상해서는 안되고 성경을 통해서 그 모습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실수로 살인하게 된 자가 제사장이 있는 도피성으로 피하고, 죽은 자의 가족들은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거두어야 합니다. 즉 오직 제사장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란 주님의 긍휼로만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긍휼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긍휼을 법으로 삼고서 모이는 모임이며 긍휼을 법으로 삼고 모일 때 보여지는 것은 오직 긍휼일 수밖에 없습니다. 긍휼을 알고 긍휼에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복수라고 하는 옛 본성도 버리게 되어집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그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는 필연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석교회를 이런 교회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 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긍휼을 보여라 했다고 해서 보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옛 본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옛 본성을 주님의 긍휼이 극복하고 긍휼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린 단지 그것을 믿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만 높여야 할 자들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진심으로 천국을 알고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주님의 긍휼로 가는 나라라는 것을 안다면, 긍휼만을 원하고 긍휼만을 높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로 살지도 않고 긍휼만 높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천국을 사모한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여러분은 '나는 주님을 믿고 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소원한다'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긍휼만을 높이고자 하는가?' '나는 진심으로 긍휼을 기뻐하며 살고 있는가?'부터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님의 긍휼로 살지 않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만약 긍휼로 살지 않을 때 보여지는 현상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보여진다면 우리도 결국 긍휼로 가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긍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긍휼의 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13절까지는 이웃을 미워하여 계획적인 살인을 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나오고, 14절에는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고, 15-21절까지에는 위증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 모두는 이웃과 연관되어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긍휼만을 높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 가를 통해서 긍휼을 높이는지 아니면 옛 본성을 앞세우며 살아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미워해서 계획적으로 살인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하거든 성읍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서 그를 잡아다가 보수자, 즉 복수하고자 하는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로 넘겨서 죽이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런 자를 긍휼이 보지 않고 무죄한 피흘린 죄를 이스라엘에게서 제할 때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로 존속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미움에서 고의로 살인한 사람은 가차없이 이스라엘에서 제하는 것이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현재의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 율법에 담겨있는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합니다.

미움에서 계획적으로 살인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불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를 긍휼이 여기지 말고 제하라는 것은, 교회는 이런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보다도 자신의 감정과 고집을 앞세워서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것은 결국 함께 악에 빠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제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관계에서 얼마든지 미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욕하는 자를 미워할 수 있고, 나보다 잘된 자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옛 본성의 모습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웃에 대한 미움이 발생할 때 자기 감정과 고집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욕하고 해하는 자에게 초점을 두지 말고 그를 향해서 미움이 일어나는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주님의 긍휼에 복종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책망하고 치는 것이 긍휼에 복종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죄덩어리로 태어나는 인간에게 이웃은 단지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여길 뿐입니다. 혹 이웃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일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고 경쟁자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린 살면서 '저 사람만 없었으면'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저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승진했을텐데'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고, 학교에서도 '저 얘만 없었으면 내가 일등할 수 있는데'라는 악감정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나보다 잘난 이웃은 내 주위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악입니다. 이러한 악이 이웃에 대해서 악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비록 교회를 나오고 목사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제해버려야 할 불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있는 이웃이 아니라 나보다 힘이 없는 이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 예가 14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 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조상들이 정한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 23:10-11에 보면 경계표를 옮기는 것이 왜 악한 일인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을 펴시리라' 이 말씀에 보면 이웃의 경계표, 즉 지계석을 옮기는 것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한 횡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로운 자식이란 힘이 되는 부모가 없는 자식을 말합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힘없는 자의 것을 침범하는 것, 이것도 역시 주님의 긍휼을 무시하고 있는 불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힘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미워하고 시기하며 힘없는 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눌러버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모습이고 교회에서 제하여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가진 자의 힘에 굴복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불신자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5절부터 나오는 위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증이란 무엇입니까?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거짓을 말함으로서 이웃을 함정에 빠뜨리고 해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사람을 이 사람 저사람에게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험담 자체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악한 모습들이 교회에서도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이 사람 저사람에게 전화하면서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악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웃을 해치려고 합니까?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자신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방해가 되고 손해가 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좋게 말할리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주위에서 밀쳐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마음입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거짓말로 이웃이 해를 입든 말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이득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지배를 받은 채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보여져야 할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불신앙적인 언행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위증, 거짓말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사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본문 역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는 교훈으로 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거짓말은 이웃을 해치고서라도 내 이득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이탈된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이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 곧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악입니다.

악을 살인하고,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거짓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다만 살인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바르게 산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준은 전혀 다릅니다. 미움이나 살인, 약한 자를 억누름, 거짓말, 이런 모든 행위가 도출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산다는 것을 망각한 것을 근본 문제, 즉 악으로 말씀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의 이득을 꾀하며 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악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두고 그 나라를 소원하며 산다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기뻐하며 살고자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은혜와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약한 자를 누르고,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상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자는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며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최선의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현재의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결국 피해를 입는 자들은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자연히 이웃에게 그 득이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로 모이면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교회의 모습을 상실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 이웃에게 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존재입니다. 이웃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손해를 보시고 이웃인 우리들에게 이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득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믿음이 없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지 않는 존재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자신의 부족을 고백할 때 이것을 가지고 '믿는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행동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지의 여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자인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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